로그인 | 회원가입

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 - 세상의 빛(1)

작성자: 담임목사 | 등록일: 2009-01-04 | 조회: 2386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 세상의 빛(1)/ 마5:13-16

2년 전 새해를 기다릴 무렵 한 일간지에 매우 특이한 기사 하나가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슈가 아닌 전남 담양군에 살던 한 평범한 농부의 개인 이야기였습니다. 제목은 ‘27년 만에 본 아름답고 이상한 세상’이었습니다. 내용은 41세가 된 이 농부가 각막 이식 수술로 시력을 되찾는 순간의 감동을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그의 나이 7살에 눈을 다쳐 14살에 완전 실명을 했었는데 수술로 27년 만에 눈을 다시 뜨게 된 것입니다. 수술 직후 한줄기 빛이 오른 쪽 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의 시야에 처음으로 포착된 것은 그의 아내와 세 아들들의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보는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과 피부 빛이 얼마나 아름답고 곱게 느껴졌던지 그는 연신 ‘고와, 고와’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어서 그는 밖으로 나와 석양으로 물든 빨간 하늘빛이 얼마나 예쁜지 넋을 잃고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날아가는 새,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리고 서서히 깊어가는 어둠의 신비, 마침내 밤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 그 어느 것 하나 황홀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을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동안 너무나 답답했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뜬 자의 감격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빛은 우리에게 이처럼 생명의 소망과 환희의 감격을 줍니다.

특별히 교회는 40주년을 맞아 이 빛을 온 땅에 증거하는 공동체로 서기 위해 올해 표어를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로 한 해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전에는 이 세상이 얼마나 썩었고, 얼마나 어두운가를 잘 몰랐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앞으로 조금씩 다가가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영적으로 썩어 냄새나는 곳인가, 또 얼마나 캄캄하고 어두운 곳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눈에 그렇다면 예수님의 눈에는 오죽하겠습니까? 캄캄한 세상을 앞에 놓고, 또 썩어 냄새나는 세상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 여기에 너희라는 말은 굉장한 강조형입니다. 이 말은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아무리 세상이 썩고 어두워도 나는 너희만을 믿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만 믿어.” 하는 의미가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 ‘너희’가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열두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해당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오늘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는 우리 모두가 너희에 해당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참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대를 갖고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라고 말씀하시는 대상인 열두 명의 제자들이란 세상적으로 볼 때 얼마나 초라한 사람들입니까? 배운 게 있습니까? 가진 것이 있습니까? 기댈 데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놓고 마치 이 세상의 내일이 그들의 어깨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나은 점이 많습니다. 배우기도 많이 배우고, 그 당시 제자들의 믿음 보다 우리의 믿음이 훨씬 더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캄캄하고 썩어 냄새나는 세상이라고 하는 괴물 앞에 우리 자신을 놓고 보면 얼마나 초라해 보입니까? 얼마나 작아 보입니까? 무슨 빛을 발할 수 있으며, 무슨 소금 노릇을 할 것 같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조용히 내려다보시면서 “나는 너희만 믿어. 왜냐하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너희마저 없다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어. 절망이야. ” 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니 한편으로는 부담도 되고, 한편으로는 주님의 우리를 너무 잘 봐 주심에 대해서 감격도 하고 긍지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름 받아 일할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여러분, 이 세상은 예수님이 늘 안타깝게 여기시며 대단히 고통스러운 눈으로 보시던 세상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을 보시면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또 12장 31절에도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말씀에서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이란 말을 심판에 대해 말씀하는 중에 쓰신 적이 많습니다. 이 세상은 죄로 부패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제 맘대로 사는,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현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조차 받지 않는 포악한 세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고와 슬픔만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한평생 살다가 한숨짓고 눈물 흘리면서 떠나야 하는 그런 세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핑크라는 학자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지만 죄는 ‘이 세상’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셨지만 죄가 들어와서 바로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세상을 사는 하루하루가 우리에게는 모험입니다. 큰 위험 부담이 따르는 나그네 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마음놓고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사는 것이 훨씬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희망도 기쁨도 생명도 없는 곳, 영원한 멸망만이 가득한 세상임을 말씀해 주시고 동시에 바로 그러한 세상이 우리가 소금처럼 빛처럼 살아야 할 현장, 사명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몇 해 전 인가요? CNN 뉴스에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보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살된 6백만 명의 유태인 중 150만 명이 학살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진행되는 기념식이었습니다. 대학살이 있었던 때로부터 60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직도 음산한 분위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TV화면에 비친 현장을 보면서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사람을 철사로 묶어놓고 때려 죽였던 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안경만 가득한 방, 의족만 가득한 방, 여행용 가방만 가득한 방 그리고 머리카락만 가득한 방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자기 삶의 흔적을 남기고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불태워 죽였던 현장 바로 너머에 독일군 장군들이 춤을 추며 밥을 먹었던 식당이 불과 십 미터 거리에 있었습니다. 철학의 대가들과 시대를 풍미했던 지성인들이 특히 많이 나왔던 독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랬던 사람들 속에서 죄책감 없이 다른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는 죄악 된 모습을 함께 발견합니다. 아니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비정한 아버지가 보험금을 타기 위해 혈육을 무참하게 죽이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자기 쾌락을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면서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이웃을 짓밟고서라도 자신의 야욕을 성취하는 현실입니다. 이 땅을 바라볼 때 희망을 둘만한 곳이 없습니다. 어디 한군데 빛을 따라 가면 살 수 있겠다 하는 곳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분간할 수조차 없는 어둠 가운데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계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친히 육신을 입고 구원하려 오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빛 된 삶, 소금과 같은 삶의 역할들을 해주기 원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될 삶의 현장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사60:1절에 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내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분이 값비싼 희생을 치루시고 사신바 된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주저앉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육신의 약함 때문에, 태산 같은 문제 때문에, 영적인 슬럼프 때문에 고민하고 낙심하며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익숙함 때문에 매너리즘과 타성에 젖어 점점 나태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봄볕에 졸고 있는 병든 닭처럼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주저앉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 하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태어나서 이 세상에 사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늘 누리면서도 그 은혜를 제대로 깨닫지도 감사하지도 못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살아가지만,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주셨으니까 이렇게 사는 것 아닙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산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적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합니까? 그 가운데 죽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어려운 고비마다 잘 넘기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게다가 많든 적든 크든 작든 높든 낮든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죠. 재물을 쌓아 둔다고, 건강관리를 잘 한다고, 노후 준비를 잘 한다고 미래가 보장되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가 흔들거리는데, 어느 나라가 안전하겠습니까? 세계적인 굴지의 기업들이 줄도산을 하고 있는데, 어느 기업이 안전하겠습니까? 건강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당하고 병들고 죽어 가는데, 어느 누가 안전하겠습니까?

