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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거기 너 있었는가?(요19:23-30) 2012.4.1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04-02 | 조회: 1525
여러분 가운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신 분이 계십니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역의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라는 전쟁영화가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중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오마하 해변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미군 밀러대위는 부하들과 함께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상륙임무를 완수합니다. 같은 시각, 전사자 통보업무를 진행하던 미국 행정부는 네 형제가 모두 참전한 라이언 집안에서 세 명의 젊은이가 이미 전사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막내도 낙하산으로 그 상륙작전에 침투되었던 것입니다. 비탄에 빠진 라이언 부인을 위해 마샬 장군은 네 번째 아들인 제임스 라이언을 반드시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그 특수명령은 이제 막 상륙한 밀러 대위에게 내려졌습니다.



밀러 대위는 일곱명의 대원을 데리고 그를 찾아 나섭니다. 여덞 명이 한 명을 구하러 가라는 무모한 명령에 대해, 부대원들은 “도대체 세상에 이런 이상한 계산이 어디 있어!”라고 투덜댑니다. 그러자, 밀러대위는 대답합니다. “라이언은 착한 사람일 거야. 우리가 구해야 할 가치가 있을 만큼.”부대원들은 독일군 지역 깊숙이 들어가 전투를 치룹니다. 찾아가는 도중 동명이인의 다른 라이언을 만나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몇 명의 대원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죽어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부대원들은 과연 1명을 구하기 위해 8명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1명의 목숨이 8명의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가?”



드디어 라멜지역에서 문제의 라이언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라이언 일병을 찾기는 했지만, 불행하게도 마지막 전투에서 라이언 일병만이 살고 밀러대위와 소대원 전원이 죽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 라이언 일병에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기를 바란다. 이 모습들을 감사히 받아라!”. 그들의 희생을 감사히 받으라는 말이지요. “오직 너 하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너는 살아났다. 그들은 더 이상 바칠 것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는 있다. 너는 그들의 희생에 걸 맞는 인생을 살아가라.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그들이 행한 일을 감사히 받아라.”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노인이 된 라이언일병은 가족들과 함께 격전지를 다시 찾습니다. 밀러대위와 소대원들의 고귀한 희생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삶이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노라고 울먹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수많은 전쟁 끝에 살아남은 당신은 과연 그 희생의 대가로「살아 남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는가?”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바쳐진 전우들의 거룩한 희생을 과연 그대는 감사하게 받으며 살아왔는가? 지금이라도 그들의 희생을 감사함으로 받으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나 하나를 구원의 자녀로 삼기 위해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신분입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 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자격을 따지셨나요, 무엇을 요구하셨나요?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냐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주변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5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현장에서 바로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 요한, 이렇게 다섯 명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시면서 서서히 죽어 가시는 예수님 바로 곁에, 작은 목소리로도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거리에서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 본 사람들입니다. 어떤 면으로는 이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그 신비스러운 현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었고, 비록 그들이 예수님이 마시는 쓴 잔을 함께 나눌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그 잔에서 떨어지는 몇 방울의 담즙은 아마 혓바닥에 대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붉은 죄가 눈 같이 희어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되었고 딸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보면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좀 더 가까이 가보고 싶고 좀 더 알고 싶어 하는 안타까움과 갈증이 마음에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십자가 곁을 떠나지 않은 이사람들은 당시 철저히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받아주시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이끄신 주님을 결코 떠나지도 배신하시도 않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눅8:2절에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성경 속에 나타나는 다른 청순한 마리아들과는 달리 본래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한 귀신도 아니요 일곱 귀신이나 씌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도덕적 정신적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영육간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창녀였습니다. 평생 남정내의 품에 기생충처럼 파고 들어 자기 몸뚱아리를 파는 그를 누가 동정이나 하겠습니까?



그리고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는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동정녀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예수님을 낳고, 예수님을 키우신 분입니다. 어쩌면 이 아들 하나 때문에 세상적으로 온갖 상처를 받은 분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사지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흐릅니다. 죽어 가는 예수님 앞에서 군병들은 서로 제비를 뽑아가며 예수님의 유류품을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순간입니다. 그 자식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갑니다.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옷은 자기 자식의 옷입니다.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직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뒤로 넘어져 실신하지도 않았습니다. 불한당 같은 로마 군병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홀로 슬픔을 삼키면서 아들의 죽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요한이 십자가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성미가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에게 은밀히 부당한 청탁을 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던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만이 주님의 죽음을 십자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이 땅에 주께서 머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삶의 변화를 받았습니까? 그런데 정작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주님의 십자가 앞에 그 어느 누구도 있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을 하실 때 환호하며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나무가지들을 베어 길에 깔고 소리 높여 “호산나, 다윗이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8-9) 하던 군중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며칠 사이에 돈의 유혹과 거짓선동에 넘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소리 지르며 로마 총독 빌라도를 압박하는 무리로 돌변합니다. 그리고 참 충격이 것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3, 35) 장담하던 베드로도 그 자리에 없습니다.



