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넘치게 하라(막6:30-40) 2012.8.1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08-19 |
조회: 1507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생명의 떡으로 오신 메시야임을 가르쳐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의 떡은 다시 배고픔이 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여전히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으로 이 땅에 오신 참 메시야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단순히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나를 따르고 있다고 책망하십니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육신의 배고픔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중심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흘러넘치는 은혜의 현장이요, 축복의 현장이 아닙니까? 주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배고픔과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삶의 목마름 속에 신음하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흘러넘치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로, 이 흘러넘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공감(empathy)을 통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매우 분주하셨습니다. 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병든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좇고,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주셔서 파송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사역을 한 후에 다시 모여서 예수님께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놀라운 일들을 자세하게 보고합니다. 매일 진행되는 사역 속에서 지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특별휴가를 허락하십니다. 따로 한적한 휴양지에 가서 잠깐 이라도 쉬라고 명하십니다.
오늘날로 하면 특별휴가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신이 나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이동을 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미리 달려가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모처럼 얻은 특별휴가를 망친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몰려드는 사람들이 야속해보입니다. 피곤해서 탈진상태인데 모른척하고 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쉼의 시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전에 휴가철 카피 가운데 “수고한 당신 떠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쉬지 않으면 기름을 치지 않고 기계를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적절한 쉼과 휴식은 보약과 같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부족해도 영육간의 충전을 위한 휴식은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죽어라고 일만 하다가 살면 하면 죽는 것을 봅니다.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의 일정을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신문이나 뉴스에 보면 미국 대통령은 수시로 별장에 가서 쉽니다. 때로는 별장에서 외국 원수들을 접대하기도 합니다. 쉼의 시간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대통령은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밤낮으로 일을 합니다. 무슨 일이 터지면 휴가도 가지 않고 일을 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은 우리 대통령 쉬지 않고 일하는 구나 안심합니다. 바쁜 것을 따지면 미국 대통령이 분주할까요? 한국 대통령이 분주할까요? 우리는 일을 하지 않고 쉬면 논다고 생각합니다. 본인도 미안한 맘을 가집니다. 보는 사람들도 게으르다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과 태도를 좀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쉼과 충전이 필요합니다. 일에 묻히면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만 더 커 보이고,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일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새로운 계획과 창의적인 생각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나 빌게이츠 같은 사람들은 몰입주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자유롭게 쉬면서 구상을 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할 수만 있으면 쉼을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정신없이 달려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자신의 신앙의 좌표를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쉼의 시간은 노는 시간이 아닙니다. 절대로 낭비하거나 소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충전을 통해 더 멀리 뛸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의 제자들은 휴가계획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몰려드는 무리들이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들은 지금 지쳐있습니다. 자기들이 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가득할 뿐입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려드는 무리들이 야속하게 보입니다. 한마디로 그들 안에는 불쌍한 영혼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기적은 기계적으로 일을 할 때 일어나지 않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할 때는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마귀는 더 큰 원망거리와 불평거리를 제공할 뿐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피곤하기로 말하면 예수님이 힘드셨을까요?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힘들까요? 예수님은 새벽미명부터 기도하시고, 하루 종일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무지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주님은 쉼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몰려드는 무리들을 기계적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버려두시고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다같이 34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여기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헬,스플랑크니조마이)는 말씀은, 더 정확한 우리말 어감으로 번역하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실때마다 "애간장이 녹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이 무리를 보실 때마다, 애간장이 녹으셨는가?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였고, 기진하여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그대로 방치하여 둔다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아사직전상황(餓死直前狀況)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예수님은 몰려든 군중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방황하는 자들임을 아셨습니다. 삶의 갈급함을 해결하지 못하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들의 아픔을 주님은 함께 느끼십니다. 바로 공감의 마음을 가지시고 그들을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바로 서로의 마음이 통할 때 일어납니다.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함께 느끼고, 함께 나눌 때 그 속에 진정한 역사가 일어납니다.박요한 선생님!
호주 시드니 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사역을 하시는 분인데 하노이에서도 8시간 차를 타고 가야하는 솔라라는 지역의 소수 민족인 타이담 족을 향한 사랑으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분. - 한국에서 입양아를 데리고 왔는데 그 아이가 생후 얼마 안되서 죽음.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내 눈높이에서 자기고집으로 상대를 부리려고 하는 교만함을 내려놓으십시오. 상대방의 눈높이로 낮아지고, 공감할 때 감동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항상 공감의 태도를 유지할 때 감동을 주는 사람, 하늘의 기적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될 줄 믿습니다. 둘째로, 흘러넘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을 통해 일어납니다.
