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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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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1:27-30 2012.9.16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09-16 | 조회: 1610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1:27-30. 36. 521. 65. 시149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고향에서 불러내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 된 우리를 예수 믿도록 불러내셨습니까? 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흐르는 모든 사상의 주제를 보면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데 있습니다. '거룩하라'는 말을 바꾸면 '다른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빛과 어두움이 다르듯, 소금과 썩은 고기가 다르듯,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거나 세상과 같으면 그날로부터 교회는 죽음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성도의 삶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에 잘 간직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27절 상반절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여기 ‘생활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폴리튜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시민으로서 행동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너희는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야!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나 물질이나, 쾌락에 노예가 아니야!! 너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김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천국백성이야!! 비록 내가 나를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고, 미덥지 못해도 이제 그 은혜를 힘입고 좀 당당해라,’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긍지를 갖고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일마다 대하는 빌립보 서신을 보세요.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갖혀 있습니다. 한 5년이상 감옥 생활을 했기에 그의 옷은 남루하고 그의 얼굴은 초췌하며, 머리는 손질도 제대로 못한 채 헝클어져 있습니다. 손에 쇠사슬을 차고 힘겹게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빛나고 투명합니다. 비록 그의 얼굴은 거칠었지만 평안합니다. 그의 가슴엔 피가 끓고 있습니다. 무엇이 저를 그렇게 강하고 멋지게 만들었습니까? 우리는 남보다 누리면서도 가졌으면서도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데 이 절망의 감옥에서 왜 그리 당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에게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초라한 모습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맡기셨다”는 그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기에 세상 앞에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총독의 권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별것 아닌 인간적인 허세를 가지고 위풍당당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바울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긍지와 자존심이 있기에 세상 앞에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시대를 초월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그러니 좀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좀 세상과는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겠습니까?



1. 서로 협력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오늘 말씀 빌1:27절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 막?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협력'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쉬나-쓸룬테스'라고 말합니다. 이 뜻은, 보통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운동 시합에서 우승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합심으로 하나가 되어 사력을 다해서 경기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요즘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은 축구경기나 야구경기나 농구경기 등을 보세요. 한두 사람이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팀웍이 잘 되어야 합니다. 선수 하나 하나가 서로 협력하여 하나같이 움직일 때, 비로소 경기에서 승리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또 '쉬나-쓸룬테스'는 치열한 전투에서 함께 투쟁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극에 나오는 전쟁을 보세요. 전장에서는 칼과 창을 가지고 서로 맞붙어서 싸우는 백병전(육박전)이었습니다. 상대방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고, 적군을 무찌르지 못하면,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냉엄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니 대충 대충 싸워서는 승산이 없기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나-쓸룬테스'는, 함께 분투하고 함께 고통당하고 함께 일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사활이 달려 있는 것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협력'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기러기를 보세요. 기러기가 갈매기 모양으로 긴 여행길을 날아가는 것은 멋있어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류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갈매기 모양으로 날아갈 때 71%를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맨 앞에 날아가는 새가 뒤 따라오는 새가 받을 공기 저항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아가는 도중에, 앞장서 가는 기러기를 뒤따라가는 기러기들이 박자를 맞추어 ‘콩, 콩’하고 울어 댄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뒤에서 쳐지지 않고 잘 따라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그들만의 신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참 날다가 힘들면 앞서 가던 새와 자리를 바꿔 먼 여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마리가 이상이라도 생기면, 다른 두 마리가 같이 내려와 있다가 다른 떼에 흡수되어 다시 날아갑니다. 격려하고 위로할 때 본래 역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세워 주고 함께 동역하고 있습니까?



