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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우리의 기쁨을 빼앗는 것들(빌 1:12-21) 2012.9.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09-09 | 조회: 1571
얼마 전에 아무도 가지 않은 바다 한 가운데 한반도 크기의 7배에 달하는 엄청난 섬이 생겼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얼마나 흥분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인공위성에서 사진을 찍어 급히 확인해 본 결과 쓰레기더미였습니다. 전 세계에서 버려진 쓰레기들이 바다의 조류에 저항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다 한곳에 모여 섬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조류가 만나는 곳에 배가 들어가게 되면 그곳을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난파선의 무덤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법칙에도 해당됩니다. 조류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쓰레기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시대의 조류에 흽 쓸리고, 세상의 힘에 굴복해 떠다니다 보면, 저절로 쓰레기 섬, 난파선들의 무덤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조류에 저항 없이 쓸려 다니는 자의 종말은 세상조차 외면하는 무익한 존재가 되는 것뿐입니다. 이런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당히 시류를 이용하거나 피하는 것으로는 교활한 세상에 백전백패 할 뿐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후회 없는 삶을 움켜쥐는 비결은 용사처럼 시류를 돌파하고 제사장 사명을 가지고 나에게 맡긴 하나님의 사명을 당당하게 성령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환경과 시대를 역류해서 살아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악조건을 뒤집는 능력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있다면 뒤집기 선수입니다. 때로는 넘어질 듯 패배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을 딛고 일어섭니다. 이것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성도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함께 보고 있는 빌립보서는 기쁨을 주제한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가?"라는 문제를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트럼펫 연주가 루이 암스트롱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 속에 음악이 있다면 음악에 대한 정의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속에 음악이 없다면 아무리 음악에 대한 훌륭한 정의를 내린다 할지라도 당신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음악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내 속에 음악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오늘 현대인들이 기쁨을 모르는 것은 기쁨에 대한 정의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기쁨을 다 빼앗기고 그 속에 기쁨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까?첫째는, 변덕스러운 우리의 환경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나의 당한 일"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입니다. 17절에서 "저들"이라고 표현된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고 하는 실존의 문제인데 본문은 "죽는 것" 즉 죽음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살아가는 어느 날 문득 기쁨을 빼앗기고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이 세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환경 때문에, 꼬인 인간관계 때문에, 질병과 죽음의 문제, 이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그런 문제가 자신에게 장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도리어 디딤돌로 삼고 세상에 자유하는 사람들을 향해 담 안에 갖힌 자신이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어렵고 힘든 자리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던 것은



