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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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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꿈을 꾸다 멈춰 버린 사람들(느1:1-11) 2012. 2.26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02-27 | 조회: 1468
오늘부터 ‘장애물을 디딤돌로 삼고’라는 주제로 부흥회를 시작을 합니다. 옛날에는 부흥회를 한다하면 정말 설레이는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각 가정마다 강사의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고, 또 예배가 끝나면 줄을 서서 안수를 받기도하고 또 몇몇 분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 상담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 부흥에 대한 매력들이 많이 사라지게 된 것을 봅니다. 일년에 한차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부흥회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를 가진 많은 분들의 생각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듯, 목사인 저 역시 주님이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 성도 여러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8번의 집회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이 집회를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강사인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종에 불과 합니다. 한 교회에 26년을 섬긴 저의 장단점을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르는 강사를 모셔다가 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몇 달전에 하나님께서 ‘회복과 열정’이라는 너무도 뚜렷한 교회의 비전을 주셨고, 그 비전을 함께 집중적으로 나누는 시간이 바로 부흥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 준비를 하면서, 성령의 간절한 도움을 구하고 이렇게 서게 되었습니다.



토미 테니(Tommy Tenney)라는 목사는 <갓 캐처스(The God Catchers)>라는 책에서 부흥을 태동시키는 힘을 ‘배고픔’이라고 정의합니다. 부흥을 일으키는 선구자는 훌륭한 설교자도 아니요 훌륭한 복음성가 가수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부흥을 태동시키는 선구자는 바로 우리의 ‘배고픔’이라고 말합니다. 부흥은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배부른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보고도 식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반대로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보는 순간 입 안에 군침이 돌고, 먹고 싶은 갈망을 느낍니다. 부흥성회는 바로 영적으로 배고픈 자들을 위한 만찬입니다. 나는 영적으로 충만해서 더 이상 내 안에 부흥이 필요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참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우리 안에 그런 분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번 부흥회가 여러분의 신앙이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또 그 분 앞에 나의 인생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하는 사명의 회복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만, 저 역시 이번 부흥회를 준비하면서 저에게 간절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큰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예수님이 피 값 위에 세워진 교회, 사도들이 피와 눈물과 땀으로 세웠던 하나님이 기뻐하는 건강한 교회를 열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교회, 그리고 신앙의 방황을 하던 자들이 이곳에서 믿음의 닻을 내리고 정말 감격을 가지고 예배의 인생을 걸고 그 은혜 앞에 자신을 즐거이 헌신의 도구로 드려지는 자들이 넘치는 그런 교회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우리가 부흥회 기간 동안 살펴볼 느헤미야서는 포로시대 이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당했습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당하고 쓸만한 젊은이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망하고 페르시아가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스룹바벨은 고레스 왕의 도움을 받아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 일부를 데리고 1차 귀환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주전 537년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던 솔로몬 성전이 70년 만인 주전 516년에 스룹바벨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만 재건하였을 뿐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은 완전히 재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458년 에스라의 인도 아래 2차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르훔과 심새라는 사람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갑자기 성벽재건 공사가 중단되고 맙니다.



그리고 약 14년이 지났을 때, 본문의 주인공인 느헤미야가 등장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보면 아닥사스다왕 20년, 그러니까 주전 445년 어느 날 느헤미야는 고향을 다녀온 형제 하나니와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떤지 물었다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하는지라.”



