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겜에 머물 것인가? 벧엘로 올라갈 것인가? (창35:1-8) 2011. 1. 30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1-01-30 |
조회: 1968
새해가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월 마지막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에는 민족의 고유 명절인 구정이 있어서 아마 우리 교인들 역시 많은 분들이 고향이나 친지들을 방문 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30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움직인다니 정말 명절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가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는 것이 바로 구제역 때문입니다. 소나 돼지가 살처분 된 것만 해도 300만 마리가 다 되가고 피해액만 해도 3조가 된다니 상상이 안갑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고향에도 가지 못하는 우리 교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막상 설을 맞지만, 기록적인 한파와 치솟는 물가로 인해 재래시장과 서민 가정은 썰렁한 설 명절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이 설이 마냥 즐겁지만, 어떤 분들은 명절이 우울하기 짝이 없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는 목회자 여서인지는 몰라도 이런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운동경기에서 말하는 하프타임이 생각이 납니다. 굳이 말하면 전반을 끝내고 후반을 시작하기 위해 잠시 쉬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감독과 선수들은 마냥 쉬는 게 아니라 다시 전략을 세우고 남은 후반을 효율적으로 운영을 합니다. 이제 명절을 맞이해서 분주한 일상에만 메달리지 말고 구력으로 1/1일 시작하는 한해에 아직도 계획표가 없는 분들은 좀 이 기간 동안 하프타임을 걸어서 자신들의 삶의 계획을 잘 짜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 보면 누가 나오고 있습니까? 야곱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알렉산더 화이트’라고 하는 설교자가 야곱을 놓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가운데서 야곱만큼 하나님께 잘 보이고 용서를 자주 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제가 볼 때 그렇게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야곱'하면 어딘가 모르게 간사한 사람으로 그 이미지가 머리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끔 거짓말도 하고,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질이 좋지 못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태에서부터 사랑하셨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140년이 넘도록 한순간도 그를 놓지 않고 동행하시며, 그의 모든 길을 인도하시고 축복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우리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존재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 대부분도 야곱처럼 거짓되거나 간사한 데도 있고, 어떤 면에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이 별로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을 이처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곱은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세계에는 약 25000개의 종교가 있습니다. 그 종교들과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여러분은 많고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필이면 기독교의 신앙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까? 그 이유는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야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바로 이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그 메시지의 핵심을 한 단어로 표현 한다면 ‘은혜’입니다. 여러분, 은혜라는 것을 아십니까? 은혜를 맛본 적이 있습니까? 은혜의 강가에 뛰어 들어가 헤엄쳐 본 일이 있습니까? ‘Grace'니 ’Karis'니 하는 사전적인 의미를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했느냐를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단어,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사건의 마지막 귀결점인 은혜를 맛보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은혜가 어떤 삶의 현장에서 어떤 자에게 임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본문의 내용을 보면, 세겜 땅에 머물던 야곱의 가정이 감당치 못할 풍파가 몰아쳤습니다. 사랑하는 외동딸인 디나가 이방 남자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동생에 이 수치스러운 사실을 안 오빠들은 동생을 강간한 자뿐 아니라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는 복수극을 벌입니다. 이 일로 인해 가나안에 있는 이방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을 몰살시키려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자리에서, 이제 다시는 일어설 것 같지 않는 공포와 절망이 깊게 드리운 바로 그 자리에서 야곱은 자기 가족들을 전부 모아놓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던집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믿었던 하나님에 대해서 놀라운 간증과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오랜 세월 하나님이 없는 자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의 한 복판에서 그는 자녀들에게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나 처세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여기 ‘환난’이라는 말을 사전으로 찾아보면 평소에 알고 있던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환난'하면 날마다 신앙 때문에 쫓겨 다니면서 핍박당하는 것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원래의 뜻은 뜻밖의 불행한 일을 만나서 근심과 불안에 싸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환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뜻밖의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위기 앞에서 고통하고 고민하고 근심할 때가 자주 있지 않습니까? 오늘 야곱이 가족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1. 