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중에 부르는 노래(행16:19-25) 2012.8.26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08-26 |
조회: 1681
여기 계신 분들 사춘기를 겪으며 살지 않았습니까? 청소년 시절에 얼굴에 왜 그렇게 여드름이 많이 나는지, 요즘 아이들 보면 정말 피부가 깨끗합니다. 저희들 청소년 시기에는 얼굴에 여드름이라는 게 참 많이 났습니다. 저도 얼굴에 여드름이 났는데 한 선배가 얼굴에 여드름이 나오면 애인이 나타날 징조랍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여드름을 만지기 시작했지요. 이왕 나타나려면 킹카가 나타나라. 그래서 여드름이 커지면 킹카가 나타나는 줄 알고 만지작거렸습니다. 때 묻은 손으로 여드름을 만지작거렸으니 어떻게 생겼겠습니까? 아예 여드름이 사탕 만하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얼마나 보기도 흉하고 아팠던지 킹카고 뭐고 백설공주도 싫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른들이 "긁어서 부스럼 만들었구나"하고 나무라십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이 여드름은 만지작거리면 점점 더 커지고 흉해 진다는 겁니다. 그저 아침 저녁으로 깨끗하게 씻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끌어안고 만지작거리면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커져갈 뿐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찬송으로 씻어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한 밤중에 부르는 노래’ 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고난 가운데 문제를 안고 그 문제를 키워가는 사람이 있고, 고난 중에 노래하고 찬송하며 문제를 녹여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향한 한 별명이 있다고 하면 환란 중에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장례식장에 가서 노래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선교 동역자인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엄청난 죄악을 지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1차 선교여행 때 복음을 전한 소아시아 지역을 다시 둘러보기 위해 2차 선교여행에 나섰다가,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지방의 첫 도시인 빌립보 지역에서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 하나가 여러 날을 쫓아다니면서 그들을 귀찮게 했습니다. 참다못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16:18)고 명하자, 귀신이 즉시로 떠나면서 여종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여종의 건강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비즈니스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자기의 여종이 귀신이 들려 점을 잘 쳤기 때문에 돈벌이가 잘 되었는데, 그 여종이 깨끗하게 낫게 되어 더 이상 점집 비즈니스를 할 수 없게 되자 바울 일행을 로마 관가에 고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법을 어기고 감옥에 들어갔다면 억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감옥에 들어갔다면 정말 억울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종의 주인이 사도바울 일행을 무슨 죄목을 가지고 로마 관가에 고소했습니까? 20절과 21절에 보면,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역을 다니면서 성을 요란케 했습니까? 잘못된 풍속을 전했습니까? 아닙니다. 성을 요란케 하기는커녕 오히려 귀신들린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새 생명을 갖도록 해주었습니다. 로마 관가에서는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일행은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누가 그들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오게 했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여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너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일행이 마케도니아로 건너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행을 목적으로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까? 아니면 친척 방문을 목적으로 건너왔습니까? 그들은 복음 증거를 목적으로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열심히 복음을 증거 했는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칭찬이 아니라 고발이었습니다. 푸짐한 상품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감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분하고 억울한데, 재판을 받기도 전에 옷을 찢기고 매를 맞았습니다. 죄를 지으면 재판을 받아야 하고 재판 결과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일행은 달랐습니다.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많은 매를 맞아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당시에는 40대 이상의 매를 맞으면 죽는다고 생각해서, 40대를 치지 못하도록 법률로 정했기 때문에, 추측컨대 사도바울은 39대의 매를 맞았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 보면, 바울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했는데, 빌립보 감옥에서도 39대를 맞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옷이 찢겨지고 매를 맞은 후,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갇힌 감옥은 햇빛을 쬐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일반죄수들을 가두는 보통 감옥이 아니라, 햇빛도 들어오지 않고 신선한 공기도 들이마실 수 없는 깊은 감옥이었습니다. 또한 그 감옥에서조차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양발에는 꼼짝하지 못하도록 착고가 채워져 벽에 고정시켜 놓았기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발목을 파고드는 착고 때문에 고통이 심했습니다.