역도 선수 장미란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여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경기 직후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금메달은 하나님이 주는 겁니다. 이것이 제게 주어져서 정말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가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사실 당시 참가한 선수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들이라고 놀고먹었겠습니까? 각자 나름대로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장미란 선수가 하나님의 은혜로 우승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당면하는 큼직한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마음먹는 대로, 노력하는 대로 되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학 입시 때, 취직할 때, 결혼할 때, 사업할 때,... 큰일일수록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사실은 큰 일만 그런 게 아닙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순간순간 호흡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스스로 호흡하나요? 공기도 하나님이 주시지만, 내 몸 갖고 호흡하는 것도 하나님이 해주시는 겁니다. 호흡하는 것을 일일이 신경 쓰고 살아야 한다면 아무 일도 못할 겁니다. 보통 사람이 1분에 숨 쉬는 회수가 18회~20회 정도라고 하는데, 그거 일일이 내가 시계 보면서 세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 은혜를 깨달았다면 일어서서 빛의 증인이 되야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왜 일어나서 빛을 발해야합니까? 지금 이 땅에 영적 어두움 가운데 사로잡혀 오랜 세월 절망하고 주저앉은 사람들,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졸고 있는 사람들 나아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 영적으로 어두움 속에서 그 영혼이 죽어있던 사람들이 다 일어나야할 대상들이 아닙니까? 바로 이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추시는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밝히는 복음을 가졌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닙니까! 때문에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어두움과 절망의 세력은 물러가고 생명의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여기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는 말에서 ‘너희는’이란 말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강조하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각자가 빛을 발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 함께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 각자는 하나의 빛이지만 세상을 힘있게 밝히려면 교회 자체가 큰 빛이 되어 비춰야만 합니다. 교회가 함께 힘을 모으면 사탄의 권세는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힘을 모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힘을 모을 때에 만이 빛을 발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교회가 아닙니까?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너희’가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깨닫고 함께 빛을 발할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이 부패한 세상은 거룩한 사람들을 요구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은 빛의 사람들을 요구합니다. 다르다는 것 때문에 열등의식을 느끼지 마십시오. 내가 불신자와 다르다는 그 사실 때문에 열등의식을 느끼지 마십시오. 내가 다르다는 그 사실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그것이 저들을 향한 충격입니다. 그리고 도전인 것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요구되는 존재입니다. 다 똑같다면 그 사람하나 빠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르기 때문에 나는 직장 안에서 요구됩니다. 내가 다르기 때문에 나는 내 가정에서 요구됩니다. 그렇게 나는 요구되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우리는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특질을 가지고 향기를 발하며 부패를 막고 빛을 비추는 거룩한 사귐 속에 자신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장님이 등불을 가지고 다닙니다. 장님이 등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무슨 이유로 등불을 가지고 다니십니까?” “이 등불이 있어야만 사람들이 나에게 부딪쳐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빛은 나와 남에게 동시에 축복을 제공합니다. 이런 빛이 내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빛”이라고. 이 분명한 전환점이 우리에게 있었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사실, 이 변화는 하나의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이 나를 빛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빛이신 그리스도와 내 영혼과의 진정한 접촉이 이루어질 때,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의뢰하고 신뢰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비치기 시작합니다. 이제 문제는 나는 어떤 종류의 빛인가, 나는 얼마나 빛을 발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충성스럽게 선교를 마쳤던 선교사 한 분이 마침내 아프리카에서 선교의 거룩한 소명을 마치고 죽었습니다. 이 충성스러운 선교사의 무덤위에 그의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이 선교사의 무덤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겨 놓았습니다. “당신이 올 때는 어두움이더니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빛이 되기 위해서 빛은 스스로를 태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세상에 속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 세상에 굳게 서십시오. 이 세상을 도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 주십시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던 삶을 이제는 중단하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분명히 요청합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삶은 중단하십시오.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많은 기회가 남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현재가 여러분이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말씀 하신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그대로 내어놓고 ‘주님 맞습니다. 저는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고백하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다운 밝음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어둡고 그늘진 모습으로 아무런 영향력 없이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다면 오늘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 앞에 다시 서십시오. 그동안 안주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잃어버리고 살았던 영향력과 독특함을 회복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가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소유와 자리에 연연해하지 마시고 빛과 소금의 직분과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돌아보시면서, 주님의 부름 앞에 다시 응답하는 결단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