야곱은 지금 환난의 한 복판에서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던 것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다시 3절 말씀을 다 같이 읽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그 동안 하나님의 도움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때도 자기의 지혜를 썼고, 아내를 얻을 때도 자기가 14년 간 애써서 얻었습니다. 거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갈 때도 삼촌의 집에서 자기가 노력했고, 자기가 머리를 잘 써서 삼촌의 재산이 자기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형 에서가 죽이러 왔을 때도 에서와 잘 이야기해서, 결국 자기의 지혜로 원수 관계가 풀어지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자기의 노력과 애씀과 재치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정에 일어난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났을 때,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베여 들었습니다. 자신의 딸이 강간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더욱 힘든 것은 자기의 아들들 내면속에 있는 잔인함,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보다 더 잔인하게 행하는 복수극을 보면서 야곱은 깊은 회의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의 결과란 말인가? 이것이 내가 얻기 위해서 추구하고 또 추구했던 결과란 말인가?’ 마음속에 깊은 생각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녀들을 나무라지만, 자녀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나요? 오히려 대꾸합니다. 이일로 더군다나 그 지역에 있는 다른 족속들이 야곱의 집을 공격해 오리라는 것은 눈에 보듯 뻔한 사실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야곱은 피할 곳이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삶의 결과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과 더불어, 자녀들에게 기댈 수도 없고, 이방 민족으로부터도 피할 곳이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은 그를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한번 택한 내 인생 절대로 용도 폐기 처분용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1절에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잊혀졌던 한 가지를 기억하게 해 줍니다. “형의 칼을 피해서 도망갈 때 제단을 쌓았던 그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거하라”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피할 길을 또 열어주신 것을 봅니다. 그때서야 비로서 잊혀졌던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창세기 28장에 약속하신 그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축복이라는 사실을 드디어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가지고 도망칠 때, 루스라하는 벧엘에서 쓰러져 잠을 잘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창28:14-15절에 “네 자손이 땅에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여기에 대해 야곱은 창28:20-22절에서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생각해 보세요! 벧엘에서 서원했던 그 일이 벌써 30년이 가까이 지난 거예요. 그동안 서원한 것을 새까맣게 잊은 겁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잘 될 때는 내 잘난 맛에 거드럭거리고 살아갑니다만,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니까 비로서 자기를 돌아보면서 얼마나 자신이 교만하게 살았는가를 안 것입니다. 여기 “벧엘로 올라가라"는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올라가라’는 말은 지형적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거룩한 장소로 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야곱에게 이제는 하나님께 가까이 오라는 겁니다.
2. 이제 그는 가족을 모으고 중요한 결단을 합니다. 2절입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지금 야곱은 식구들에게 그 말씀을 전달하는데 아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먼저 우상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결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영적으로 육적으로 더러운 모든 것을 청산하라는 겁니다. 대청소하고 성결을 유지하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자세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이 세겜땅에 머문지도 10년이 됩니다. 자기 수완이 뛰어난 야곱의 눈에 이 세겜은 황금의 땅입니다. 여기서 벧엘로 올라갈 것을 사는 동안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마냥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야곱은 천년만년 세겜의 숙곳이란 곳에 둥지를 틀고 사는 재미에 빠져 있을 때 이 환난이 난 것입니다. 그것이 ‘디나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보금자리 속에서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행복해. 나는 더 이상 바라지도 않아. 나는 만족해.“ 하며 꿈같은 세상을 보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이 이상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음속에 몹시 불안한 감정이 일어나서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부부간에 심각한 문제가 개입될 때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부모가 원치 않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자기 자녀로 선택해 놓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나의 삶의 보금자리를 흩어 놓을 때가 많습니다. 이는 세상의 잔에 취해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을 끌어내어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개가 세상적으로 형통하면 이런 시험이 옵니다. 주님은 무엇이라 경고합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절대로 굴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가끔 보면 우리 가운데 영적 위기를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를 하나님이 깨우시는 날이 옵니다. 우리의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날입니다. 흩으시는 것입니다.
