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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만난 사람-니고데모(요3:1-13) 2011.10.1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1-10-17 | 조회: 1721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모두가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 마음마다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들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내 자녀가 어떻게 될지,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내 남편의 회사는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 어려운 내일을 걷고 있습니다.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 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챦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요한복음 3장에는 당당했던 자신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어둠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 사회적 지도자가 자기 인생의 변화의 새벽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런 질문을 공개적으로 예수님에게 묻기에는 자기의 신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는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는 정녕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born-again'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거듭난다 하면 “그래 저 뒷골목 어둠의 인생을 살아온 조폭이나 사기꾼은 거듭나야 하고 창녀도 거듭나야 하지만 나같이 평생을 남에게 큰 해 끼치지 않고 살아온 나와는 상관없는 명제야”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이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였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 1절을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우선 그는 유대인 지도자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에는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라는 일종의 우리나라 국회와 같은 조직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멤버였습니다. 이 의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우리나라 국회의원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3:10에 보면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이스라엘 선생이 아니더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종교와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녕 한 사회의 정신적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던 사회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만나시자마자 “그대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단어 중의 하나가 ‘거듭나다’라는 말입니다. 정치가 혼란스럽고 부패하면 정치가들이 거듭나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육계가 부패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교육가들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 광고할 때도 "거듭난 자동차"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런 단어가 하도 보편화되다 보니까 "거듭난다"는 진짜 그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요즘 사회에서 흔히 통용되는 "거듭나다"는 말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나다"라는 말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새로워져야 한다" "개혁되어야 한다" 혹은 "뜯어 고쳐야 한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하신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 새로운 생명, 새로운 탄생의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여기 본문에 ‘거듭 난다’는 말은 달리 번역하면 ‘위로부터 태어난다’(born from above)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땅의 부모의 자녀로 육으로 태어나듯 저 위에 계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영적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전혀 다른 탄생,
 
여기 한 밤에 찾아온 이 니고데모를 향해 예수님은 고집스럽게 이 거듭남의 중요성을 계속 말씀을 하십니다. 4절에서 6절까지 말씀 보면,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중에 반복해서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3절 말씀 보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또 5절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리고 7절 말씀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세 번씩이나 계속 거듭남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제가 생각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죠지 휘필더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마다 설교하실 때 좋아하는 18번 설교가 있었어요. 휘필더 목사님의 18번 설교가 ‘거듭나야 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 설교를 듣고 한 청년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까 그 목사님이 굉장히 좋아졌어요. 그래서 어느날 찾아와서, "나 목사님 자원 비서 하고 싶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그래서 죠지 휘필더 목사님이 집회하는 데마다, 부흥회를 하는 데마다 같이 따라다녀요. 가방 들고 목사님을 따라다니는데, 처음에 굉장이 좋았는데 가만이 보니까 가는 데마다 똑같은 설교만 해요. ‘계속 거듭나야 한다!’ 그 설교만 자꾸 한다 말이죠.
 
어느 날, 이 청년이 드디어 참을성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설교하고 목사님이 내려오는데 딱 붙들고는 "목사님 그 설교 몇 번이나 한 줄 아세요? 70번이나 하셨습니다. 언제 새로운 설교를 하시겠습니까?" 이때 죠지 휘필더 목사님이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왠 줄 아느냐? 네가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뭐 설교 들었다고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앞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거듭나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도 니고데모에게 그렇게 강조하셨어요.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니고데모가 무엇이라 이야기를 합니까? 4절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유대인의 지도자요 선생이라 하는 사람의 질문치고는 참으로 실망스럽고 황당한 질문입니다. 의외로 낮은 그의 지적, 영적 수준을 폭로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결코 물러서지 않으시고 이 거듭남의 이야기를 집요스럽게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본문 5절). 여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물로 태어남과 성령으로 태어남이라는 두 가지 태어남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적 태어남과 구별되는 영적 태어남 한 가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약1:18절에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듭납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씨를 뿌려서 그 씨가 움트면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벧전1:23절에도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거듭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거듭날 때 성령이 수고를 합니다.
 