1. 환경너머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십시요.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나의 당한 일"이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그는 지금 아무런 죄도 없이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나의 당한 일”이란 좁은 의미에서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늘 본문은 동사의 시제가 현재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법에서 현재완료형이란 과거에 시작하여 현재까지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행동을 나타낼 때 쓰는 동사의 표현법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바울이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일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로마의 감옥에 올 때까지 일어났던 모든 환난과 역경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거의 5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 갇혀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감옥의 문이 열릴 것인지, 아니면 그 감옥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인지, 아무런 기약도 없이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 같은 생각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도 확실히 모릅니다. 오히려 그가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더욱 짙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포자기, 절망, 불평, 원망의 넉두리를 하기 쉽습니다. "바로 살아 보겠다 몸부림하는 나를 5년 세월 감옥에 넣어두다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부귀영화를 위해서 달려왔단 말인가? 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달려왔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나의 모든 것은 끝났다, 깨끗이 포기하자, 그만두자, 전도고 뭐고 이제 나는 끝이다."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감옥이 나의 꿈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풍랑이 나의 믿음을 흔들어 놓지 못할 것이다. 환경이 생의 목적을 뒤집어 놓지 못할 것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 결과가 좋다 하더라도, 그 고난의 끝에서 엄청난 영광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2절에 절망의 한복판에서 외칩니다. 내가 지금까지 당한 일 때문에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일이‘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 고 말합니다. 여기서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노라’여기서 “진전”이라는 말은 예날 성경에는 진보“프로코페”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나무를 찍어 가면서 앞으로 전진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로 군대에서 공병대가 앞서 나아가서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길을 놓거나 다리를 놓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바울 당시에 전 세계의 가장 막강한 군대였던 로마의 군대는 항상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공병대가 먼저 앞서 나가 장애물들을 제거하면서 도로를 닦았는데, 특별히 로마인들이 자랑하던 전차가 나아가는 길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뚫린 길로 로마의 전차가 행진해 들어가면 그곳이 곧 로마의 영토가 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럽에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까지 생긴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런 사실을 염두해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가 로마의 길을 잘 알지 않느냐? 저들이 계속해서 전차와 군대가 나아갈 길을 만들어 땅을 점령해 나아가듯이, 지금 너희가 걱정하고 있는 그 일 때문에, 즉 내가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오히려 복음의 대로가 열리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13절에 보면 아십니다.“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그밖에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여기 시위대란 바로 황제의 시위대, 즉 로마 황제의 경호를 맡은 친위부대를 말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로마 황제의 시위대는 엄청난 특권을 갖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유력한 집안의 자식들이었고, 로마정신에 투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호위부대이기 때문에 여기에 선발되면 급료도 두 배나 더 받고 남다른 조건에서 근무를 할 수 있었기에, 로마의 유력한 가문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시위대에 뽑히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 부대를 처음 조직한 황제가 바로 그 유명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였고, 보통 약 만 여명의 시위대 군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시위대가 있는 감옥에 자신이 수감되어 있지만, 그 메임이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는 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중죄수를 가둘 때에는 간수 두 사람이 죄수의 양쪽 팔에 각각 손을 같이 묶고, 그 앞에는 따로 두 명의 간수를 세워서 보초를 서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중죄인을 지키기 위해서 네 사람의 시위대 군인들이 배당이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보초는 6시간씩 하루에 네 번을 교대로 하였기 때문에 최소한 바울의 곁에는 하루에 16명의 시위대 군인들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때 바울이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행전 21,22,23장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이 때 바울은 성전 안에서 결례의 예를 행하다가 성난 유대 군중들에 의해서 린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 때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로마의 천부장이 부하들을 풀어 사태를 진정시키고, 몰매를 맞고 있던 바울을 가까스로 구해냅니다. 그런데 심하게 매를 맞아 거의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바울은 오히려 천부장에게 부탁을 하여 유대인들에게 다시 이야기 할 기회를 달라고 하여,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몰매를 맞아서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 놓았더니, 겨우 일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또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이것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감옥에 갇혀서 시위대 군사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여 있을 때에 무엇을 하였을 것 같습니까? 바울에게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바로 로마의 중심부에 들어가, 그 로마를 움직이던 사람들, 로마의 정신이요, 로마의 사상을 대표하던 젊은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간수들은 바울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처지라 아마도 꼼짝없이 바울이 전하는 바 귀한 복음을 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전파였습니다. 모든 환경과 사건을 평가하는 그의 기준이 복음전파였습니다. 그것이 고난이든 평안이든 복음전파에 유익이 되면 성공이요, 복음전파에 해를 가져오면 실패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매일같이 산해진미를 먹고 마시고 살아도 그걸로 인하여 내가 복음전파에 게을러지고 나태해지고 내 영성이 무디어 지고 복음전파에 방해거리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요, 내가 비록 고난에 처하고 어려움과 실패를 경험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면, 내 영성이 맑아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기름진 밥을 먹느냐 못 먹느냐?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 내가 고생을 하느냐 대접을 받느냐? 소위 출세를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따위는 도무지 안중에도 없어 보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출세와 성공과 안일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떤 형편에 있든지 복음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것, 그것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나의 매임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환경이 그를 힘들게 해도 그는 그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되었기에 그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은 것입니다.



2. 그리고 그가 이 기쁨을 뺏앗기지 않은 것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그 아픔을 잘 극복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가 잘못되었을 때에, 큰 이유 없이 나를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 부부간의 갈등이 생기고 부모 자식 간의 신뢰가 깨어질 때에,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 때에 오는 낙심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환경의 위기보다 더 한층 어렵고 복잡한 것이 인간관계의 위기 아니었습니까? 심지어는 현대인들의 간질환, 위장병 등이 인간관계의 뒤틀림에서 많이 온다고 합니다.



