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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빌 1:1-8) 빌강해① 2012.9.2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09-03 | 조회: 1737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지만,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 가운데,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만나서 함께했던 시간들이 어떠했느냐에 따라서 두고두고 그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진즉 헤어지지 못한 것이 원통할 만큼 쓰라리고 아픈 기억으로만 남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여기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무엇이 이토록 바울의 삶을 온통 감격의 도가니로 빠뜨려 놓았습니까?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이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씌여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흉악범으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과 편지를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사도 자신이 비록 로마의 감옥 안에서 이 편지를 쓰지만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정말 주안에서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전체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기쁨이란 표현이 무려 18번 나옵니다. 하나님의 기쁨, 바울과 디모데의 기쁨 그리고 빌립보 교회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의 편지를 깊이 묵상하다보면 그 기쁨이 2천년 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것만 아니라 곧 우리의 기쁨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빌립보서를 묵상하면서 이번 가을을 기쁨으로 지낸다면 우리 개인 신앙에 유익이 되고 우리 교회가 2012년도 하반기에 더욱 건강하게 그리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견고하게 세워지리라 확신합니다.



빌립보교회는 주후 52년경,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때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어느 날 밤, 사도 바울은 환상 중에 한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도우라(행16:9)"고 하는 말을 듣고는 소아시아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배를 타고 유럽으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되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묵상하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그 때 바울을 태우고 갔던 그 배는 유럽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들이 가졌던, 계획과 생각을 내려놓고 마게도니아로 갔습니다. 여기서 바울 일행은 자주장사인 그 유명한 루디아를 만납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자기 집을 열어 교회로 제공을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유럽 최초의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쁨도 잠깐입니다. 여기서 엄청난 일을 당합니다.



이 낯선 도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들린 여자아이 하나를 고쳐 주게 되는데 그 것 때문에 얼마나 엄청난 아픔을 당합니까? 귀신들린 여종 하나가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행 16:16-17)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쨌든 며칠을 시달리던 바울이 견디다 못해 그 귀신을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은 점을 치는 귀신이었어요. 그러니까 주인의 입장에서는 장사가 망한 것입니다. 화가 난 주인이 사람들을 선동해가지고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히고 죽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누가 그들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오게 했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여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너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일행이 마케도니아로 건너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행을 목적으로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까? 아니면 친척 방문을 목적으로 건너왔습니까? 그들은 복음 증거를 목적으로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열심히 복음을 증거 했는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칭찬??아니라 고발이었습니다. 푸짐한 상품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감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분하고 억울한데, 재판을 받기도 전에 옷을 찢기고 매를 맞았습니다. 죄를 지으면 재판을 받아야 하고 재판 결과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일행은 달랐습니다.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많은 매를 맞아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이 되었고, 빌립보 교회의 또 다른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찬송할 때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 문들이 열리고 죄수들을 묶어놓은 것이 다 풀어졌습니다.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을 하려고 했는데, 바울이 그를 만류했습니다. 그 엄청난 현장을 목격한 간수는 바울을 붙잡고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바울이 대답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날 밤 간수의 온 집안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은 것은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 감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울을 감옥 안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 가족이 빌립보 교회의 "seed member"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인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빌립보 교회의 배경을 아는 사람들은 쉽게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썼구나.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이 나왔겠구나!" 그러나 여러분, 바울이 정말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서 기뻐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이 감사했던 이유는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비록 모진 고난 속에 이루어진 교회였지만, 그때 은혜 받은 교인들은 결코 바울 곁을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여기 교제라는 말은 단지 친교가 아닌 그냥 복음 사역에 협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울과 동역자 관계를 가지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한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첫날부터 바울이 가장 최악의 상태인 로마의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얼마나 바울과 파트너쉽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서 일했는지 아십니까? 7절에 나와 있습니다. "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이라는 복음이 공격을 받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라는 것, 이 진리 외에는 우리가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복음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마치 법정에서 변호사를 사서 자기를 변호하고 자기가 옳다는 것을 알리는 것처럼, 복음을 변호하고 확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변호사를 고용하면 돈이 듭니다.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면 그만큼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유명한 O. J. Simpson은 전(前) 처와 그녀의 애인을 살해한 협의를 받았지만 고액의 변호사를 고용한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변호하고 확정하는 일에도 돈이 듭니다. 이것이 선교 아닙니까? 선교에 돈이 듭니다. 빌립보 교회는 선교비를 열심히 내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메게도니아를 떠나 아가야(Achaia)로 갈 때 바울에게 선교비를 보내 준 교회는 빌립보 교회 밖에 없었습니다(빌립보서 4:15). 그리고 그 후에서도 빌립보 교회는 계속해서 바울에게 선교비를 보냈습니다(빌립보서 4:16). 그뿐만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도와준 것도 빌립보 교회였습니다(로마서 15:26).



바울이 로마에서 재판을 받을 때, 바울을 끝까지 도왔던 교회도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돕기 위해서 아예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을 파견해서 바울을 도왔습니다(빌2:25, 4:18). 바울을 위해서 이렇게 헌신적으로 애쓴 교회가 없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도디도에게 많은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그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빌2:25)"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6절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말씀을 합니다. 여기 "착한 일"는 복음의 파트너쉽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 함께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인물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권적인 사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동업자라고 말하고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을 동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숭고한 목적을 위해 함께 희생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동역자란 영어에 helper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로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 공동체의 삶



위대한 일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선택하실 때도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전도하러 보내실 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함께 일할 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지만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홀로 생각하고, 홀로 걸었습니다.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지 못했고 마음을 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보조를 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동역자로서 공동체의 삶!!

