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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신 8:02-04;12-19) 2012.8.12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08-12 | 조회: 1468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신 8:02-04;12-19) 2012.8.12 이승진 목사

설교의 중심사상 - 과거 우리조국이 광야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 은혜로 지켜주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잊지 말고 기억하여, 우리 후세대가 진정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나라로 우뚝 설 수 있는 거룩한 토양을 마련하자!

서론 - 8.15 광복 65주년과 이중 시민권

오늘 거룩한 주일날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광복절 기념주일로 예배드리는 날입니다만, 우리 옆에 분들과 함께 이렇게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광복의 은혜를 감사합시다. 광복의 은혜를 감사하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1. 공동체에 대한 소명으로의 구원

이번 주 수요일은 우리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36년간의 치욕스런 식민지 압제를 끝내고 대한의 독립을 쟁취한 광복 67주년이 되는 8.15 광복절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오늘 8.15 광복절을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게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8.15 광복절은 저와 여러분이 함께 믿는 이 하나님의 구원이, 절대로 허공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한반도 역사 속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일어났음을 분명히 증언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실 때에는 개인으로 구원하시지 않고 반드시 공동체 구성원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혼자서 구원받지 않고 가족 구성원으로 구원받고, 이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 그리고 동성교회 구성원으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구성원으로 구원받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구원은 곧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그저 죽으면 천국가기 위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 대한민국 구성원으로서 그 속에서 공동체의 행복을 위한 사명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부름받았는가, 그것이 가족이든 교회이든, 사회이든, 국가이든 내가 어떤 공동체 구성원으로 부름받았다는, 공동체에 대한 소명의식이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부모님의 자식이요 한 가정의 남편이요 아내요, 자녀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를 거부해버린다면, 그 역시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이 사실을 부인해버린다면, 그 역시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신자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질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인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는 8.15 광복절을 어떻게 기념하고 또 앞으로의 한국역사를 위해서 무슨 다짐과 헌신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저는 마음 한편으로는 독립에 대해서 감사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참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36년 동안이나 철저하게 유린당하다가 1945년 8월 15일에 하나님 은혜로 해방이 됐지만, 그리고 그 후로 6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 우리는 67년 전의 기쁨과 감격에 즐거워하기에는, 아직도 우리나라는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복 6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캄캄한 동굴 속을, 캄캄한 안개 속을 걸어가는 것 같은 답답한 생각이 듭니다.
19세기 말엽에 조선의 국운이 점점 쇠락해가는 과정에서, 이 한반도 땅은 일본과 서구열강들의 먹잇감으로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당시 한국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소련에게 속지 말고 미국 사람 믿지 마라 중국은 되나오고 일본은 일어서니 조선사람 조심하소.”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 중에도 아마 아주 옛날 어렸을 적에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분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걱정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답답한 일은 광복 이후 무려 67년이 지났지만, 또 말로는 대한민국이 세계 10위의 국력을 자랑한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동북아 지역의 외교무대에서 자주권을 마음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우리나라가 런던올림픽 축구경기에서 일본과 동메달쟁탈전에서 승리하면서 우리 모두가 한껏 승리감에 고무되어 있습니다만, 아직도 일본은 독도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고, 우리나라 대통령이 독도에 방문한 것에 대해서 일본 사람들의 반발을 신경써야 하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해에서 우리나라가 대륙붕을 개발하는 문제나 이어도 기지 관리 문제에서 중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답답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주변 강대국의 야욕이 점점 강해지는데도 남한과 북한의 갈등은 전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답답한 우리나라의 상황은 오늘 본문에 모세가 바라본 이스라엘의 상황과 아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의 과거를 돌이켜볼 때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패역한 백성들입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고, 우상을 섬기고 말씀에 불순종하는, 패역한 백성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과거에 대한 모세의 평가입니다. 게다가 아직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축복은 먼 미래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패역한 과거를 돌이켜볼 때 과연 앞으로 미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가나안 땅 진입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의 과거에 실망하고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던 그 모습이, 바로 우리가 이중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이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신명기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광복 65주년을 맞이하는 이 대한민국 땅에서 어떻게 이중의 시민권에 합당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지,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2.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라

