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그리고 그 이후(빌2:12-18) 2012.10.7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10-07 |
조회: 1455
지난 추석 명절을 잘 보내셨는지요? 주일이 명절이라 우리 교인 가운데 절반이 안 나오셨습니다. 이는 우리 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을 다시 만나니까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 아멘
우리가 제자 훈련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 훈련 과정의 가장 중요한 말씀 중 한 구절이 골1:28절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기 그리스도를 증거합니까?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증거 할 사람을 기르고 세우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길러야 사명이 완수 됩니다.
교회의 생명은 바로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훈련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 이어질 미래가 희망적입니다. 제대로 된 인격과 신앙을 갖춘 사람이 만들어져야 교회의 미래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에드윈 마크햄이라는 사람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인간의 모든 계획이 사람을 키워주는 일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일도 무익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소경일 뿐이다. 사람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 도시들을 아름답게 꾸밀 이유가 있을 것인가... ”
누구도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 더욱 강조되어야 합니다. 모세를 보세요. 그는 후계자를 잘 세웠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정복할 수가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여호수아는 다음 세대를 책임 질 사람을 기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그 다음세대는 자기 소견이 옳은대로 사는 타락한 시대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다윗도 솔로몬을 세웠을 때 그 시대는 전쟁도 없고 평화가 왔습니다. 그러나 솔로몬도 사람을 세우지 못함으로 그가 죽은 다음 분열 왕국의 고통이 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얻었다며, 그래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생활을 한다면,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을 세우는 것이고 그들이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변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자라가라는 말입니다. 신앙도 성장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에서 영적생활의 목표는 예수에게까지 자라가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몇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
첫째가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라. 12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여기서 ‘구원을 이루라’는 표현은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칭의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구원을 이루라’는 표현은 성화 구원을 말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서 계속해서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 갓 나온 새댁이 아기를 낳았습니다. 아들이었습니다. 온 가족과 친척의 축하가 쏟아졌습니다. 곧 백일이 되고, 돌이 되어 돌잔치도 멋지게 치렀습니다. 그 후 아기를 여럿 낳아 키워본 구역장이 그 아들을 보면서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병원에 가 보도록 권했습니다. 새댁은 동네병원을 거쳐 대학병원으로 갔고, 결국 선천성 난장이증을 갖고 있다는 최종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 아들로 인한 모든 기쁨은 보다 큰 슬픔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참 무서운 병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건강해야 합니다.(서로 인사- 건강하게 삽시다.) 오늘 희귀한 불치병 가운데 하나는 “프로제리아”(Progeria) 라는 병이 있습니다. 일명 “조로증”입니다. 이 병은 주로 아이들에게 걸리는 병인데 아이들이 출생하여 자라다가 2개월쯤부터 3년 사이의 아이들에게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 병이 오면 어느 날부터 성장이 멈추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세포가 정상인보다 10배나 더 빨리 늙어갑니다. 그래서 체구가 왜소해지고 탈모증세가 나타나고 어린 아이인데도 피부주름이 노인처럼 되고 어른처럼 동맥경화증에 걸리고 노쇠현상이 급격이 나타나 나이는 분명 어린아이인데도 생김새는 노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부분 10년 정도 생존하다가 생물학적인 노화과정을 다 거친 후 죽는다고 합니다.
성장을 안 하고 도중에 멈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때를 따라 잘 자라면 하나님께 영광, 남에겐 유익, 자신에겐 기쁨과 복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지 못하면 하나님께 아픔이요, 남에겐 부덕하며, 자신에겐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때를 따라 자라야 되듯이 우리의 믿음도 자라가야만 합니다.
2. 불평과 원망을 털쳐 버려라!! (14-15절)
4절을 읽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공동체의 성화를 가장 방해하는 것은 원망과 시비입니다. 어쩌면 바울 사도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와 하나님께 원망하고 시비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민14:27-28절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기억하십시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① 원망이라는 희랍어 단어는 ‘불평을 품고 투덜대는 것’을 말합니다. ② 시비라는 단어는 ‘악한 의도로 다툼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말씀으로 보아 당시 빌립보 교회에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원망과 시비가 일어났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교수 한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는 큰 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더라.’는 가십(gossip)으로 망한다.’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원망과 시비를 떨쳐버리고 좀 더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13절입니다.
