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그는 누구인가?(삼상 16:6-13) 2011.7.17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1-07-19 |
조회: 1820
저는 인물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부흥회를 인도할 때마다 요셉이라든지 야곱, 그리고 엘리야, 또 올해는 삼손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우리를 감동을 주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참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헌신짝처럼 팽게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다윗은 특별히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995회 나옵니다. 컴퓨터로 조사해 보니까 995회, 그만큼 다윗이라는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 사람의 이름 중에는 최고로 많이 나옵니다. 행13:22절의 말씀을 보면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여기에서 '마음에 합한다'는 말은 '마음이 맞는다',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듯이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잘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하여 그와 같은 마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이 어떠한 사람이길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부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영웅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그가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어 나라를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인물이 아닙니까? 밧세바와의 불륜으로, 정말 하나님 앞에 불충한 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도 인간관계에서 느껴서 아시지만, 직장 생활이라든지, 회사에 다니면서 상관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일하는데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니 너무나 부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상16: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은 겉모습을 가지고서는 잘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가 아무리 언변이 좋고, 세상적인 명예를 가지고 있다 할찌라도, 그것은 겉모습뿐이지, 그 속을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당황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하나님은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는 중심을 본다." 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중심이란 우리 인격을 이루는 근본이 아닙니까?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심을 보신다는 말은 결국 우리의 속사람 혹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 있는지를 보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 있는지 없는지를 보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영이 깨어 있어야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분별하며 그의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허우대가 멀쩡하다 할지라도 그 영이 잠들어 있으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된 사울은 키가 남보다 훨씬 크고 잘 생겼지만, 그의 영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고, 스스로 교만하여 결국 하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영이 살아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간직한 소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서 다윗을 간택해 기름을 붓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서는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한 명을 왕으로 뽑고자 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새의 아들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선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미인 대회에서 미스 코리아 진(眞)을 뽑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제일 먼저 맏아들인 엘리압이 나왔습니다. 우람한 체격에다 다부진 생김새가 단연 군주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립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6절). 영적으로 민감한,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탁월한 선지자 사무엘조차도 외모에 깜빡 속았습니다. 하물며 우리 보통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속겠습니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경고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7절). 사람은 용모와 키를 본다는 것입니다. 외모를 따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 즉 마음을 먼저 보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도 얼마나 당황을 했겠습니까? 자신의 경험과 상식으로 이새의 자녀들을 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이새에게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11a에 보시면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11a).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마지막 남은 이 아들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등장합니다. 아버지 이새는 오직 두 가지 사실만 언급합니다. 첫째로 그는 막내, 즉 히브리말로는 '하카톤'이며, 둘째로 양치는 목동이기에 현재 양을 치러 나가고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막내, '하카톤'이라는 말은 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깔린 단어입니다. 중요한 자리에 나서지 말고 빠져야 할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한 집안에 철없는 꼬마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목자'라는 말은 아주 시원찮은 직업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아닌 양들과 함께 지낸다고 할 때 결코 우러러볼 만한 직업이 아닙니다. 더욱이 이웃집 아이를 돌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기술이 필요없는 별 볼일 없는 직업이 목자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이 다윗에게 눈길 한번 주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사람들은 겉모습을 주로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전형적으로 코드 인사를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하기만 하면 세상적인 기준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 사람을 써주십니다. 다윗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목동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외모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하나님만 향할 수 있는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마음에 합한 자로 여기시고 당신의 뜻을 다 이루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큰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을 들고, 그 다음에는 다윗을 들었습니다. 3,000년 이상 되는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왔는데, 그 혈통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을 제외하고 오직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만 언급합니다.
즉 다윗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길을 닦아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일찍이 루소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이 나를 쓰신다고 할 때 그 얼마나 황홀한 감격을 갖겠습니까?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멋진 ‘다큐멘타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 모두 주눅이 들어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에 소년 다윗이 나타나 사울 임금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나 정도의 용맹이면 해 볼만 합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일꾼들의 눈에는 일이 보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보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적장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계속해서 그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철부지 어린 소년의 이 고백은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그는 거친 광야에서 가족도 무시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의 시선은 광야에 무의미한 환경이 아니라 그 광야 속에 숨쉬고 있는 하나님의 꿈을 보았습니다.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두려워했고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 믿었습니다. 그가 무서워한 것은 블레셋의 거인이 아닙니다. 적군의 힘이 아닙니다. 사울 임금의 권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형님들을 전술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했습니다.