저와 여러분이 대한민국 땅에서 이중의 시민권에 합당한 책임과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기 위해서, 첫째로 명심할 점은 우리는 우리의 과거 역사를 잊어버리고 망각해서는 안 되고, 과거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얼마나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해야 할 과거의 역사 그 첫번째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구원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빠져버린 예수는 하나의 주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하나의 주문이나 하나의 천국이라는 마법의 문을 여는 어떤 열쇠 정도로 생각하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주문을 믿고 자기 암시를 믿는 것입니다. 제대로 예수를 믿으려면 그 예수가 어떤 구원의 역사 속에서 이렇게 툭 튀어나왔는지, 전체 구원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역사는 복잡한 것이 아니라 창조 타락, 구속 심판의 네 단계를 따라서 흘러가는 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구약시대 출애굽 사건과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적같이 돌보시고 먹이시고 입히셨던 역사, 그리고 그 역사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기를 거쳐서, 신약시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역사,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제 그 부활의 능력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기 위하여 하늘로 승천하시고, 그 다음에 이 땅에 성령을 보내주시고 부활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가 태어나게 하시고, 이제 후로 이 세상의 역사를 다시 심판하고 자기 백성들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재림하실 이 역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늘 바라보고 소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역사가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광야길 인생, 광야길 역사를 하나님이 은혜로 지켜 보호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광야가 끝나고 순탄대로가 열리면 우리 인간은 곧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리기 십상이고 그러면 이어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봐도 그렇고, 인류의 역사를 봐도 그렇고 기업체를 봐도 그렇고 한 사람 개인의 인생을 돌이켜봐도 항상 똑같습니다. 모든 인류 문명이 한결같이 이렇게 성공과 쇠락의 길을 걸어가는데 결국 끝까지 성공하는 나라, 끝까지 성공하는 기업과 가문에는 어떤 비결이 숨어 있는가? 결국 과거 역사에 대한 기억입니다. 막연히 과거 역사 공부를 잘 하면 성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놓으셨는지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이상과 가치관을 가장 분명하고도 체계적으로 붙잡는 나라, 붙잡는 기업, 붙잡는 가문, 붙잡는 신자가 결국은 이 세상에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도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 이하에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거 거주하게 되면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이렇게 경고하시면서 14절 하반절부터 다시금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도해 주신 과거의 역사를 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과거의 은혜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미래 축복의 지름길인줄 믿습니다.
이 점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있다면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의 부와 권력은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입니다. 현재 지구상에 70억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만 전 세계의 부와 권력은 누가 쥐고 있는가? 일단 미국이 현재 전 세계 군사력으로나 경제력 분야에서 맏형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 미국 정치계와 경제계의 정점에는 유대인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JP 모건이나 로스차일드 가문, 모건 스텐리, 골드만삭스, 메릴린치와 같은 대부분의 금융회사 소유주가 다 유대계 자본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하지만 미국 법조계에서 출세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법조계나 변호사는 전부다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한국에서 날고 긴다고 하지만 미국에 가면 변호사 자격증을 따더라도 유대인들의 카르텔에 막혀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기껏할 수 있는 일이 이민수속을 위한 서류작업이나 할 정도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유대인들은 전체 인구 비율이 2%도 채 되지 않지만 이들이 미국 전체 경제에서 약 20%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미국 경제의 배후에서 세계 경제에 미치는 유대인들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흔히 출세하려면 반드시 유대인을 친구로 사궈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유대인들의 시작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3천 8백여년전 약 70명 정도의 야곱의 가족들이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으로 내려가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70명 정도라면 옛날 겨우 생계나 꾸려가던 작은 규모의 가문입니다. 우리나라에 김씨 가문, 이씨 가문, 박씨 가문, 고려 시대 왕씨 가문에 비교한다면 정말 보잘 것 없고 초라한 가문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3천 8백년이 흐른 다음에는 전 세계를 완전히 장악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뭔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역사의식입니다.