사도바울과 실라는 복음 전파는 커녕, 감옥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서도 사도 바울이 ‘로마 관리들에게 불평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하나님을 원망했다‘라는 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분히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보통 사람 같으면 빌립보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자기를 고소한 사람이나 자기를 때린 사람을 원망할 것입니다. 분을 품고 억울함을 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달랐습니다. 자기를 고소한 사람이나 자기를 때린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착고를 채운 사람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아 몸은 쑤시고 발에는 착고가 채워져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23절부터 25절을 보겠습니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여기 보면 ‘밤중쯤’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과 실라가 맞이한 이 ‘밤’은 호텔 방에서 누워있는 편안한 밤이 아니라, 괴로운 밤이었습니다. 맞은 상처로 인해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밤이었습니다. 깊은 감옥에서 아무런 소망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했습니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을 했습니다. 신음소리가 먼저 흘려 나올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신음대신에 찬송의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온 것을 후회할 수도 있었고, 전도여행을 떠난 것을 후회할 수도 있었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것을 후회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소리는 후회의 소리가 아닌 찬송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찬양한 줄 아십니까? 25절을 보면 ‘하나님을 찬미하매’라고 단순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은 조용조용하게 찬양을 한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찬양을 하였습니다. 지하 감옥 전체가 쩌렁 쩌렁하게 울리는 큰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결국 감옥 안에 있는 많은 다른 죄수들이 그들의 찬양소리를 들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잠을 자다가, 아니면 자신을 감옥에 들어오게 한 사람을 원망하다가, 아니면 자신들의 인생을 탓하며 한숨을 내쉬다가, 등의 어떤 상태에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감옥 안에 있는 많은 다른 죄수들도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의 찬송을 들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비록 매를 맞아 피곤하고 지쳐있었지만, 힘을 다하여 찬양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과 실라처럼 지금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 소망도 가지지 못한 채 절망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고통의 밤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에 묻지마 살인, 묻지마 성폭행이 자고나면 신문에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범행의 동기도 없고, 불특정 다수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는 이 ‘묻지마 범행’이 사회를 패닉상패까지 몰아가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 학교 수업을 마치고 자기 집에 가기 위해 올라탄 엘리베이터에서 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50대 중년의 남성이 마구 휘두른 망치에 얻어맞았습니다. 집에 있던 아버지가 아들의 비명을 듣고 뛰쳐나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기 아들이 머리에서 피를 쏟아내며 얼이 나간 채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순간 자기 아들을 때린 50대 중년의 남성은 곧바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겁니다. 소위 묻지마 폭행의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한 가정을 순식간에 먹구름 속으로 빠뜨렸고, 아이는 1년이 지난 지금 뇌 절반 이상이 시커멓게 돼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 하고, 아이의 엄마는 우울증으로, 아버지는 성격마져 거칠어진 채 가정이 한 순간 지옥으로 변한 겁니다.
그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엔 우리 애가 살아난 것만도 기적으로 생각해 너무 감사했어요. 그런데 그놈이 우리 애에게 남긴 상처, 우리 가족에게 남긴 상처가 뻔히 보이는데. 살아남은 것만으로 계속 감사하기란 너무 힘들었습니다. 안사람(아내)은 다음 주에 정신과 진료를 받기로 했는데, 이미 우울증에 걸렸는지도 모르겠어요. 애는 제 엄마 앞에서 욕을 해대고 엄마는 그 앞에서 펑펑 울고, 나는 그걸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우리가 제일 힘든 게 뭔지 아세요? 우리 애는 옛날 우리 애가 아니에요. 그놈이 애를 빼앗아 간 거예요."