3. 이제 야곱은 인생의 후반전을 위해서 모든 익숙한 것과 소유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4절에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야곱은 여기 보세요. 썩어도 준치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날라리, 나이롱 신자라고 해도 그래도 뼈대는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녀들과 아내가 지금 무엇을 들고 나옵니까?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여기 상상치도 못한 우상들이 그들의 손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특히 아내 라헬은 아버지 집에서 나올 때 아버지가 신주 모시듯 하는 ‘드라빔’을 훔쳐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문제가 터지고 보니까 모양만, 무늬만 예수 믿는 빗깔이지 전혀 예수와 상관이 없는 이방 사람의 문화에 젖어 있는 야곱의 가정을 보게 됩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것은 야곱 가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제대로 신앙생활 합니까?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문제,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의 걸림돌 역시 우상입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더 집착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은 나의 관심과 정성을 다 뺏아 갑니다. 계속 집중하게 하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 하나 이상의 우상을 간직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 이것만은 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이 우상은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것만 건드리면,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것, 그 순간 하나님도 온데 간데 없어지는 바로 그것,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땅에 던져 묻으라는 것입니다. 마치 구제역에 걸린 생축을 미련없이 땅에 묻는 것처럼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별히 오늘 현대인들에게 ‘물질’은 무서우리만큼 집요하게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보여도 결정적인 순간에 돈의 위력 앞에 직분, 신앙의 연조, 주일 성수도 소용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그렇게 믿음 좋아 보이던 사람들이 돈에 걸려서 얼마나 많이 넘어 집니까? 아니, 교회 자체가 돈 때문에 흔들리는 실정입니다. 주님보다 더 관심을 갖고 더 집착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지금 야곱이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은 것은 단순히 이방 신상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이방 신상과 함께 자신의 가슴아픈 과거를 함께 묻었습니다. 세겜에서 사랑하는 딸이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밖에 없는 딸입니다. 시집가야 할 딸이 강제로 추행을 당하고 만 사건은 딸 디나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 전부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세겜을 떠나오면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신상과 귀고리를 묻었다는 말은, 그런 가슴 아픈 과거를 함께 묻었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겜을 떠나면서 야곱이 가슴 아픈 과거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버린 것처럼, 우리도 지난 삶에 겪었던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 가슴 아팠던 일들을 모두 묻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실패하고 괴로웠던 일들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실수와 실패는 빨리는 잊는 게 유익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자꾸만 되살아난다면 우리는 그 때마다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쓰라린 과거 때문에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또 다시 고통의 쓴잔을 마셔야 합니다.
자! 여러분! 5절을 보세요.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여기 발행이란 단어는 ‘날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상상이 갑니까? 도무지 일어설 것 같지 않던 야곱의 가정이 마치 독수리가 솟구쳐 오르는 듯한 힘찬 모습으로 세겜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당시 야곱이 두려워했던 이방 사람들이 오히려 야곱의 가족을 두려워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 지렁이처럼 땅을 기어 다니며 미물처럼 의미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던 야곱을 돌아보신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야곱을 통해서 나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을 부끄러워하지도 싫어버리지도 않으마 말씀하시며 야곱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이 오늘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에 나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시고 우리를 구해 자녀로 삼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환난 당해 씨름하고 몸부림칠 때 가만히 계실 리가 있습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시146:5절에 보면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축복, 빛나는 인생의 황혼, 이것은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야곱을 복된 인생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야곱을 포기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새롭게 일으켜주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번 명절날, 구력으로 새해를 맞는 이 한 주간에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요즘도 리더십을 위해 쓰여진 책 가운데 꾸준히 읽히는 책 가운데 밥 포드의 「하프타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가운데 “성공추구에서 의미 찾기로 바꾸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만을 찾아서 몸부림치는 인생의 신기루 같은 성공은 인생의 모든 가치를 파괴시키고 우리를 허무 속에서 떨게 합니다. 사람이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결산이 가까울수록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에 내 삶을 바치며 살아 왔느냐 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느냐, 내 이름이 남느냐, 그런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과 기회를 발견하고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일 때문에 내 인생은 보람 있었고, 신바람 나고, 놀라운 인생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평생의 보람 있는 가치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지난 1년 헐떡거리며 달려온 열매가 무엇입니까? 부지런히 달려온 것 같은데 주머니를 뒤져보니 있어야 할 열매가 없지는 않습니까? 급한 것들 때문에 소중한 것을 놓친 것은 없습니까?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니 내 재주로 산 것만 같습니다. 내가 땀 흘리면 잘 살줄 알았지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오늘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둬 가시면 쌓아 놓은 것들이 모두 무너져 버립니다. 지금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벧엘로 올라가는 훈련이 내 삶의 일상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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