역사의식은 내가 오늘 살고 있는 이 삶의 터전에 대한 주인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삶의 터전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삶의 터전이 뭐냐 하면 내가 주인의식을 느끼면서 생활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을 말합니다. 내가 주인의식을 느끼면서 생활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 예를 들어 내 집이나 내 회사, 내 땅, 내 교회 이런 것들이 내가 주인의식을 느끼면서 생활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입니다. 그러한 공간 그러한 삶의 터전이 있어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가 이웃의 도둑으로부터 그러한 삶의 터전을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침략을 당하거나, 집에 도둑이 들면 그러한 삶의 터전이 망가집니다. 내 것이지만 내가 주인의식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장점은 무엇인가 하면 구약시대에 솔로몬 이후 나라가 남쪽과 북쪽으로 쪼개지고 결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망해버렸는데도, 삶의 터전이 모두 다 사라져버렸는데도 무엇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하면, 이 역사의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땅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빼앗기고 말았는데 다른 사람들 같으면 자포자기해버릴텐데 유대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하면 이 시간에 대한 주인의식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과거에 축복하신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다. 지금은 내가 바벨론에게 로마에게 이 땅 빼았겼지만 그러나 이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우리편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 편이기 때문에 설령 나는 내 땅 잃어버리더라도 우리 후손은 결코 그 땅을 잃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땅을 다시 우리 후손들에게 되찾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시대 70년 포로생활을 그 믿음 가지고 버텼고 또 신약시대 로마의 압제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고, 그 후로 2천년 세월 전 세계에서 떠돌다가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기적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다시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 경제와 언론, 금융, 대학 모든 분야의 상위권을 다 장악해버린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막연한 주문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 대한민국 땅을 우리에게 맡겨주셨다는 주인의식을 가져야 하고, 이 주인의식을 가질려면 우리 대한민국 과거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신 그 은혜의 역사를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이 땅을 축복하신 은혜의 역사를 기억해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하나님이 맡기신 내 땅이라는 주인의식이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3.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의 역사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늘 기억해야 할 과거의 역사, 그 첫번째 역사가 성경의 역사,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면 두번째로 또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바로 이 대한민국 흥망성쇠의 역사입니다. 우리나라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서로 부딪히는 반도국가입니다. 그래서 주변 강대국이 그 영향력을 자기 나라 바깥으로 행사하면, 예를 들어 서북쪽에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대륙세력이 해양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갈 때나, 반대로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해양세력이 대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갈 때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우리나라를 반드시 거쳐 갑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그 길목에 서 있기 때문에, 나라의 국력이 약하면 반드시 온 나라가 피로 물드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또 중국이나 오랑캐로부터의 침략, 일제 36년간의 침탈의 역사는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크나 큰 아픔으로 깊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감사할 점은 그렇게 우리 민족이 험난한 광야길을 걷고 있을 때, 주께서 은혜 가운데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시고 아주 멸망당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일본과 한국의 상호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도 정말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 해 전에 미국 타임지의 표지인물로 끔찍한 사진이 실렸습니다. 아프간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서 형벌로 코와 귀가 베임을 당한 아이샤라는 18세 여성의 끔찍한 모습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도 속담에 각박한 세상을 가리켜서 “눈 뜨고 코 베어가는 세상”이라는 말은 들어봤습니다만, 코가 베임을 당하는 것이 실상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코가 베임을 당한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별로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또 제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이 위험한 행동을 못하도록 말릴 때 하시는 말씀이 “이비야!” “이비온다!”고 고함치셨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 때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말이 일본이 정유재란때 우리나라에서 죽은 사람, 산 사람 막론하고 수 천 수 만의 코를 베어가면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일본군이 정유재란 때부터 한국사람들 코를 베어간 이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에서 수고한 군인들에게 포상할 때 전공에 따라 포상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 전공의 증거로 삼은 것이 처음에는 수급, 사람의 머리였다가 운반이나 부피에 문제가 생겨서 나중에는 귀를 증거물로 삼았는데, 한 사람당 귀는 둘이기 때문에 관리가 복잡해서 나중에는 사람 몸에 하나만 달린 코를 전공의 증거로 삼았다고 합니다. 정유재란 때 전쟁에 참가한 일본인 오카와치 히데모토(大河內秀元)가 쓴 ‘조센 모노가타리(朝鮮物語)’ “조선물어”라는 기록에 보면 “1598년 1월 조선 사람의 코 18만 5738개, 명나라 사람의 코 2만 9014개, 합계 21만 4752개의 코가 매장되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에서 전과를 증명해서 나중에 포상을 더 많이 받을려는 욕심에 심지어 방금 출산하여 집 대문에 금줄을 두른 집에까지 처들어가서 산모와 갓난 아이의 코를 베어 갔습니다. 