인간관계의 위기는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사람들로 인해 오는 상처와 갈등은 정말 우리의 기쁨을 한 순간에 뽑아 갑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이들"이라고 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나오고 17절에 "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따르고 돕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괴롭히는 사람들, 오히려 바울이 감옥에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 무신론자들이 아닙니다. 함께 복음을 전하는 동지들임에도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에도 함께 해야 할 공동체 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성숙치 못한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 바울을 반대하는 "그들"은 그래서 바울이 없는 사이에 자기들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을 괴롭힐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18절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러면 무엇이뇨.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너희들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고, 내게 괴로움을 더하는 길이라도 그 일을 했지만 나는 도리어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나는 너희들 때문에 내 행복을 빼앗기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 때문에 불행하게 살아가지 않겠다. 오히려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할렐루야.

바울은 모든 하나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내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겠다는 겁니다. 옹졸하고 왜소한 내 시선에서가 아니고 예수의 시선을 가지고, 왜곡된 내 심장을 가지고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사건을 보고 사람을 보고 미래를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로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만사를 자기가 해야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피곤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남의 사역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나만 옳다는 고집이 꺾여지기 전까지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방법과 아집 나의 편협한 생각을 털어버리고 나면 이 사람이 하는 것도 마음에 들고, 저 사람이 하는 것도 좋아 보이는 법입니다. 내가 잘한 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족과 실수와 허물까지도 은혜가 될 때 진정 교회 일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넓은 가슴을 배워 가십시다. 그는 원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까지 기뻐했습니다. 나는 죽었고 나는 고생을 했지만 도리어 저들이 일하게 되었으니 기쁘다는 것 입니다. 순수한 동기는 아니었지만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었으니 기쁘다는 것입니다.



3. 우리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죽음도 불사하는 분명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죽음 앞에 자유로울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자신 앞에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자유로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이 생명을 어떻게 쓰시려하십니까? 여러분, 생명이 무엇입니까? 제가 지금 숨을 쉽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죽음은 숨을 쉬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중국에 스챤성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곳에 있던 선교사님의 이야기는 정말 인생이 얼마나 나약하고 허무한 가를 보여 줍니다. 몇 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아비규한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보셨지만, 지진이 있고 나서 필사의 구출 작전을 합니다. 그런데 그 현장을 보도하는 TV를 통해서 느낀 것이 있지 않습니까?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구조대원들이 사람을 구해냅니다. 건져낸 사람 코끝에 호흡이 붙어 있으면, 구조대원들이 하얀 모포를 씌운 채 안고 나와 앰뷸런스에 태웁니다. 그러나 호흡이 사라졌으면, 어김없이 시커먼 대형 쓰레기 비닐을 씌어서 나왔습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호흡이 끊어지면, 대형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인생이 우리가 안다면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며, 또 영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그 분이 나와 함께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의 사도 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재판이 끝나면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여기 보면 “살든지 죽든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울은 삶과 죽음의 절대 절명의 위기 가운데 처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는 죽음의 위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보다 자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하게 나타나느냐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신촌에 있는 양화진에 가면 비석이 많이 서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세기 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순교한 사람들, 풍토병에 걸려서 죽었거나 잘 적응하지 못해서 일찍 죽은 어린아이들의 무덤, 이 땅에 와 제대로 사역의 꽃 한번 피우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들의 무덤입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무명의 선교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패하고 병든 세상과 족속으로부터 생명을 건지는 일 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만드는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때문에‘ 기뻐합니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남편 사업이 잘 되기 때문에, 취직이 되었기 때문에, 남부럽지 않은 건강 때문에 등의 여러 가지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때문에‘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의 삶이 최악의 환경으로 바꿔질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으로 배신당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위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슬리 웨더헤드는 "기쁨의 반대는 슬픔이 아니라 불신앙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세상적인 시각이 아닌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항상 동행함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날마다 기쁨을 세상에 빼앗기지 아니하고, 복된 삶, 승리의 삶, 기쁨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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