2. 이러한 다윗의 삶은 겸손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겸손에는 반드시 두 가지가 따라 붙습니다. 그것은 진실과 회개의 삶입니다. 다윗의 일생을 연구해 보면 정말 다윗은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왜요? 다윗은 실수가 너무 많아요. 허물이 너무 많아요. 저는 그저 몇 곳 보았는데, 전문가가 연구를 하고 책에 써놓기를 성경에만도 스무 곳 이상의 씻을 수 없는 실수와 죄상이 기록도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기 문제를 감추거나 질질 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을 돌아보며 즉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그의 회개에 중요한 점은 절대로 변명이 없습니다.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를 않습니다. 책임을 환경에 돌리지도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인간이기 때문에"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밧세바와의 관계를 보세요. 이 간음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하는 거 아닙니까? 더구나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했다고 성경은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죄를 회개할 때에 그는 한번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의 실수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 내가 책임을 집니다. 그건 내 잘못입니다. 아무 변명도 없고, 책임전가 의식도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진실입니다.
3. 그리고 다윗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까지 당당히 댓가를 지불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일로 인해 사울 임금의 시기를 받아 쫓겨다녀야만 했던 15년의 고통스런 세월의 시간들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얼마든지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동굴에 있을 때나 들에 있을 때나. 그래도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심지어 장인 되는 사울이 다윗을 향하여 창을 두 번이나 내 던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로 대항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끝까지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으로 섬겼습니다. 그의 신앙이요 그의 겸손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인 줄 아십니까? 압살롬이라는 다윗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왕위를 내놓고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 왕을 가로막고 돌을 던지며 저주했습니다. 아비새라고 하는 장군이 참다 못해 옆에서 칼을 빼고 다윗 앞에 요청합니다. ‘저놈을, 이 죽은 개 같은 놈을 내가 가서 목을 베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말 한마디면 끝납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말입니다.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버려두라.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마구 해대고 싶은 그 순간 마져 자신의 감정과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고 자신의 시선을 더욱 주님께 고정시켜 놓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픔이 있는 것 같지만, 자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반드시 선하게 인도하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의 말년을 보십시오. 40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쌓아놓은 보화와 재물,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지을 성전을 위하여 하나도 남겨놓지 아니하고 다 바치고 갔습니다. 자기 것을 남겨 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요즘 인생에 대한 생각들을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 교회 성도들의 가정에 돌 예배와 결혼식, 그리고 병원 심방과 죽음 앞에선 우리 인생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태어난 한껏 귀여움을 받고 돌잡이 할 때 이 아이가 도대체 무엇을 잡을까, 그리고 청진기라도 잡으면 금방의사가 된 것처럼 감격해 하는 부모들!! 그리고 결혼식 때 눈부시게 차려 입은 신랑과 그 신부는 마치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듯 당당한 걸음걸이로 생을 출발하지만, 인생의 황혼 역에, 아니 아직도 뭔가 해야 할 그 시간에 질병이나 뜻하지 않는 일 앞에 절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묘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전부라며,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 같이 허무하게 살다가 가는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인생을 움켜쥐고 있다가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좀 진지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겪게 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근심과 염려 가운데 살아갑니다. 고통과 슬픔, 역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배신을 당하고 오해 때문에 억울한 일을 겪기도 합니다. 무시를 당하기도 합니다. 끊이지 않는 질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정말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 역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두려워했고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 믿었습니다. 그가 무서워한 것은 블레셋의 거인이 아닙니다. 적군의 힘이 아닙니다. 사울 임금의 권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형님들을 전술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을 붙잡는 힘이었습니다. 행13: 사도행전 13장 36절을 보면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여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겼다’는 말을 NIV 영어성경으로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쩌다 실수로 태어나지 않고,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무 목적도 없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들에게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는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다가 하늘의 것들을 놓치는 것이 바로 소탐대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탐대실’이란 작은 일에만 신경 쓰다가, 큰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러한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찾아왔던 것은 대박의 축복이 아니라, 극심한 기근이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2개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고 가나안에 머물면서 기근을 견디느냐, 아니면 양식 걱정이 없는 애굽으로 내려가느냐, 두 가지 선택이 그의 앞에 있었습니다. 그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를 마중 나온 것은 감격과 흥분이 아니라 아내 때문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로 위기를 극복하기를 원했지만 결국 그 거짓말 때문에 아내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밑바닥까지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소탐대실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종종 그런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좀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때가 있습니다. 오직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위해서, 안정된 직장을 위해서, 돈 많이 벌수 있는 사업을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기쁨과 만족이 있지만, 나중에는 바닥으로 추락하여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소탐대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의 작은 이익을 추구하다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엄청난 축복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목적보다는 세상의 목적을 위하여 살다가, 소탐대실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하나님은 마음에 합한 자를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펼치십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순간에 처하더라도 그 순간에도 여전히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그분의 음성이 우리의 능력이 됩니다. 그분을 찬양하세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나로 하여금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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