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동역자 ⑦(빌2:19-30) 2012.10.1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10-14 |
조회: 1551
故 함 석헌 선생이 남기신 글 가운데 “그 한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명시가 있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날 / 처자를 내맡기며 /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 다 나를 버려도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저만이야'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탔던 배 꺼지는 순간 /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예’보다도/‘아니오’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며 진실로 충언해 주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사람을 무엇이라고 묘사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한 마디로 이런 사람을 바로 ‘진실한 친구’‘진정한 동역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 사도의 좋은 동역자들이 나옵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에 그렇게 놀라운 업적이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는 이 두 동역자에게 집중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동의하시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하면 바울 사도를 손꼽는 일에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바울 사도를 직접 만나 당신은 어떻게 짧은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질문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사역에 좋은 동역자가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그가 세운 빌립보교회를 무던히도 사랑했습니다. 그 교회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의 기둥처럼 여겨지는 두 여인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빌립보교회에 그런 시험이 있다니 걱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 안에 있으면서 ‘감옥 밖에 있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어떻게 하면 바로 키울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핍빅을 이겨내는 건강한 자녀로 자라게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깊은 생각을 가지다가 이제 한사람을 보내게 됩니다. 19절입니다.“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디모데를 빌립보로 보내기로 하면서 “너희 사정을 디모데보다 더 잘 진실하게 살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바울은 그의 마지막 유언 같은 두 차례에 걸친 편지를 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남깁니다. 그것이 바로 디모데 전후서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신약 성경의 적지 않은 부분이 바로 바울의 서신서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의 편지 중에 6개가 바울이 혼자 쓴 것이 아니라 디모데와 함께 공동으로 쓴 편지임을 아십니까? 고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 그리고 빌레몬서등입니다. 그렇다면 디모데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까?
1. 여기 보면 "뜻을 같이 하는 동역자"입니다.
20절을 보세요.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여기 보면 "뜻을 같이 하여"를 보세요. 이는 마음이 하나 됨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함께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인물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일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사실 바울과 디모데는 달라도 너무도 다른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정통 유태인입니다만, 디모데는 반쪽 유태인입니다 바울은 유태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과정을 밟으면서 자랐습니다만, 디모데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을 뿐입니다. 바울은 학자였습니다만, 디모데는 학구적으로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적극적이고 정열적인 사람이었지만, 디모데는 소극적이고 예민해서 위장병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하나가 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서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동역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디모데를 어떻게 이야기를 합니까? 21절을 봅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교회 안에는 항상 이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주변에도 있었고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로는 다 교회를 위한다고 합니다. 말로는 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행동하는 것을 보면 결국 자기 이익 때문에 일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자기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는 쪽으로 기울어지면 이런 사람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 주장, 자기 고집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양보하는 법이 없습니다. 타협하는 법이 없습니다. 끝까지 고집합니다. 심지어는 교회가 나누어지는 한이 있어도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교회가 나누어집니다. 한국 교회 분열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고집 때문입니다. 진리 문제 때문에 교회가 나누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이 사람들 욕심 때문입니다. 고집 때문이고 자기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자기 자신의 일보다는 그리스도의 일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입장보다는 성도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디모데에게 있었습니다. 자기를 내려놓을 줄을 알고, 또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는 어떤 희생과 심지어는 손해가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 오히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여 자신을 부르신 그 부름 앞에 인생을 거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선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가진 철학, 신념, 경험, 자존심 등의 것을 포기함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가 허락하지 않는 것을 갖겠다고 우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갖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마치 죽는 것과 같기 때문에 아이는 울고불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떻습니까?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손에서 내려놓을 때, 더 유익한 것을 들려줍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가 그러합니다.
교회의 신비를 알고 살아가십니까? 복음의 능력을 알고 살아가십니까? 성령충만의 맛을 알고 살아가시느냐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지 못한 복음을 듣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그것 가졌다는 행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세계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화를 간직한 행복! 이게 예수 믿는 삶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잠시의 쾌락에 메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세상 것을 내려 놓고, 모든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주석가 바클레이는 "디모데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을 위하여 모든 것을 쏟아 놓을 때, 그는 오직 한 가지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열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을 섬기는 바로 섬김에 있었다. 이것이 디모데의 위대함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디모데는 그 이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라는 뜻인데, 그 이름답게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 안에서 이런 디모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자신을 대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있습니까?