R. A. Toray 라고 하는 목사님께서 쓰신 책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미시간 주에 풍랑이 일어나서 배 한 척이 파손이 되었어요. 그때 한 수영선수가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가서 무려 스물세명이나 구조를 했어요. 그것이 신문에 나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몇 년 후에, 아주 오랜 후에 토레이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미시간호에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 청년 하나가 23명의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습니다' 하는 그런 설교를 했더니 설교가 끝났을 때쯤 해서 한 노인이 하는 말이 "제가 바로 그 청년입니다" 그랬어요. 예배 후에 내 사무실에 들어오라고, 그래서 들어와서 차를 나누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당신이 그때 겪었던 일 중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했더니 이 노인이 하는 말이 "한사람도 고맙다는 말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도 온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상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이렇게 어려워지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이 아침에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 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여러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지난 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정쩡하게 십자가를 맴도는 그런 비겁한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다니지만, 거듭난 그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한 생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거듭난 나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종교인으로 그렇게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구원은 받았지만, 성숙하지 못한 내 모습 때문에 늘 시험에 빠져 어린아이처럼 자기 안에 갇혀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에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23절을 보시면 간단한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23절에 계속해서 중요한 말씀이 또 하나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서 네 깃으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발가벗겼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은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것이 십자가의 달린 자의 운명입니다. 막15:25에 보면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오전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런데 마27:46에 보면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적어도 여섯 시간 이상을 세워진 십자가 위에 달려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 십자가의 형틀만큼 무서운 고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만큼 잔혹한 죽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의 시세로는 십자가를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이 십자가의 죽음이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인간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엄청난 희생이며,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대제사장이나 빌라도, 그리고 군중들을 보십시오. 그 당시 대제사장이나 빌라도가 약간의 양심이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최소한의 공정함을 고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그와 같이 혹독하고 소름끼치는 십자가형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의 생명은 공정성과 합법성에 있습니다. 더욱이 한 사람의 생명을 끊어 놓는 사형을 선도하는 재판이라고 한다면 다른 어떤 재판보다 공정하고 합법적이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낸 예수님의 죄목은 ‘행악자’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악자란 말 그대로 악을 행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것도 어쩌다 한두 번 실수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고질적으로 악을 행하는 흉악범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만큼 예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세상은 그를 싫어 버렸지만, 그 고난의 현장에서 주님은 오히려 세상 앞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원히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하시고'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구약에 예언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일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의롭다 하실 수 있는 명분을 다 완전하고 충분하게 주님이 갖추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완전하고 충분한 구원의 길을 우리 주님이 닦아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이루어 주신 현장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 십자가 가까이 가서 조금이라도 함께 있어보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수색대 8명이 죽어가면서 던진 말한 마디가 무엇입니까? “오직 너 하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너는 살아났다. 그들은 더 이상 바칠 것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는 있다. 너는 그들의 희생에 걸 맞는 인생을 살아가라.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그들이 행한 일을 감사히 받아라.”‘너는 그들의 희생에 걸 맞는 인생을 살아가라.’



그렇습니다. 나를 위해 그 더러운 죄와 수치를 대신 짊어지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다면, 우리 역시 주님의 그 희생에 걸맞는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저녁부터 온 교회가 모여 “거기 너 있었는가?”란 주제를 가지고 함께 골고다 언덕에 올라와 십자가 앞에 모이려고 합니다. 은혜입기를 기도하십시오. 십자가 앞에서 사명의 회복이 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과 제가 그 하나님은 그 놀라우신 은혜 앞에 살아간다면, 이 고난 주간을 어떻게 보내겠습니까?



여기 모인 여인들처럼 세상의 환경에 매이지 않고, 자신들이 당할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가까이 십자가 앞에 나와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는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주님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시며 기도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일어나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자.”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는 자만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한 주간 동안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함으로 우리의 영혼에 주님의 놀라운 사랑의 메아리가 가득 울려 퍼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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