그러게 베어낸 생사람의 코를 소금이나 석회에 절여서 일본으로 가져가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코를 몇개 수령했다는 “코 수령 증명서를 발급”하면서 전후에 포상하겠다는 각서를 써 주었고 그 증명서가 지금도 일본 도처의 박물관에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을 약탈하고 유린한 일본군이 예로부터 그 잔학한 수준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만, 참으로 희한한 점은 일본은 우리나라가 기독교 복음을 전해받기 훨씬 이전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고 그 역사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길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고니시 유키나가라는 장수가 바로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 장수 뿐만 아니라 그 휘하 25만 군사들 중에 최소 10%, 3만명 정도가 예수의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은 교인들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아우구스띠뇨랴는 세례명까지 받았고, 그 가슴에 하얀 십자가를 붙이고 배의 돗에도 하얀 십자가를 붙이고 조선을 침략에서는 매일 밤 진중에서 미사까지 올렸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에는 대략 60만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복음을 듣고 영세를 받고 개종을 했고 또 지금의 나가사키현에는 교회 뿐만 아니라 신학교까지 있었고 ‘거룩한 도시’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가 엄청나게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1600년대 중반이 못되서 일본 땅에서 기독교가 갑자기 사라져버립니다. 오늘날에도 일본에는 전체 인구 중에 기독교인들이 0.4%, 40만명,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신자가 전국에 걸쳐 20만명밖에 되지 않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일본 땅에서 복음의 촛대를 옮겨버리셨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렇게 갑자기 기독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리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일차적인 이유는 당시 실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부터 백성들이 기독교로 전향하면서 민심이반 현상을 차단하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 그 아들 히데요리가 쇼군이 되었을 때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를 막아서서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던 옛날 충신들 간에 1600년에 나라의 운명을 건 세키가라하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 세키가라하 전투가 일본기독교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새로운 실력자 이에야스와의 전투에서 당시 가장 예수를 잘 믿는 장군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누구 편인가 하면 히데요시 아들 히데요리 편입니다. 그런데 당시 대세는 누구편인가 하면 이에야스 편이고 결국 히데요리는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그 부하인 고니시 유키나가 예수를 잘 믿은 장군도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패한 장수는 할복자결을 해야 합니다. 할복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무사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고니시는 가톨릭 교인이라서 당시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할복자결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의 칼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실권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키나가가 이렇게 마지막 명예까지 거부할 정도로 그렇게 신앙심이 깊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뿌리 깊은 신앙심을 남겨놓으면 자신의 왕권에 부정적이라 여기고서는 더욱 카톨릭 교회를 뿌리뽑는 데 열을 올립니다. 그 후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내 기독교를 아주 박멸해버리는데 사용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일본에 가면 유황 온천이 많이 있습니다. 물이 펄펄 100도로 끓어오르고 주변에는 유황 수증기가 피어 올라서 낮에도 노란 수증기 때문에 주변 지역이 음산할 정도이고, 유황 냄새가 메캐하게 코를 자극합니다. 나가사키에 가면 이런 유황온천 중에 기독교인들이 순교당한 곳에 몇 군데 있습니다만 이런 곳에서 생체로 빠뜨려서 증살시키면서 점차 기독교인들이 완전히 뿌리뽑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기독교가 몰락하게 된 이유는, 당시 권력자들 간의 충돌로 예수를 믿은 고니시 유키나가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 것이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시 60만이나 되는 일본 기독교가 평화의 왕 예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칼의 하나님을 섬기면서 복음의 맛을 잃어버린 소금 신세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본 땅에서 복음의 촛대를 옮기셨다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 휘하 최소 2만명의 군사들이 믿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믿는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아니라, “창칼로 약자를 도살하는 것을 인정하는 칼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매일 수십 수백 명의 코를 베어서 주머니에 담아 와서 밤에 미사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그 일본 군사들이 바라보았던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인가? 혹시 당시 이들은 찬양을 부르고 미사를 올리면서, 평화의 왕 예수와 정반대 쪽에 있는 폭력의 신, 악마를,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니었는가?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폭력과 총칼을 인정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래서 악마가 하는 일을 오히려 부추키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 영광을 가리는 일본 교회가 부흥하도록 놔두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의 역사 속에서 한 때는 그토록 왕성했던 기독교가 평화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칼과 폭력의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렇게 역사 속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오늘날 일본 땅은 복음의 불모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정말 우리나라는 이러한 일본 기독교의 역사를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줄 믿습니다.

