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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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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빌2:5-11) 2012.9.30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09-30 | 조회: 1358
시중에 이러한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은 뒤에 저승사자가 데리러왔습니다. 저승사자는 천국과 지옥을 상징하는 집을 각각 보여주었습니다.?천국’이라는 간판이 달린 집에는 아주 아름다운 꽃과 탐스러운 열매가 가득 차있었지만, 사람들이 없고 한적해서 별로 재미없게 보였습니다. 반면에 ‘지옥?이라는 간판이 달린 집에는 생각과 달리 밝고 환한데다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땀을 뻘뻘 흘리며 디스코를 추고 있었습니다. 저승사자를 따라갔던 이 사람이 그 모습을 보는데 너무 재미있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승사자에게 ?나, 지옥 갈랍니다.?하고는 지옥을 선택했습니다.



드디어 이 사람은 지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지옥에 와보니까 아까 보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바로 전에 본 것처럼 즐겁게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괴로워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저승사자에게 항의했습니다. ?아니, 얘기가 틀리지 않습니까? 아까 보았던 집과는 완전히 딴판 아닙니까?? 저승사자가 그 말을 듣고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그것은 모델 하우스였지. 요즘 누가 모델 하우스 믿고 집을 사나??



아마 이 이야기는 부실공사로 다리와 백화점과 도로, 철도, 등의 건축물들이 무너지면서 사회가 한참 시끄러울 때 누군가가 만들어낸 유머라고 생각됩니다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유머라고 생각합니다. 모델이 무슨 의미입니까? 모델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모형?, ?모범?, ?본보기‘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진정한 본보기가 되는 사람을 찾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겉모습으로는 정말 훌륭하고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나중에 드러나는 본모습 때문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리더십이 땅에 떨어진 사회에서 참된 지도자, 참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우리 인생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겉보기가 아닌, ?바로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을 따르자, 이 사람처럼 되어야겠다.“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델은 필요한데, 배우고 싶고 따르고 싶고 닮고 싶은 모델이 필요한데, 불행하게도 정말 본보기가 되는 모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여기 마음이라는 말은 ‘생각’을 지칭합니다. 또 생각이라는 말은 인격을 말합니다. 우리 인격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들어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는 어떤 마음의 소유자였을까요? 또 예수는 그 마음으로 어떠한 삶을 사셨을 까요? 오늘 우리가 대하는 본문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구속론적으로 그 핵심사상을 요약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중 최고의 기독론이 바로 본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육신의 삶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여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예수는 하나님과 기원, 영광, 권능, 능력, 존재가 동등하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기꺼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시고 이처럼 종이 되기까지 낮아지신 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 우리를 섬기시기 위한 것입니다.본문 7절에서 하나님과 동등이신 예수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종의 형체를 갖기 위해서 였다고 기록합니다. 종이 하는 일은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낮추셔야 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스스로를 낮추지 않고는 섬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서 그는 먼저 자신의 허리를 구부려야 하셨습니다. 자신을 낮추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결코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섬기지 않는다면 세상은 결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지배하는 것으로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높으신 분이 섬기기를 결심하신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단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기원, 영광, 권능, 능력, 존재가 동등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낮추시고 섬기는 종으로 오셨다면 우리가 섬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2.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신 이유는 섬김이라는 단순히 도덕적인 목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영혼들의 구원이었습니다. 막10:45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섬김의 절정으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속죄함을 얻고 구원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빌2:8에서도 자신을 낮추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증거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구원하려면 먼저 섬겨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아직도 우리의 섬김의 분량이 채워지지 못한 때문인지 모릅니다. 저는 이번 추석 절에 가족들이 모일 때도 믿는 분들이 많이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가족들이 감동 먹고 예수 믿을 생각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추석은 주일을 껴서 수요일까지 합치면 꽤 긴 기간이 되어서 많은 분들이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줄로 압니다. 추석하면 참 좋은 명절인데 스트레스를 받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남성들은 대개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여성들은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습니다. 남자들은 고향에 갈 때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 자신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고급 승용차에 멋진 선물을 잔뜩 싣고 금의환향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형편이 그렇지 못할 때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옆집에 아무개는 서울에 올라가서 크게 성공했다더라.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왔다더라." 비교할 때 자존심도 상하고 기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경우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이 큰 것 같습니다. 온 가족들이 다 모일 때 음식준비하고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맏며느리의 경우 스트레스가 더 심하겠지요. 시댁도 챙겨야 하고 친정도 챙겨야 하니 살림이 넉넉지 않을 때에는 걱정이 큽니다. 게다가 주부들은 오랜만에 만난 시부모님과 남편이 죽이 맞아 자기 험담을 할 때 기분이 크게 상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주부들에게 명절 때 기분을 망치게 하는 동서나 형님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①추석 보너스가 얼마며 연봉이 얼마냐고 물으면서 은근히 자기 자랑할 때가 제일 얄밉다고 했습니다. ②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며 계속 실수만 하는 동서가 2위, ③일은 하나도 안하고 시부모님께 애교와 응석만 부릴 때가 3위를 차지했습니다. ④음식 조금만 하자하고 일도 별로 하지 않더니만 집에 갈 때 남은 음식 다 싸 달라고 할 때가 4위였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부모님이 제일 힘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식들이 효자라서 그래도 명절에 찾아주기만 해도 감사한데 아예 코빼기도 안 보이는 자식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객지에 나간 자식들과 손주들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애간장이 탈까요. 막상 자식들이 오기는 왔지만 뭔가 사업도 안 풀리는 것 같고 행색도 초라해 보일 때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오랜만에 온 가족들이 다 모였지만 연휴가 끝나고 뿔뿔이 흩어질 때 또 부모님이 겪는 외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좀더 자상한 추석 -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최근의 한국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세상을 감동시키는 섬김을 잃어버린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이유-우리의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섬기셨습니까? 여기 8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 말씀을 보면 그가 자신을 낮추시기 위해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자신을 비우신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비우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비우셨다고 해서 자신의 본질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시면서 그가 만일 그의 신성을 포기한 것이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우리의 모범은 되실 수 있어도 우리의 구원자는 되실 수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쉽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는 ?黴탔?본질을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우선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된 자리를 포기하시고 사람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주인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종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받으실 수 있는 대접을 포기하셨습니다. 대신 가장 낮은 사람인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때로는 오해를 때로는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제자되기를 구하는 오늘의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기꺼이 자신을 낮추기 위해 주장할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신 것들이 있으신가요? 자신을 위해 쓰는 일을 줄이고 이웃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있으셨나요?