많은 무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습니다. 그곳은 벳세다 광야로서 빈 들입니다. 어디 가서 음식을 먹을 수도 구할 수도 없는 환경입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서 각자 음식을 해결하도록 주님께 요구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7절에 “너희가 먹을 주어라.” 주님은 그들 스스로 먹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물론 제자들 역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은 그들의 태도를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긍휼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휴가를 망치게 만든 장본인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귀찮다는 듯 각자 사먹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한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를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책임하게 말하지 말고, 그들을 먹일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사람이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37절에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까”고 말합니다. 여기는 이 말을 한 사람의 이름이 안나오지만 요한복음에는 그 이름이 빌립으로 소개 되고 있습니다. 이 빌립은 12제자 가운데 아주 머리가 잘 돌아가는 계산에 달인입니다. 빌립은 합리적으로 계산 합니다. 그는 똑똑한 사람입니다. 계산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치의 품삯입니다. 적어도 이들을 먹이려면 2천만원 정도의 돈이 필요한데 그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죠. 불가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흘러넘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인간의 머리나 합리적인 계산으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똑똑함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할 때가 있습니다. 내 머리로 계산기를 두드려서 답이 나와야 움직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상식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계산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우찌무라 간죠는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합니다. 너무 자신의 머리를 믿지 마십시오. 자기 경험이나 이성적인 판단만을 고집하지 마십시오. 나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하나님의 능력을 맞추려는 어리석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주님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를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가능성의 사람을 찾습니다. 빈들에서 먹지 못하고 주리고 있는 무리들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는 것이죠. 자꾸 돈으로 계산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럴 때 요한복음 6장에 안드레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옵니다. 여기 38절에도 나오죠? “ ” 그의 손에는 도시락이 들려 있고 그 안에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고작입니다. 그 소년의 도시락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당시 보리떡은 가장 가난한 자들이 먹는 빵입니다. <웁싸리온> 이란 물고기는 당시 어부들이 버린 물고기들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이 고기를 주워 다가 소금에 절여서 먹는 고기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가장 보잘 것 없는 음식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보잘 것 없는 음식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시고 축복의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질서정연하게 앉힌 후에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게 하십니다. 그랬더니 오 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음식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바로 한 아이의 자기 것을 주님께 드리는 나눔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도 하늘의 기적은 자기 것을 나눌 때 일어납니다. 내 손을 움켜쥐고 있으면 지키기에도 힘이 듭니다. 우리 주님은 나눌수록 더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눅6:38절에 말씀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 주?纛?주는 자에게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주님 앞에서 계산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 전 한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분이 고아원에서 섬기는 분인데 자기가 있는 고아원에 아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꾸 쌓아 둔 이불 사이에 먹을 것을 숨겨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사실을 잊어버려서 음식이 썩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버림받고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하면 늘 불안하기 때문에 자기 것을 남과 나누기 힘들어하고 남는 것조차 감추어 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아이들은 세상에 자기와 자기 몫을 지켜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숲속의 옹달샘 같습니다. 길가는 나그네가 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깊은 샘물이 솟아납니다. 그러나 퍼내지 않는 우물물은 금방 썩어 버립니다. 우물을 퍼낼 때 새로운 생수를 계속 공급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을 퍼 올려서 자꾸 나눠주어야 합니다. 자신만의 욕심을 위해 채워 놓으면 금방 부패합니다. 악취가 납니다. 자신도 먹지 못하고 남도 먹지 못합니다. 잠언 11:24-25절을 보십시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안 먹고 안 쓴다고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도하게 아껴도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부자가 되는 비결은 나누는 것입니다. 나누기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집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더욱 윤택해 집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참 역설적인 것입니다. 남에게 많이 나눠줄수록 자신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나누면 줄지 않고 더 많아집니다. 바닥이 나지 않고 더 채워집니다. 그것이 나눔의 역설이며 나눔의 신비입니다. 나눔 속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것,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그것을 나눌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셋째로, 흘러넘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순종을 통해 일어납니다.
이번 베트남 선교 때 우리 청년들 사역을 도와주신 분들 가운데 안장로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시드니 중앙 은행 아이티 책임자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순종의 사람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어린 아이의 순종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뤘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비록 작을지라도 주님의 손에 드려지기만 하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종종 체면 때문에 주님의 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실까? 내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람을 의식할 때가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꺼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분명 다릅니다. 사람은 외모를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어린 아이가 드린 작은 도시락 하나, 그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어린 아이의 순종과 헌신이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를 거두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주님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주님을 위해 드려질 때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주님은 없는 것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손에 들려있는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사르밧 과부가 흉년이 들어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웅큼과 기름을 가지고 빈대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마침 엘리야 선지자가 그 집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자기에게 대접하라고 명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상황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아마 격렬하게 항의를 하거나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아무 말 없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 순종이 하늘의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날 이후로 그 집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가장 중요한 그것을 내게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하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셔서 흘러넘치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기를 원하십니다. 그 비결은 바로 주님의 마음으로 공감의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기심의 노예로 살지 않고, 필요한 자에게 내게 주신 하늘의 축복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상식과 생각을 뛰어넘는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은 우리나라 경제가 무척 어려운 때입니다. 다 부족하고 궁핍한 때입니다. 이럴 때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인색해지며 남을 염려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너도 나도 내 것 챙기기에 급급해지기 쉬운 때입니다. 그러나 이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확실하게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궁핍함을 차고 넘침으로 바꾸시는 주님, 우리 삶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의 놀라운 해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발견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궁핍해지면 나누기 싫어집니다. 나누려 해도 나눌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진 것이 적다 하드라도 그것을 주님께로 가져가고 주님께서 나누시게 하면 다 풍족하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함께하고 하나님의 복 주시는 은혜가 함께하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 우리가 가진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했던 일이 주님의 의해 차고 넘치게 이루어졌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님께 드려 주님께서 나누시게 하는" 믿음과 순종의 헌신만 있으면 오늘 우리에게도 흘러넘치게 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함께 실천하는 공동체는 복된 공공체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신앙생활은 마른 행주를 쥐어짜는 듯한 억지가 아닙니다. 흘러넘쳐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단지 생존을 위한 버티기가 아닙니다. 이제 교회의 모든 여름 사역이 마쳐졌습니다. 이제 받은 것을 가두지 마시고 흘러넘치는 일을 하십시다. 반드시 끊임없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생수를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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