여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라는 말은 곡식을 타작을 할 때 쓰는 타작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종의 도리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 곡식을 깔아놓고 도리깨로 힘껏 내리치면 곡식알들이 전부 떨어집니다. 환난은 마치 시자들을 땅에 눕혀놓고 도리깨로 내리치듯이 호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능욕’이란 단어는 인간으로서는 입에 참아 담을 수 없는 수치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자기들은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받은 자녀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을 자신들의 눈으로 볼 때 굉장히 낮춰 봤어요. 자기들은 특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저 사람들은 택함 받지 못한 이방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하고 죄짓고 타락하게 되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앗수르에서 북 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바벨론에 의해서 남 왕국 유다가 멸망을 당하고 포로 생활을 하다가 이제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들어왔습니다. 아마 고국에 오면 뭐든 할 것 같은 희망을 어느 누구들 안 가졌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가졌던 희망도 오래 가지를 못했습니다. 외부세력에 엄청난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항도 해보고 하나님 앞에 절박한 심정으로 얼마나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끝도 끝도 없는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 올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고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고 맙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닙니까?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그 당시 예루살렘 길에는 날마다 시체가 즐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곽이 없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공격해 오면 대책 없이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고국에 와서 계속된 이 고난 앞에 저들의 마음에 담겨 있는 꿈마져 송두리째 짓밟힌 것입니다. 이제 저들은 더 이상 버틸 힘도 성벽을 재건할 힘도 다 상실 한 채 하루 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지금 느헤미야가 바로 그런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방해공작 때문에 성벽을 건축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갔던 사람들이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 당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에게 신임을 받아 수산 궁에서 ‘술 관원’으로 있었습니다. ‘술 관원’은 왕이 마시는 술에 독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미리 술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요즘의 경호실장이나 비서실장과 같은 직책으로서 독살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왕을 보호하고, 왕과 함께 앉아서 국정을 논하는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는 이민자로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포로로 끌려간 사람으로서 출세하기 쉽지 않았지만,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페르시아 제국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떠나온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건,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져 있건, 성문이 불타 버렸건, 그러한 것은 그의 삶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에게는 모든 초점이 권력에 있습니다. 어떻게 권력을 잡을 것인가, 잡은 권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술관원 역시 어떻게 왕의 신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렵게 오른 이 자리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1,600Km나 떨어��조국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잠깐 울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수일 동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가 취한 행동이 4개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울고, 슬퍼하고, 금식하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억만리 멀리 떨어진 고국에서 들러온 소식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습니다. 자신은 페르시아 왕궁에서 높은 지위에 앉아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조국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조국과 그 조국에서 고통당하는 동포들의 소식을 듣고 수일 동안 음식을 먹는 것 마져 잊고 슬피 울었습니다. 왜요? 성벽이 불타고 훼파되었기 때문입니까? 고난 앞에 고통 받는 그것 때문입니까? 물론 그것도 있겠습니다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 백성들의 가슴에 타오르던 꿈을 포기한 모습 때문입니다. 오늘 제목이 무엇입니까? ‘꿈을 꾸다 멈춰 버린 사람들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제일 쓰기 어려워하는 인생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살 의욕이 없어지고,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사회가 나를 포기하고, 내 형제들도 나를 포기하고, 내가 마포불백이 되었어도, (?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 나 스스로 아직 나 자신을 포기하지만 않았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포기는 곧 절망이고 절망은 희망의 유일한 적인 것입니다. 난치의 질병과 싸우시는 분들을 관찰해 보면 한 동안 잘 견디시다가 한 순간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스스로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병세가 위중해도 악 조건 속에 잘 견기다가 한 순간 극적으로 호전되고 기적을 체험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포기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여기 느헤미야를 보세요. 비록 자기 백성들이 저렇게 나자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이것을 결코 모른 채 하거나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느혜미야는 조국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하려고 합니까? 그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갑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 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 지금 느헤미야의 경우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아닥사스다 왕이었습니다. 왕의 말 한마디면 쉽게 문제가 풀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날마다 그를 만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자기의 문제를 왕에게 아뢰이지 않은 것을 주목하십시오.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물론 그는 현실적으로 아닥사스다 왕의 행정적인 결재가 없이는 예루살렘성의 중건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결재에 앞서서 하나님의 결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응답의 싸인을 받고 싶어한 것입니다. 사람이 허락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움직이셔서 허락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왕을 통해 이 허락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11절의 기도를 읽어보십시오. 지금 그는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을 움직이셔서 그의 신임과 허락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쉽게 이 문제를 왕에게 말하지 않고 기도만 계속했다는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한 것을 보여 주지 않습니까?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무너진 채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이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 삼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루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나를 사신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내 속에 당신의 꿈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꿈을 가꾸며 사는 것이 성도요.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꿈을 포기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아끼는 국보 제 1호가 남대문입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남대문이 불에 다 타버렸습니다. 누전으로 불이 난 것도 아니고 더구나 지진 때문도 아닙니다. 한 방화범이 불을 저지른 것입니다. 당시 불을 지른 방화범은 한 노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을 때가 없다고 이성을 잃은 한 늙은 광인이 그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이 한층 더 컸습니다.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 때도 오랑캐의 그 침략에도 꿋꿋이 그 자리를 버터 주었는데 그리고 6.25 동족상잔의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도 지켰 왔는데 그렇게 타버리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단순히 국보급 목조 건물 하나가 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가 타고 자존심이 타고 우리의 미래가 타 버린 것 같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꿈이 없기에 자기 한 사람이 지금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잠 29:18의 말씀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꿈, 비전을 말합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할 때 인간이 경고 망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비전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비전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은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꿈이 없으면 목회자이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꿈을 가졌다, 가지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어떤 값을 치루고 있습니까?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던 헬렌 켈러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때 헬렌 켈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꿈이 없이, 비전이 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꿈을 잃어버린 시대는 아닐 까요? 생각해 보세요. 올 한해만하더라도 과거의 어느 시기에 못지않은 정치적 격변이 예상됩니다. 4월에는 총선, 그리고 12월에는 대선이 치러지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권력 지형의 두 축인 국회와 청화대의 주인공이 한꺼번에 바뀌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 변수도 커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후진타오 시대를 마감하고 시진핑 시대가 열립니다. 러시아에선 ‘마초 통치를 표방한 푸틴 총리가 4년만에 대통령 자리에 복귀해 제2의 장기 집권 시대를 시작을 할 것입니다. 중국과 러시아의 이런 기세를 업고 김정은은 3대 권력세습의 기반을 확고히 다질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볼 때 북한의 핵문제, 미사일 문제는 우리의 안보를 끊임없이 불안감으로 흔들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국가나 사회는 거대한 파도처럼 조각배 같은 개인의 삶을 얼마든지 바꿔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각배는 멈춰서려하지만, 파도는 끊임없이 흔들어 댑니다. 지금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그리스나 이탈리아 국민의 고통이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정말 현실의 상황을 안타까이 여기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그래서 잃어버린 꿈을 찾는 회복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느헤미야��자기의 권력의 힘으로 자기의 처한 현실을 해결해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그는 왕을 의지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을 움직이셔서 그의 신임과 허락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쉽게 이 문제를 왕에게 말하지 않고 기도만 계속했다는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한 것을 보여 주지 않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갈망하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성 여러분!