13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붙잡고 사는 자는 어떤 환경 앞에서도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좀 서운한게 있어도 내게 주신 사명이 있는데, 얼마든지 견뎌낼 수가 있습니다. 왜 성장이 안됩니까? 하나님의 소원이 내 마음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와 비전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더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남다른 사랑으로 다른 형제와는 달리 채새 옷을 입고 자랄만큼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이를 시기하는 형들은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살도 아닌 형들에게 인신매매로 이방 땅에 던져진 어린 시절, 요셉이 겪어야 할 그 충격은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낯선 이방 땅 애굽의 한 노예 시장에서 자신을 사갈 주인을 기다리는 기구한 운명에 빠진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찌 그뿐입니까? 노예로 팔려간 집에서 신임을 얻어 이제 좀 살만하니까, 주인의 아내의 모함으로 ‘성폭행미수범‘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꼼짝달싹도 못한 채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악명 높은 애굽 왕 바로의 지하 감옥에서 언제 풀려날지, 아니면 비참하게 죽을지도 모르는 어떻게 보면 짐승보다 못한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까? 요셉의 일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 기구한 인생입니다. 그는 꼬일 대로 꼬이고, 비틀릴 대로 비틀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요셉의 인생은 마감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노예 생활을 했고, 죄수 되었던 땅에서 총리대신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던져놓은 형제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흉년으로 고통 당하는 애굽을 경제 강국으로 만드는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혀 놓았습니다. 요셉은 어떤 것이 달라진다 해도 변함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변함없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소원, 꿈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숱한 세월 원망과 증오로 칼을 갈아도 시원치 않은 세월을 오히려 마음에 소원을 두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살았기에 아름다운 인생을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3.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말합니다(16-18절).16절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함이라” 지금 바울은 목회 현장에서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전도해서 양육된 사람들이 믿음으로 아릅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이 헛되지 않도록 달음질하고 수고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얼마전 은퇴한 홍정길 목사님- “46년간 긴 시간 목회를 펼치셨는데, 은퇴 시점에서 되돌아 볼 때 과연 무엇이 남았습니까?” “내 주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 남습니다. 그래요. 그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 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름이요? 그거, 금세 지나갑니다.” 의미 있는 얘기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의 목사의 기쁨, 성도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뿐입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하나님의 백성을 올바르게 교훈하고 목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구원받은 백성으로 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 곁에 순결한 주의 신부로 함께 서서 기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해서 믿게 된 사람, 이제 태신자를 세우겠지만, 우리가 가르쳐서 성숙해진 그리스도인, 이들이 바로 우리의 면류관의 판단기준입니다. 그래서 어린 코흘리개들을 무릎 앞에 앉혀놓고, 갈등하는 청소년들의 등을 두드려주고, 번민하고 회의하는 청년들의 손을 붙잡고 상담하는 교회학교 교사들의 사역에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핏덩이 같은 새가족을 보살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는 목장지기들과 섬김의 사역에 서 있는 것이 얼마나 보람이 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의 자랑이요, 내가 받을 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전 2:19절에 보면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바울은 지금 깊은 감옥에서 이렇게 외칩니니다. 17-18절입니다.‘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여기 "관제(灌祭)"라는 것은 구약시대 제사에서 쓰는 말입니다. 제물을 각을 뜨고 불에 태워서 마지막 제가 남을 때, 그 재위에 포도주를 붙습니다. 불에 타는 제물 위에 관제로 포도주를 붓는 것은 제물이 관제인 포도주로 인해서 향기로운 냄새가 날 뿐만 아니라, 포도주 안에 있는 알콜 성분 때문에 제물이 훨씬 잘 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그 일에 자신이 제물 위에 부어진 포도주처럼 관제가 되는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희생적인 순교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의 삶은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 형제들의 구원이루는 일을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길을 억지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희생과 수고가 있어야하지만, 이 희생과 수고가 달갑지 않고 억울하고 슬픈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깨닫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자신의 희생이 어떤 열매가 있는 것인가를 알 때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로 삼기 위해 태신자를 세웁니다. 이 일이 얼마나 보람이 있고, 감격이 있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전도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선교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외아들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어떻게 희생하셨습니까?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대신 바친 것입니다. 이것만큼 큰 희생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끝날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 안에 함께 계십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희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참 좋은 예를 드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은 누구를 두고 하는 이야기일 것 같습니까? 바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신 자기 자신, 성령 하나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하여 친히 썩는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희생하심으로 우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희생 없이 생명을 건지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희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희생을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한 산동네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시고 신학을 마치신 젊은 목회자가 달랑 가방 하나들고 산 동네에 온 것입니다. 다 쓸어져 가는 허름한 집 하나를 개조해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사모는 굶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동네는 그를 환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은 그 동네에 살고 있는 희망을 잃은 수많은 실패자들, 내일을 체념한 채 사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내 놓았습니다. 그 눈물겨운 희생은 생명을 낳게 하는 참 기쁨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뭐, 여기 모인 여러분들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올 때 반드시 누군가의 배려가 없이 어떻게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근사한 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누구나 이 교회에 들어오면 예수 때문에 감동이 있고, 사랑이 넘치고 은혜가 있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희생이 없이는 사랑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 희생을 억지로 않고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기뻐하고 기뻐함으로 할 수 있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양초가 타서 녹아야만 빛을 발할 수 있고 소금은 물에 녹아지지 않으면 제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빛이 빛으로 소금이 소금으로의 사명을 다하는 길은 오직 하나 자기의 희생이 없고는 불가능함을 일러줌입니다.
사랑으로 희생으로 자기의 보혈을 관제로 십자가상에 남김없이 부어주신 희생 때문에 인류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에 주어졌고 또 사도 바울과 같은 관제의 삶이 오늘의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예수를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관제의 희생의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희생하므로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이것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이후에 우리가 가질 성화의 삶입니다. 오늘도 보혜사 성령께서 나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격려하시고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그 은혜가 이 아침!!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