좀 더 큰 집에서 살 수 있는 분들이 집을 줄인다든지 좀 더 큰 자동차 탈수 있는 분들이 더 작은 차를 타며 이웃을 섬기는 일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모습들이 있으셨는지요? 주차장에 주차할 때도 다른 이웃들이 주차하기 어렵지 않도록 주차하지 말아야 할 곳에 주차 안하고 내가 좀 더 먼 곳에 주차하고 걸어오는 일, 엘리베이터 탈 때나 식당에서 식사할 때도 연약한 이웃을 배려하고 자신이 손해 볼 줄 아는 것-믿음의 표현은 이런 구체적인 양보나 희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챙길 것 다 챙기고 다 대접받고 다 높임 받고 언제 섬기고 언제 이웃들을 전도하시겠습니까?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예수님의 섬김의 마지막 절정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첫째는 우리 대신 치르신 고통의 대가지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 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 입니다. 죄인에게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형벌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의 죄 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을 피할 수 없고, 그 형벌에는 무서운 지옥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실 훗날을 내다보면서 이사야서 53장 5절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왜 찔렸습니까?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내가 받아야 될 징계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고통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아픔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십자가에서 주님을 우러러 보는 그 순간을 마음에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 째로 십자가는 우리의 수치를 담당한 대가 지불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세 번 째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현장입니다. 요19:30절에 보면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원히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하시고'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구약에 예언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일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의롭다 하실 수 있는 명분을 다 완전하고 충분하게 주님이 갖추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완전하고 충분한 구원의 길을 우리 주님이 닦아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이루어 주신 현장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예수님이 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면서 꿈을 꾸었던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권을 갖고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그 나라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그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들어갑니다. 바로 내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이 땅에는 두 종류의 크리스천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신자와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을 지녔습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세상 가치를 뛰어넘는 기적의 삶을 살아갑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나타나는 삶, 즉 예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도구로 삽니다. 하늘에서 땅을 바라보며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사’로 살면서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데 진력합니다. 그에 비해 종교인은 세상의 관점 그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합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이 땅에 나타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헨리 C.모리슨(Henry Morrison)이라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금세기 초 아프리카에서 40년 동안 선교 사역을 하는 동안 자신의 건강을 잃었습니다. 가족을 잃었습니다. 이젠 나이가 든 선교사가 되어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타고 돌아오던 배에는 아프리카의 한 국가를 방문한 후 코끼리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뉴욕 항구로 입항하자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붉은 레드 카펫이 깔리고, 군악대의 팡파르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조기를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대통령 일행이 항구를 빠져 나간 후 모리슨 선교사가 항구의 출구로 나서자 레드 카펫도 없었고 군악대의 팡파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중 나온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는 저녁노을이 지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주님, 이것이 지난 40년간 아프리카에서 저의 청춘을, 저의 건강을, 그리고 저의 일생을 바친 결과입니까?” 그때 그는 저녁노을 사이로 말씀하시는 조용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헨리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단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레드 카펫이 아닌 황금의 유리길로 군악대가 아닌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내가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사는 동안 세상의 환호와 박수소리를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우리는 어떤 영접을 받을까요? 세상의 그 어떤 환대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런 모습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나그네 인생입니다. 나그네 된 우리의 삶이 때로는 힘들고 어렵고,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 아픔과 고난의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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