여러분이 기대하는 진정한 소망은 무엇일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최선의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 참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지 않습니까? 느헤미야처럼 절망할 순간에 그 일을 능히 감당할 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가 아무리 크고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문제보다 크시고, 능히 다스리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만 변함없다면 문제는 더 이상 크지 않습니다. 태풍 가운데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베드로는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를 명하여 물위를 걷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 속에는 자연을 통치하시는 전지전능의 신, 베드로를 명하여 인생의 물위를 걷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물 위를 걸으라 하셨을 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좀 전까지만 해도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베드로는 태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태풍이 크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물 위를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파도가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주님을 시야에서 잃어버리기 시작했을 때 물속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문제가 커서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이 문제입니다. 내 물질과 지식, 지혜 때문에 믿지 못합니까? 만약 인간의 한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귐과 이해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을 뛰어 넘는 하나님, 절박한 문제 앞에서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계시는 지혜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시 찾는다면, 오늘 느헤미야에게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그 기대가 자신에게 절박한 기도가 되었고, 마침내, 마침내 기도로 역사를 바꾸는 새로운 시대가 잉태 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왜 우리가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았던 경험과 삶의 처세술이라는 그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사람은 주님이 원하신다면 과감하게 그 틀을 깨고 나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여러분 가운데 생각이 바뀌고 관점이 바뀐 사람의 몫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제는 진지하게 무릎을 꿇을 때입니다. 이번 부흥회때 나를 주께서 만져 주옵소서!! 나를 치료해 주옵소서!! 겉은 멀쩡한 것 같은데 병들었습니다. 나, 이대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나!! 다시 일어서고 싶습니다. 나를 회복 시켜 주옵소서!!



기적이 우리 삶 속에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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