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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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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하는 이유(왕하 7:3-9) 2012.10.2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10-30 | 조회: 1582
이제 터치 153 새생명 축제가 다음 주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저는 거룩한 전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터치 153 새생명 축제는 우리가 기도하는 태신자들에게도 큰 축복이 되겠지만 이미 예수 믿는 우리 모두에게 더 큰 도전과 생명력을 선사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과 영혼에 복음의 불을 당기는 기폭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거듭나고 구원받은 자라면, 다른 영혼을 위해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망이 불붙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은혜가 곧 복음 전파로 발산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님들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영혼 구원사역을 위해서 애쓰는 분들은 모두가 한결 같이 그 속에 복음 전파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모습이 뜨겁고 감격에 차 있을 때 불신자들의 마음도 뜨겁게 달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전도는 행사가 아닙니다. 전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딤전 2:4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절에도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20세기의 최고의 기독교 지성이라고 일컬어지는 C. 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들을 작은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존재 이유가 없다. 만일 모든 교회와 성직자와 설교 심지어 성경 그 자체까지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단지 시간낭비에 불과할 뿐이다. 바로 그러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이제 다시 한번 우리가 품은 태신자들이 어떻게 하면 주의 품으로 돌아올까를 깊이 생각하고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 모인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믿지 않는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생명 얻는 일이 체질화 되는 축복을 입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동성교회에 가장 원하시는 체질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얻고, 구원받은 자가 다시 한 생명을 찾는 이러한 은혜의 역사는 동성교회가 이 땅에 존속하는 한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지상(至上)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본문 말씀에는 나병에 걸린 네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성 안에 살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살지 않는 성 밖에서 같은 신세에 처한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단지 흉측한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성안에 있는 가족들이 가끔씩 바구니에 달아 내려주는 음식으로 생명을 연장하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도 동물도 아닌 음지식물 버섯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생존을 유지해야하는 참으로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죽지 못해 하루하루 연명해 가는데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그나마 식구들이 가져다주는 양식이 끊겼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엄청난 세력으로 성장한 아람 왕 벤하닷이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성을 완전히 포위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람군대가 너무도 많아 그 기세에 눌린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성문을 닦아 걸었는데 얼마가지 않아 사마리아 성 안에 양식이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굶주렸는지 왕하 6:2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에 먹을 수 없는 나귀머리 하나가 은 팔십 세겔에 거래되었고, 먹을 것도 없는 비둘기의 배설물 한 홉이 다섯 세겔에 거래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인들은 “오늘은 네 아들을 잡아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잡아먹자”고 하여 실천에 옮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얼마나 비참한 신세였는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때 거의 아사 상황 직전에 있는 성문밖 어귀에 사는 나병 환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여기 3-4절을 보십시오.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산 사람 입에도 풀칠할 것이 없는데 죽은 송장과도 같은 한센병 환자들에게 돌아갈 양식이 있을 리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가족들이 가끔 가져다주는 양식으로 연명하던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양식이 끊기자 견디다 못해서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는데 어차피 죽을 거, 실컷 먹고 나 죽자 하는 심정으로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있었던 적진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비록 보기 흉측한 한센병지만 불쌍히 여겨 먹던 빵 조각이나 쉬어빠진 음식이라도 나누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아람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갔습니다. 아니 그 방법 외에는 달리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적진에 도착해보니 군인은 한 사람도 없고 그들의 무기며, 양식이며, 말과 나귀가 다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지난 밤에 하나님께서 말발굽 소리를 내셔서 아람군대가 그 말발굽 소리를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는 애굽 군대의 말발굽 소리로 오인하게 했던 것입니다. 아람 군대는 엄청난 말발굽 소리에 놀라 미쳐 무기와 양식을 챙기지도 못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다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가면 됩니다. 그게 믿음의 모습니다. 이것저것 따지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대충대충 하기 때문에 ‘안 되면 말고’하는 식으로 하기 때문에 사탄과의 싸움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죽기내기로 달려드는데 우리는 안 되면 도망가면 되지 하는 자세로 싸우니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이것이 네 명의 나병환자들의 각오입니다.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갔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제 그들 앞에 놓여진 이 엄청난 광경은 상상도 못한 것입니다. 그들 눔 앞에 자신들을 죽일 것처럼 달려들던 군인들이 개미새끼 하나 찾을 수 없이 텅빈 현장, 그리고 막사마다 어마어마한 군량미와 노략한 값나가는 물건들.. 이게 상상이 갑니까? 그들은 믿기지는 않았지만, 흩어져 있는 음식들을 배터지도록 먹고 생전에 보도 듣도 못한 전리품을 서로 들고 갖고 노는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네 명의 문둥병자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아람 군대가 있는 곳으로 갔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방식이 바로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를 구원하고 운명을 바꿀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그 풍성한 구원의 은혜만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짊어질 모든 죄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짊어지고 가게 만드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건 모든 것을 다 갚았다, 죄의 대가를 다 치렀다, 우리가 받을 저주를 주님께서 다 겪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선물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인지 모릅니다. 