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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어찌하여 우느냐?(요20:11-18) 2012.4.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04-08 | 조회: 1504
죄와 죽음과 사탄의 모든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이 예배에 참여신 모든 분들께 부활의 승리와 영광과 소망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옆에 계신 분과 함께 부활의 인사를 나눕시다. “우리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바로 당신을 위해 살아나셨습니다.” 아멘! 신앙생활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의 종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저주받은 자리요 심판의 자리요 실패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덤에 장사지낸 예수를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권세를 철저하게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탄의 머리를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온 인류에게 새로운 소망과 기쁨과 승리의 감격을 안겨주신 인류 최고 최대의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아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생각 속에 머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류 가운데 일어난 실재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만약 부활하신 주님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사건은 20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오늘 나의 사건으로 나의 체험으로 나의 삶 가운데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11절에 보면 한 여인이 울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11a)" 여기에서 ‘울다'는 동사 klaio는 단순히 울먹이거나 혹은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땅을 치며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것, 간장이 끊어지듯 애곡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간 막달라 마리아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애곡하였습니다. 이른 새벽 아직까지 거의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시각에, 골고다 언덕으로부터 새벽의 정적을 찢으며 울려 퍼지는 여인의 울음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이 여인은 지난 날 일곱 귀신에 들렸던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눅8:2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다른 청순한 마리아들과는 달리 본래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한 귀신도 아니요 일곱 귀신이나 씌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도덕적 정신적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영육간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창녀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노리개감으로 버려진 쓸모없는 여인입니다. 그런 파탄 난 자신을 예수님이 정말 인간 대접해주셨고, 자신의 상처를 싸메어 주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늘 자신을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살았던 그녀는 남들이 무서워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마져 마다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남들이 다 자는 어두움이 짙게 깔린 새벽에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은 무덤이 열린 채 마땅히 그 속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달려가 알립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없어 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사도들의 반응을 누가복음 24장 11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사도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주님의 부활을 깨달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말을 허탄케 여기며 믿지 않았습니다. 허탄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빌 虛' 즉 아무것도 없다는 ‘허’와 ‘거짓 誕’ 혹은 ‘속일 誕’으로 이루어진 ‘허탄’이란 말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거짓말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생시에 그토록 강조하셨던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생각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만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즉시 일어나 주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과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만 잘 정리되어 개켜져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대로 였습니다. 두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허탄한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그 현장에서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뛰어 너머,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던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할 차례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야 할 때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바로 부활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9절을 보세요.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여기에서 ‘알지 못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 다음으로 부활의 현장에 들어간 두 번째 증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서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지도, 깨닫지도, 생각하려 하지도, 없어진 주님을 찾아 볼 엄두를 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안타깝게도 본문 10절이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 그들은 그냥 집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3년 동안이나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랐건만, 그리고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그 엄청난 사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건만, 아무 생각 없이 베드로와 요한이 그냥 자기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안타깝게도 주님이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당시의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과는 달리 다시 무덤을 향해 막달라 마리아가 갔지만, 그도 부활을 믿은 게 아닙니다. 단지 주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것 때문에, 그리고 시신이 없어진 것 때문에 다시 무덤을 향하여 간 것입니다. 그리고 통곡을 한 것입니다. 자신을 믿어주었고 자신을 사람대접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견딜 수 없는 아픔입니다. 그런데 그 시체마져도 누군가 가져갔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다는 창녀였기에 남편도, 자식도, 번듯한 친구 한 명도 없었을 그 가련한 여인이 울부짖는 애곡 소리는 얼마나 애절합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게 통곡하고 또 애곡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 예화. 유기열 장로님. 고합- 장치혁 회장님. 저의 어머니