세상에서 한 생명을 낳기 위해서 어머니는 죽음과 같은 해산의 진통을 겪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이 죽음이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서 새생명을 싹트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만으로 안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듭나는 기적은 성령과 말씀의 합작품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시원스럽게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뜻의 거듭남이라는 생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듣고 니고데모는 자신의 무지와 혼란스러움이 가중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그런 거듭남이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자문하면서도 부끄러워서 차마 예수님께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뻔히 아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본문 7-8절입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있는 것이 분명한 것처럼 성령의 역사로 사람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도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요 7:50-53을 보면 그의 삶이 달라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당시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비판적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이 군사를 풀어 예수를 잡아오게 하는데 어디 한구석 허점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오자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이 화가 나서 예수를 마구 비난을 합니다. 당국자들이 율법을 빙자하여 예수님을 정죄하고 비방하고 저주하는 말을 할 때 요 7:50-51절에 보면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니고데모의 그 같은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목숨을 내건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가 요 12:42절을 보면 잘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들의 공동체에 내쫓을 것을 결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해도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었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표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변호하자 동료들이 니고데모를 매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 7:52절에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왜 그와 같은 분위기를 잘 알면서 사람들이 까닭없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현장에서 그들과 야합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변호하는 말을 하였을까요?
 
그 뿐만 아닙니다. 요19:39절에도 보면 십자가 달려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거둡니까? 당시 십자가형을 받은 자의 시체는 아무나 가져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신을 기지고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으로 장사지내러 가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죽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자기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침향을 섞은 몰약을 가져옵니다. 도대체 자신의 명성과 지금까지의 쌓아온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는 그 순간 왜 이런 모험을 감당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 거듭났다는 것은 더 이상 옛사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의 말씀 앞에 자신을 쳐서 믿음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삶이 바로 거듭남의 특징입니다.
 
요즈음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도가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광주에 있는 장애학교 인화학교의 교장과 교사의 성폭력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 학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학교의 설립이념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니기를 기대하는 저의 일말의 기대는 산산이 부숴지고 다시 한 번 낙담하였습니다. 학교의 설립이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한 사랑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자주 자활 근면 활동하는 자활인 육성”
 
그래서인지 ‘도가니’라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인들의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한 사랑을 설립이념으로 내 세운 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이 어떻게 자식, 아니 손자, 손녀 벌밖에 되지 않는 어린 아이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단 말입니까? 한두 번도 아니고 수 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이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까? 요즘 우리 교회는 수요일 저녁 예배 때 사도신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두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기독론적 고백입니다. 그리고 다른 차원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증언으로서의 신앙고백입니다. 입으로 하는 신앙고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고백이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증언되지 않으면 그 신앙고백은 가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교회 안에서만 부름 받은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작은 그리스도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라면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카피라이터로서 뒤늦은 나이에 예수를 만난 후 ‘막 쩌낸 찐빵’이라든지 ‘예수 안 믿으면 손해보는 77가지 이유’라는 책으로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만재라는 분이 거듭나고 나서 쓴 글이 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그는 성경말씀이 하나도 믿어지지 않답니다. 자기의 상식이나 철학으로 예수 믿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결혼할 때 교회에 나가겠다는 조건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끌려서 교회에 다녔지만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순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 뻥도 심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물위를 걷는 기적에 대해서 들으면서 "목사 양반이 멀쩡한 것 같은데 참 거짓말도 잘하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를 향해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이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 먹이는 것이야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 순간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그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자기 인생의 구원자로 만난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한 찬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50여 년이 다 되도록 자신이 한 것은 세상에 속해서 세상 방법대로 세상에 취해서 살아온 것뿐인데 자기가 어디가 예쁜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은혜를 주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때는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자기가 이제는 자신의 인생 송두리째로 다 하나님께 드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기모습이 너무나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삶의 주인이 바꾸어졌는데 어떻게 인생이 바꾸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회심의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옛날 방법, 옛날 모습 그대로 삶의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회심이 한 순간 사람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의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의 권위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기독교의 신뢰성이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이것들은 바로 거듭난 사람들의 변화 된 삶에서 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예수 믿고 변화 된 삶에서 비롯됩니다. 변화 된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캡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을 때 기독교가 세상에 짓밟히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70-80년 전만해도 한국 교회 안에서는 이런 변화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들을 통해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자기들 발로 교회를 찾아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변화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꾸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입으로 거듭났다고 떠드는 사람은 많은데 변화 된 인격과 삶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가 똑바로 알아두어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변화를 경험했습니까? 목장 모임에서 은혜를 받았습니까? 설교를 듣다가 은혜를 받았습니까? 정말 변화를 체험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때로는 내려놓을 줄도 알고, 때로는 겸손하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아낌없이 드리기를 힘쓰게 됩니다. 거듭난 인생들은 더 이상 본능만을 위해 사는 동물 같은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서 많은 재물을 주셨습니까? 예수를 믿었는데 사업이 복을 받고 경제적으로 풍성해졌습니까? 그렇다면 그 축복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줄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에 쓸 줄 알아야 진정으로 변화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이 있어도, 아무리 지위가 올라가고 명예가 높아져도 거기에 마음을 안둡니다. 오직 모든 것을 가진 하나님, 나를 사람하신 하나님께만 내 마음을 고스란히 바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우리 동성교회가 이런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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