눅8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제자들과 함께한 여성들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구절이지만,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이 여성들의 비중은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본문을 2-3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라고 기록합니다. 여기 예수님은 12제자만 데리고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옵니까?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그리고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 일단의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1절과 3절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함께 하여’라는 단어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여인들이 제자들의 공동체에 ‘함께 하여’ 삶을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난 후 개인적으로 조용히 혼자 주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하나님의 일을 능력 있게 감당했던 사람들은 자기 은사와 능력만을 믿고, 겁 없이 달리던 솔로 경주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훌륭한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도로 돕던 중보자들이 있었습니다. 함께 달리던 믿음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은 패하거니와 삼겹줄은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영적 싸움에서는 솔로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소영웅주의자 보다도, 비록 부족해도 '함께 기도하며, 함께 땀 흘리며 합심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2. 대적 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28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8절 말씀에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대적자들’ 앞에 두려워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두려워하다'는 단어는, '프튀로마이'라고 하는데, 이 '프튀로마이'라는 단어는, 겁먹은 말이 놀라는 표현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겁먹은 말이 놀라면 어떻게 합니까? 안절부절 못하고 마구 뛰어다닙니다. 거기에 한번 올라타 보면 아마 다시는 말을 안타려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왜 바울이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했습니까? 당시 믿는 사람들은 생명을 내걸 각오가 아니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핍박과 고난이 많았습니다. 처음에 믿는 사람들도 왜 이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그 핍박이 거세지니까 흔들거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 가운데도 예수 믿으면 좀 우환이 떠나가고 뭔가 잘 되리라는 기대감, 다 갖는 것이 아닙니까?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잘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어려움이 계속 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바울 당시 초대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 믿자마자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됩니다. 예수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겼습니다. 이처럼 위협과 핍박이 저들 앞에 놓여 있는 불안함이 그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쭉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 살펴보면 예수님은 대단히 솔직하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믿으면 너희들도 핍박받을 것이다.' 하는 말을 듣고 예수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너희들이 생명을 내 놓고 죽을 각오를 하지 아니하면 나를 좇아 올 수 없다. 너희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 와야 된다. 이 길은 좁은 길이다. 이 길은 고난의 길이다.' 이런 말을 듣고서도 예수 믿고 주님 따라 갈 사람이 있겠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도 예수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십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십자가를 져라. 나의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자기 목숨을 아끼려고 하는 사람은 나를 따를 수 없느니라.' 대놓고 주님께서는 예수를 믿으면 핍박당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얼마나 솔직하신지 모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 가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물러갈까 싶어 겁이 나서 하나님의 진리를 적당하게 포장해서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15:19,20절에 나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다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으면 세상이 너희를 절대 핍박하지 않는다. 제 새끼 미워하는 부모가 없듯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것이지만'.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 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주님은 숨기지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핍박당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모두가 예수 믿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짓눌러도 결코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핍박당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 믿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족을 잃었습니다. 직업을 잃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핍박받아 나중에는 산 속에서 유리하고 사막에서 방황하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은 형장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외로운 그 자리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교했습니다. 알면서 다 따라갔습니다.



로마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익나티우스가 안디옥에서 로마로 호송을 당하여 원형 경기장에 끌려 왔습니다. 이제 맹수의 밥이 되는 순간입니다. 집행관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 한 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익나티우스는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말하기를 “만약 기독교의 이 모든 것이 허무맹랑한 일이라면 내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 고통을 당하고 있겠는가? 이 진리가 거짓이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겠는가? 또 이것이 거짓이라면 무슨 까닭에 내 몸을 사자밥이 되도록 맡기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사자 앞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냥 눈 한번 감고 부인하면 살수 있지 않습니까?



말 한 마디로만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풀려나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이 되는데 이 한 마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한 마디 말을 못해서 세상이 볼 때는 가장 바보 같은 인생의 종말을 고한 사람들이 초대 교회 안에 수십만이 있었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고아 신세가 되어 어떻게 됐는지 알 수도 없는, 부모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당하면서도 예수 모른다는 말 한 마디를 할 수가 없어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간 성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자신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쁨을 세상이 뺏앗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시대 앞에 요동하지 않고 두려워 않는 이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도 기꺼이 받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사람들은 의례껏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도망가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 빌1:29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 뿐만 아니라, '고난' 조차도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시에스 루이스는 '고난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예비하시는 변장된 축복이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고난을 통해 과거를 떠나게 하고 안락한 환경을 떠나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 품게 된 꿈은 우리로 하여금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게 만듭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만들고, 낯선 땅에서 아침을 맞이하게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고난은 거대한 에너지입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고난은 변화의 고통을 환영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때로는 죽음마저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하나님을 찾습니까? 누가 은혜를 갈망합니까? 바로 은혜를 맛본 사람입니다. 은혜를 맛본 사람은 그 은혜 없이는 견디지 못합니다. 물고기가 물이 없으면 살수 없듯이, 은혜를 맛본 사람은 은혜가 없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은혜가 있는 곳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은혜를 맛보지 않은 사람은 부흥회를 하든, 무슨 집회를 하든 그저 시큰둥합니다. 영적인 것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맛을 모르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들은 내용이 많아 알긴 많이 아는 것 같아도 가만히 들어보면 추상적인 이론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단 하나도 자기 몸에 딱 붙어있는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관통하고, 뼛속까지 파고들어 생명을 움직이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 앞에 선 사람은 고난이 와도 자신을 한번도 실망 시킨 적이 없으신 그 분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고난을 견디어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정말 우리는 힘든 시대에 살아갑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리를 정말 슬프게 하는 절망적인 소식들로 가득합니다. 한 일간지 주관으로 한국 사회가 더 살기 좋아질 것이냐는 질문으로 조사했는데 77%는 나빠졌다고 대답했고, 올해도 비관적이라는 응답자가 72% 나왔다고 합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인구 십만 명당 43명이 자살하는 세계 1위의 자살 국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젊은 여성 5명 중 1명 꼴로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직종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 무려 5조에 가까운 돈을 도박이나 유흥비로 날려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 경시 풍조는 결국 사람을 짐승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든, 자기 딸이든 상관치 않고 잠시의 쾌락의 오락물 정도로 취급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포기할 수 있습니까? 포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해야 할 상당부분은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지나갔다 할지라도 아직 남아있는 미래, 펼쳐질 꿈마저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의 진짜 목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절망의 환경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환경으로 바꾸어가야 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지금 성경은 외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긍지를 갖고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옆에서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해야 내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한 순간도 재미없게 예수를 믿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은 예수 맛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것보다 더 좋고 신나는 것이 없다는 고백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와야 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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