이처럼 하염없이 우는 여인을 향해 13절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기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하는 이 음성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이 아닙니까?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모습이셨고 음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묘지 관리인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마리아야!! 동산지기라면 마리아의 이름을 알겠습니까? 그제서야 막달라 마리아는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는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주님과 3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제자들을 제치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첫 번째 증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을 위해 계속 살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창녀로 비참하게 썩어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찮은 여인이 주님의 도구로 자신을 온전히 바쳤을 때 인류 최초로 부활을 증언하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 말로 부활의 증인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을 주님의 도구로 바칠 때 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증명해 준 위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막달라 마리아란 더 이상 비천한 창녀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녀야말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의 영원한 표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재미난 표현이 있습니다. 17절 상반 절에 보면 이 여인이 예수님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여기에서 ‘만지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붙잡고 늘어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을 때에 가만히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유독 ‘나를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아 본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계속 예수님을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눈앞에 저 처절한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그리고 무참하게 죽으신 그 주님이 이처럼 다시 살아났는데 그 감격, 그 기쁨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못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고서 너무나 기뻐 예수님을 붙잡고 늘어진 것입니다. 다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앞으로도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이 순간에 집착하거나 머무르려 하지 말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부활하신 주님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막달라 마리아는 그 길로 제자들을 찾아가 외쳤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녀는 본래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던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인간을 살리는 생명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막달라 마리아의 그 변한 참 생명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왔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그녀의 여생이 얼마나 값지고 보람되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자기에게 부활의 승리를 주신 예수님을 본 마리아는 그의 삶의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아마 성경은 그를 더 이상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사는 동안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는 감격을 세상 앞에 아름답게 드러내며 살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주님의 부활은 사망 권세를 이긴 생명의 승리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절망과 탄식을 기쁨으로 바꾼 환희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부활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평안으로 이끄는 찬양의 역사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하며 이처럼 엄청난 성장을 하게 한 사람 중에 우리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분은 원래 영국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해서 미국에서 성장했습니다. 한국 이름은 <원두우>입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인도의 선교사로 나가려고 계획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복음의 문이 열렸는데 선교사로 갈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혹시 친구들 중에 조선에 갈 사람이 없는지 수소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친구가 ‘네가 가면 되지 않느냐?’ 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선교하러 왔습니다. 그가 이 땅에 첫발을 내딛은 곳이 바로 1885년 부활 주일 아침, 제물포 항입니다. 그때 언더우드 선교사가 지은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 이라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어떻게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 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주소서!



그는 절망하지 않고 한국에 와서 병원을 짓고, 고아원을 짓고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가 새문안 교회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한국 민족이 일본에 주권을 침탈당할 만한 나라는 도저히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며 “문화를 보존하고 나면 언젠간 독립국가로 바로 설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젊은이들을 깨우고 민족의 일꾼들을 세우고자 학교를 세웁니다. 연희 전문학교입니다. 지금의 연세 대학교입니다. YMCA를 세웠습니다. 아들 원한경 박사는 연세대 교수와 교장으로 제직했고, 6.25 전쟁때 심장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그의 부인은 공산당의 테러로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3형제는 미군으로 입대해서 한국전쟁에 참전을 했습니다. 언더우드의 가문은 4대에 걸쳐서, 119년 동안 한국을 위해서 헌신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포에 언더우드, 아들, 손자 3대가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4년 언더우드 가문은 “이 나라를 향한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다 주고 갑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모든 것을 주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이 부활 신앙의 토대 속에서 온갖 핍박과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선교 한국으로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 엄청난 주의 역사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요즘처럼 힘들고 이렇게 어둡고 암담한 현실이지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비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절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존귀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존귀한 존재를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고 못 본 체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통곡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이 부활의 참 기쁨을 그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지난 날 그녀는 자신의 심령이 사막처럼 황폐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령에 ‘부활의 기쁨’을 담기 시작할 때 그는 인생의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로 비관하지 마십시오. 허무를 가지고 한숨 쉬면서 눈물을 짓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믿습니까? 할렐루야.



오늘 부활의 이 아침! 부활의 능력을 입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 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삶이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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