엡2: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짜로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구원 받을 가치가 없는 나 같은 존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인생은 변화되고 새로워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둥병자들의 태도를 보세요. 9절입니다.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장막 안에 들어가서 보니 너무나 풍성합니다. 그래서 먹고 즐기며 신나게 지냅니다. 그러다가 문득 죽어가는 이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엄청난 이 축복을 자신들만 누리면, 내 죽어가는 저 동족들에게 큰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가서 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누가 먼저날 것도 없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사마리아 성으로 달려갔습니다. 성에 도착하여 성문을 두드리며 “아람 군대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도망갔다.”고 외쳤습니다.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 왕과 관리들은 자신들을 유인해 내기 위한 술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척후병을 보내 사실을 확인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음의 권세에 짓눌려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사마리아 성에 갇혀서 굶어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지 못해서 마치 사마리아 성 중에서 굶주려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죽음의 권세에 짓눌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내가 구원 받은 것만을 감사하고, 이 구원이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은 어찌하고 너 혼자만 천국에 왔느냐?” “사랑하는 아내는 어디 두고 너 혼자만 왔느냐?”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자녀, 사랑하는 형제, 자매, 사랑하는 이웃사촌들을 다 어찌하고 너 혼자만 천국에 왔느냐?”라고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면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너만 구원받고, 너만 이 좋은 천국에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고개를 들고 있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로베로 장군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십니까? 제2차 세계대전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트에 관한 영화 <로베로 장군〉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레지스탕트들이 감옥에서 끌려나와 사형 당하게 되었습니다. 포로들이 기둥에 묶이는 상황에서 한 사람이 외칩니다. “나는 장사나 하고 돈이나 벌며 살다가 잘못 잡혀온 사람입니다. 나는 저항운동과는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나는 무죄입니다.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독일 군들은 아랑곳 않고 그 사람을 기둥에 묶습니다. 그때 한 레지스탕트가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그것이 당신의 죄입니다. 지금까지 5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고 수백만 명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우리 조국과 민족이 멸망 직전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늘 당신이 죽어야 되는 이유입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죄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사실은 적극적으로 죄를 살펴보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도 죄지만, 해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인데도 말입니다.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문둥병자를 통해서 기쁜 소식을 증거하게 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문둥병자는 절망적인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에이즈 환자와 같습니다. 그들에겐 희망도 없고 그들은 쓸모도 없었습니다. 가능한 빨리 죽어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소원입니다. 문둥병자들이 일평생 걷던 그 걸음은 낙심의 발걸음 아니었겠습니까? 절망의 발걸음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이 걷는 발걸음 속에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어디를 가든 희망이 없는 발걸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문둥병자가 된 뒤에 입술에 어떤 말이 담겼겠습니까? “나는 왜 살아야 하나? 인생이 참 더럽다. 죽자.” 이런 자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언어가 가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엄청난 현실 앞에 지금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그들의 가슴 속에는 더 이상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든, 무어라 이야기하든 그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괄시하던 사회를 향하여, 자신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아픔을 갖게 됩니다. “내 한 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웃이 살아날 수 있어. 그동안에는 세상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달라. 오늘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원망과 불평과 세상을 비난하던 이 입술에 생명의 언어가 담겨져서 전파될 때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아날 거야.” 절망뿐이던 입술 속에서 소망을 전하는 음성과 언어가 나올 때 그들은 삶의 보람을 느꼈습니다.



오늘 이 아침 여기에 모인 여러분! 이 시대의 사람들을 보면 마치 사마리아 성에 갇혀서 굶어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나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쌓은 성에서 안락을 누리려다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는 고립된 인생들이 아닙니까? 기대했던, 자식 때문에 탄식이 있고, 희망을 갈망하며 결혼을 했는데 결혼생활 때문에 오는 부부간의 상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 취업이 안 된다는 그것 때문에 그 아까운 목숨을 끊는 우리의 청년들... 정말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어느 누구하나 예외없이 절망의 성, 불안의 성에 갇혀 사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런 인생을 향해서 우리 예수님은 상한 갈대요 꺼져 가는 등불의 한 심지와 같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했습니다. I have no choice, 내게 선택권이 없어요. 이 길 밖에 없어요. 내게 자유가 없다. 자유를 그리스도에게 반납해버리고 말았어요. 바로 그 상태가 바울의 모습입니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씀에 붙잡히니까 그는 더 이상 나약한 인생이 아닙니다. 전도를 안 하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자세로 당당하게 그 거센 죄악의 도시 속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오늘 아침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전도의 사명을 새롭게 하시고, 여러분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시시각각으로 죽어 가는 불쌍한 영혼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지금 새벽 특새를 하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나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그 생수를 공급받기를 바랍니다. 마른 행주를 쥐어짜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습니다. 내 심령 안에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여기 4문등병자는 자신들이 움켜쥐고 그 떡 하나도 감격했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 터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기고 상하시고, 물과 피를 다 흘리시며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인 기갈과 기근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복된 소식이 달리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곧 생명의 떡이십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이 생명의 양식을 우리만 먹고 왔다 갔다 하는 셈이 되면, 오늘 우리들의 행위는 문둥이들보다 훨씬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다음 주에 이 은혜의 자리로 그동안 기도한 영혼들을 초대하는 또 하나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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