"처음엔 우리 애가 살아난 것만도 기적으로 생각해 너무 감사했는데... 그놈이 애를 빼앗아 간 거예요." - 생각할수록 자신의 가정에 고통을 준 그 사람에 대한 분노가 뼈 속까지 파고 든 것입니다. 정말 이 인생의 밤을, 그 어두운 환경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여기 모인 우리 인생도 환경과 처지는 달라도 인생의 밤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갑자기 건강이 나빠졌습니까? 아니면 직장을 잃었습니까? 사업이 잘 안됩니까? 또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밤이 찾아온 것입니다. 30대 후반에 속한 대부분의 남자들은 직장에 대한 환멸과 불만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합니다. 밤이 오고 있는 증거입니다. 30대 초기에 큰 꿈을 가지고 출발했던 직장생활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는데 어느덧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위기를 느끼는 가운데 “이것이 내가 쏟은 삶의 전부인가” 하는 환멸을 느끼기 시작할 때 밤이 온 것입니다. 아마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싫어하는 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싫어하는 고난과 환란의 밤을 주십니까? 인간은 밤을 통과하지 않으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고약한 기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사의 자국을 남긴 큰 그릇으로 쓰여진 사람들마다 다 밤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대부분 밤을 통과하신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의 밤을 맞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신앙의 공식처럼 기억을 해야합니다. 하나는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생을 끝마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긍휼이 많으신 주님은 나와 나의 필요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에, 정확한 때에 도와주시기 위해 늘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만날 때 우리의 피난처 되신 주의 품에 바짝 다가가 안겨야합니다. 주님께 간구하면, 때를 따라서 채우시며 위로해 주시는 손길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당신을 주목하시고, 당신의 아픔을 소중히 여기시며 나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시고, 정확한 때에 필요한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굉장히 큰 그림을 말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금방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정신을 차릴 수 없고 해답을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인생을 큰 그림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이 큰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 당대에서 보지 못하고 다음 세대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아름답고 선한 뜻과 큰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큰 기대를 걸고 인생을 투자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눈에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데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밤이 다가와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래합니다. 밤에 부르는 노래는 특이한데가 있습니다. 처절한 심령의 메아리가 동반됩니다. 밤중에 부르는 노래는 가볍게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파고 들어옵니다. 우리가 형통할 때 부르는 찬송은 은혜스럽지만 그런 찬송은 입에서만 나오는 찬송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밤에 부르는 찬송, 고난을 당할 때, 사랑하는 자를 잃을 때, 실패를 당했을 때, 건강이 좋지 않을 때, 앞날이 막막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부르는 찬송은 영혼에서 나오는 찬송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 밤의 노래를 좋아하십니다. 사43: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우리 중에 바로 이 바울과 실라같이 탄식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 가운데 거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가장 곤고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은혜를 묵상하며 기도하고 찬양할 때 우리를 두려움에서 승리하게 하실 뿐 아니라 축복의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이 밤중의 노래는 자신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에게도 구체적인 속박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25절에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이들이 ?계속해서? 찬양을 했다고 표현합니다. 또 ?듣더라.? 라는 단어를 보면 자세히 진지하고 주의하여 들을 뿐 아니라 기쁘고 기대하며 듣는다는 의미의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의 소리가 울립니다. 죄수들은 압니다. 바울과 실라가 얼마나 아프며 그가 얼마나 좌절하고 있으며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신음소리대신 자신들의 영혼에 위로를 주는 음악이 들려집니다. 아니 위로의 노래가 아니라 희망과 구원이 선포되는 찬양인 것입니다.
이때 두 가지 측면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6절입니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아-멘 여기 절망의 현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내적인 기적입니다. 죄수들과 심지어는 간수들 마음에 묶였던 쇠사슬이 벗겨집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증오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에 따스함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에 자유함이 전달되고 증거 됩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지진이 나며 모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에게 묶여 있던 고통의 착고들이 다 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유롭게 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놀라운 자유의 감격과 기쁨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소리를 들으실 때에 외면치 않으시고, 응답하시며 모든 속박에서 풀어주시고 승리케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감옥에서의 찬양은 자신을 무시하고 공권력을 행사하던 간수의 가정까지도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밤은 반드시 밝아 아침이 됩니다. 오늘의 모든 고통과 역경을 하나님께서 다 제거해 주시고 찬란한 아침 햇살을 안고 기뻐할 날을 반드시 주십니다. 요즘 보세요. 경기는 침체되고 물가는 오르죠? 대선을 앞두고 있는 우리의 주변은 정말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힘든 상황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총체적인 난국이라 해야 할 정도로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에 깊은 수렁이 패이기 시작했습니다.
겨우 한 수렁을 벗어나면 또 다른 거대한 늪이 우리를 가로막지 않습니까? 지금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은 찹찹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떻게 저토록 야비할까, 그러나 현실입니다. 또 삼성의 애플과의 특허 침해 소송에서 패소함으로 오는 경제 전쟁에서의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수렁을 언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만큼 첩첩산중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절망은 없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절망 안에 가두어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절절한 외침을 기억해 보십시오. 고후 4:8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는 능력의 보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첩첩산중에서 빠져나갈 길을 모르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배로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더 확실한 희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고백의 찬양이 내 삶 전체가 되어야합니다.
인생의 밤이 왔을 때 노래하십시오.
두려움에 떨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을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인생의 안테나를 하나님을 향해 세우십시오. 밤은 잠깐 지나가고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달라지며, 모든 사람들이 우리 앞에 예수 믿고 싶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지진이 일어날 것입니다./옥문이 열릴 것입니다./쇠사슬이 풀릴 것입니다./모든 불가능한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찬양과 기도로 살아가는 우리 앞에, 날마다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우리 앞에,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그 은혜속에 살아감을 감사하십시오. 우리 모두 이와 같이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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