Ⅱ. 목숨까지 바친 에바브로디도
그리고 바울은 또 한 사람의 신실한 목회 협력자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출신입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을 걱정하며 준비한 연보를 친히 바울에게 전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냥 연보만 전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 감옥의 죄인으로 수감되어 있는 바울을 돕는다는 것은 종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곁에서 수종을 들 수 있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친히 바울의 종이 되기를 기뻐함으로 바울의 목회 사역을 도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에바브로디도를 25절에서 다섯 가지 칭호를 사용하여 편지에 씁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가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첫째는 “나의 형제”라 했습니다. 이는 바울과 함께 생활하면서 바울의 모든 것, 즉 감옥생활과 신앙을 함께 공유하고 생활한 것을 뜻합니다. 둘째는 “함께 수고하는 자”라 했습니다. 동역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셋째는 “함께 군사 된 자”라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바울과 같이 대적들과 싸운 일꾼을 뜻합니다. 넷째는 “너희 사자”라 했습니다. 바울과 함께 사도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권위를 뜻하는 말입니다. 다섯째는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했습니다. 이 말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돕도록 보낸 자로서 봉사자라는 뜻입니다.
이 만큼의 목회 협력자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다. 바울을 시중들다가 로마에서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빌리보 교회 교인들이 자기가 병든 것을 알고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오히려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착한 마음을 하나님이 아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에바브로디도를 만지심과 그 이유에 관하여 바울은 27절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저 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생각해 보세요. 주의 일을 목숨 걸고 하는데 치명적인 질병으로 사경을 헤멜 때, 자신도 고통이지만, 바울이 얼마나 고통이 크겠습니까? 이 때문에 얼마나 기도를 했겠습니까? 이런 어려움도 결국은 극복이 되는 이 동역의 현장을 보세요. 지금 바울은 그를 보내면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당부하는 바울의 편지에는 얼마나 그가 에바브로디도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 절절한 마음이 3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여기에서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의 헬라어는 원래 도박 용어입니다. 도박사들이 돈을 걸고 주사위를 던지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에바브로디도는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온통 삶을 던진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던짐으로 도박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함께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누가 이들의 앞길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20%가 넘는 숫자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의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잠재된 빛의 기능이 있고, 소금과 같은 맛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왜 세상 앞에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까?
저는 그 원인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부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렉산더가 4만의 군대로 이수스에서 당시 40만의 다리우스 군대를 쳐부순 것도, 쿠바라는 나라를 49년 동안 철권 통치하던 카롤로스가 정권을 내려놓으면서 그가 남긴 말 중 가슴을 두드리는 말이 있는데 "나는 82명과 혁명을 시작했다. 지금 다시 혁명을 한다면 절대적 신념을 가진 열 명과 하겠다. 신념과 계획만 있으면 사람이 적어도 상관없다." 절대적 신념을 가진 열 명이면 혁명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물며 우리에게는 세상의 기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 보혈의 능력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영광과 능력과 권위는 초대 교회 교인들의 헌신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글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입은 절대적인 헌신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진정한 동역자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공하는 목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가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일에 헌신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제 실로암 대학 소풍을 갔습니다. 여기에는 대부분 지체장애를 가진 분들입니다. 교회 한번 나오는 걸음이 쉽지는 않지만, 문제는 이 분들을 섬기는 봉사자들입니다. 해마다 봉사자들이 적어집니다. 물론 시간 내기도 어렵고, 또 무엇보다 많은 수고가 있어야하기에 선뜻 그 자리에 들어가기가 힘이 들기에 주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 교사 분이 자기의 친구들이 회갑 잔치를 해 주는 날이 공교롭게 같은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갈등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뿌리치고 하루 종일 오산 공원을 다니시며 섬깁니다.
어제 보니까 교회 김장 김치가 떨어져서 여러분의 점심을 위해 김치를 담그는데 그 양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 일을 이틀 동안 하는 모습을 보니까 안스러울 정도입니다. 여기 예배드리시는 여러 교우들 가운데 여기에 관심을 갖고 함께 일을 섬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일할 때보다 함께 일할 때 훨씬 큰일을 감당할 수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의 헌신을 기뻐하시는데 교회 안에 헌신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격려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 교회는 친교 단체가 아닙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 앞에 감동을 입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과 또 내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거기다 내 삶을 올인하는 열정이 일어나는 현장이 바로 능력있는 교회입니다. 여기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어쩌면 이 땅의 것들을 많이 빼앗긴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함께 한 생을 변함없이 아름다운 동행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동행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 함께하는 그 동행의 기쁨이 있나요? 정말 내 한목숨을 송두리째 드려도 아까움이 없는 그런 동행인가요? 여러분! 이들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함께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누가 이들의 앞길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역을 하면서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 일에 우리가 바로 내가 드려질 생각은 없는지요? 기도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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