일본 기독교의 쇠락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복음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 정말 우리 후손이 신앙의 선배들에게 배울 중요한 교훈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신앙의 선배들에게는 신앙과 애국, 애국과 신앙이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병탄 이후 모든 국민들이 나라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서 가슴 아파 하면서 독립에 헌신합니다만, 당시에 기독교인들만큼 애국에 헌신적인 사람들도 드물었습니다. 3.1운동 당시 천도교가 2백만, 불교가 3백만인데 반하여 기독교는 약 삼십오만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인은 16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애국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상제 선생님 같은 분도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되고 고문을 당할 때 “네 배후에 누가 있느냐? 대라! 하니까 간단하게 '하나님이 시켰다" 하나님이 하라 해서 하는 일이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믿는 신앙심을 나라를 위한 애국운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만세 운동으로 체포된 사람의 수를 일본 정부 조사로 살펴보면, 천도교가 1,063명, 유교가 55명, 불교가 41명,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2,039명입니다.
일제가 한국교회를 잔혹하게 박해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만큼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제암리 교회를 비롯해서 수 많은 한국교회 예배당이 불타고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해서 많은 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희생된 사람의 60% 이상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물론 한국교회가 일제시대 신사참배에 동조한 뼈아픈 실수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결국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원인은 한국교회의 헌신과 또 나라의 독립을 위한 한국교회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신 결과입니다. 나라의 형편을 볼 때에는 망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 은혜로 또 한국교회의 적지 않은 헌신과 기도를 불쌍히 보신 하나님 은혜로 그 광야 가시밭길을 헤쳐 왔음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1948년 5월 31일에 이제 처음으로 제헌국회가 소집이 되어서 1차 회의를 시작하는데 당시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다음과 같은 개회사로 제헌국회를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사람의 힘만으로 된것이라고 우리는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동의하십니까? 그러자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국회의원들이 이승만 박사의 개회기도 제안에 동의합니다.
그러자 이승만 박사는 제안 하나를 합니다.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이윤영 의원이 앞에 나와서 이렇게 제헌국회 제 1차 개회기도를 드립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呈視)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 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하옵건데,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 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결론

대한민국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분명한 것은 이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이렇게 발전해 왔다는 것입니다. 동북아 지역에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이 나라가 패망하지 않고 오늘날과 같이 전 세계 10위의 국력을 자랑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발전한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험한 가시밭길 속에서도 강대국의 침략 속에서도 멸망하지 않고 이렇게 나라를 보존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오늘날과 같이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들의 삶의 형편과 수준이 개선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함께 신앙생활 하면서 걸어온 이 한국교회의 역사, 광복절의 역사, 이 동성교회의 역사, 여러분 개인의 축복의 역사, 광야 속에서도 옷이 닳아지지 않고 의복이 떨어지지 않고 음식 없어 굶지 않고 그 광야길을 무사히 안전하게 건너온 그 역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과제와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또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변 나라들에게 이 은혜를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날 애국은 정치적인 야망을 달성하는 의미가 깔려 있지만 예전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하자면 내 이웃 동포들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애국의 길을 선택했고, 그런 애국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의 선조들의 애국의 길을 본받아 정말 우리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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