지난 번 에베레스트산을 원정하다 죽은 동료의 시신을 찾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산에 올랐던 산악인 엄홍길씨를 알 것입니다. 그는 고생 끝에 1년 동안 설온에 묻혀있는 시신을 발견했지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유품만 챙기고 하산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치루었던 희생 역시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원정대의 후원자였던 한 회사 회장이 현장에서 고산병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리만큼 어리석어 보이지 않습니까? 단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그렇게 포기한다는게 우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해서라도 가야했던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공동체 의식'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는 몸입니다. 그에게 아무리 쏟아 부어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성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동역자로서 바울을 멀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다른 교회 교인들은 "또 갇히셨구나"하며 기도만 하고 말았지만, 빌립보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걱정을 하고 위로금을 모아서 그 교회의 젊은 목사님인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드립니다. 사식도 넣어 드리면서 한겨울 동안 바울 선생을 잘 돌보아 드리고 봄에 돌아오도록 합니다. 바울은 이런 사랑을 입으면서 얼마나 눈물이 났겠습니까?



그래서 4:18절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라 했고, 15절에는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는 많았지만 정작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할 만한 무엇을 해준 교회는 없었던 것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외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반드시 응답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8절에 자신이 받은 이 은혜를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 바울이 감옥 속에서의 그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감사와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또 한가지의 비밀은 바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의 감정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쁘게 삽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예수님의 죽음은 '심장파열'로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보다 더 빨리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로마의 군인들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때,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심장을 쥐어짜며 기도하셨습니다. "주여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이 세상에서 이렇게 간절한 사랑을 본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심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빌립보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그를 감옥의 고통을 이기고 기뻐할 수 있었던 비밀입니다.사랑이 동기가 되면 어떤 난관도 극복하게 됩니다. '에스더'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민족, 유대인들이 하만의 계략에 의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모르드개'로부터 듣고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결국 에스더의 생명을 건 결단으로 인하여 하만의 계락은 드러나 처형을 당하고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에스더의 사랑이 민족을 구원한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위해 14년간을 무보수로 일했지만 하루도 지루하거나 힘겹게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힘이 야곱을 지탱한 것입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정말 근사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기 것이라는 것을 움켜잡고, 자기 것이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채 누리려는 인생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세상적인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다 버리고 오직 주만을 위해 헌신합니다. 지금은 저 초라한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쁨은 상황을 뛰어넘는, 상황에 갇히지 않는 초월적인 기쁨입니다. 어둡고 답답하고 눅눅한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쇠고랑에 메여있고, 보초병이 지키는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실상은 아무 기쁨도 누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언제나 주 안에 있는 기쁨이 그에게 넘쳤습니다. 성도의 기쁨은 좋을 때만 떠오르고 좋지 않을 때는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의 기쁨은 온도계처럼 기온에 따라 왔다 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불멸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왜요? 복음의 교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어둠 가운데 살던 우리를 부르셔서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아주신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로서 아직도 내 안에 계신 예수님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초보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친구들 앞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십니까?



최근에 가슴 뜨끔한 책을 읽었습니다. 미국 앨라바마 주 버밍엄에 위치한 부룩힐즈 교회의 데이비드 플랫 목사가 지은 <래디컬(RADICAL)>이란 책입니다. 이 책은 얼마 전에 추미애 국회이원이 우리 교회 와서 자신도 지금 고민하는데 불교인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에 갔을 때 어느 교회로 예배를 드러러 갔는데 그날 설교에서 래디컬이라는 메시지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분에게 그 책을 선물로 드리고 나도 한권사서 일었습니다.



<래디컬(RADICAL)>은 영어로 ‘급진적인’ 이란 뜻입니다. 그는 이 시대의 교회를 깊은 영적 통찰력으로 바라보면서 이름 그대로 ‘급진적’ 주장을 합니다. 작금의 교회는 포도주에 물을 탄 것처럼 변질된 신학과 세상의 번영을 구하는 가짜 복음에 빠져있다고 진단합니다. 목사는 세상의 성공신화를 교회에 답습하고, 성도들은 자신들의 가려운 부분만을 긁어주고, 세상의 번영과 축복만을 구하는 기복주의에 빠져있다고 일갈합니다.교회의 본질은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요, 땅 끝까지 생명을 걸고 복음의 증인되는 일임을 강조합니다. 부룩힐즈 교회 교인들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훈련시켜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새로운 가치관과 신앙관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강조합니다. - 요즘 우리의 시대를 보세요. 세상이 세속의 물결에 흙탕물이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묻지마 살인, 묻지마 폭행, 자고 일어나면 차마 눈을 뜨고 입에 담지 못할 사건들이 신문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 큽니다. 복음의 능력을 붙잡고 살아가야 할 우리가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이유도 있습니다. - 아이티 청년들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위해 주어진 시간과 재물과 능력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거나, 자기 이기심의 노예로 사는 자는 불행합니다. 후회하는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신의 은사와 축복을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면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그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시고, 가정을 주시고, 일터를 주시고, 동성교회를 허락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이 결코 나만의 유익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삶의 모습은 아닌지요? 주님은 이 시간 이제는 세상의 성공신화를 내려놓고 래디컬(급격한)한 변화를 이루라고 촉구합니다. 선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나의 삶을 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삶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야 감옥에서도 웃을 수가 있습니다. 질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없고, 없고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음 성도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span>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 주님 ,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앞으로 남은여생을 무엇을 위해 살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이기적인 목적에 이끌리는 인생이 아니라 비록 손에 든 것 없고, 비참한 감옥에 있어도 저 근사한 기쁨 부럽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정말 비극은 내게 이 기쁨이 없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기쁨대신에 근심으로 채워지면 그는 감옥이 아니라 최신식 아파트에 살아도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생명을 걸고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감옥이 뭐 그리 절망이겠습니까? 여러분, 사랑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찢어진 심장으로 사랑함으로 힘겹고 어려운 인생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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