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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합3:16-19) 2012.11.11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11-11 | 조회: 1463
요즘 강남 스타일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싸이라는 가수가 부른 강남 스타일을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전 세계에서 5억 명 이상이 봤습니다. 이것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이 본 세계 신기록입니다. 방송국에서, 운동 경기장에서, 심지어 정치인들까지 말 춤을 추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번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에게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 춤을 출 용의가 없느냐는 질문까지 받을 정도로 강남 스타일의 열기가 세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습니다.강남 스타일이란 노래가 신앙적으로 볼 때는 마땅치가 않습니다. ‘오빤 강남 스타일^밤이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 밤이 오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사나이^그래 바로 너^지금부터 갈 때까지 가 볼까?’ 가사 내용을 보면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이 노래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이 노래 하나가 전 세계인을 하나로 묶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라와 인종, 지역을 초월하여 함께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마다 지역 특성에 맞는 스타일이 봇물처럼 쏟아졌습니다. 교회 스타일, 간호사 스타일, 경찰 스타일 등 각양각색의 패러디 스타일이 쏟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중문화의 힘입니다.

저는 강남 스타일의 열풍을 보면서 ♬나는 감사 스타일♬을 떠올렸습니다. 전 세계가 오빤 강남 스타일에 열광하듯 우리 모두가 감사 스타일로 변화된다면 세상은 살맛나는 곳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나 싸이의 말춤을 추며 강남 스타일을 외치듯 모든 신앙인들이 나는 감사 스타일임을 외치며 산다면 얼마나 신명나는 세상이 될까요?



우리는 추수 감사주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일 년을 지켜주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서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 주변에 불어오는 경제 한파는 우리의 삶을 얼마나 움츠리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서 많이 듣는 말 가우데 하나가 ‘하우스 푸어’(house poor)라는 단어입니다. ‘하우스 푸어’라는 말은 자기 집을 가지고 있지만, 집을 살 때 받은 대출에 대한 이자를 갚느라 살림이 굉장히 힘든 사람을 말합니다. 집을 살 때에는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출을 많이 받았는데, 집값은 오르지 않고 금리만 올라 수입의 많은 부분을 이자로 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쓸 돈이 거의 없습니다. 서울에 비싼 아파트 갖고 있다고 다 부자가 아닙니다. 하우스 푸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2012년 국내 10대 트랜드’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하우스 푸어가 108만 가구에 이른다고 합니다. 또 ‘렌트 푸어’(rent poor)도 있습니다. 집이 없어 전세나 월세로 사는데, 전세나 월세가 너무 많이 올라 소득의 대부분을 전세나 월세로 내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캠퍼스 푸어’(campus poor)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싼 등록금에 학자금 대출을 받지만 높은 대출이자까지 겹쳐 아르바이트 생활로는 대학생활을 할 수 없는 가난한 대학생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워킹 푸어’(working poor)라는 말도 있습니다. 일은 하지만 비정규직이기에 낮은 월급에다 치솟는 물가 때문에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소호 푸어’(SOHO poor)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난한 생계형 사업자를 말합니다. 직장에서 조기 퇴직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개인 사업을 하는데, 요즘 같은 불경기에 개인 사업을 한다고 금새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실버 푸어’ ‘리타이어 푸어’(retire poor)라는 말도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 자녀교육에 신경쓰느라 노후대비를 하지 못해서 은퇴 후에 빈곤하게 사는 노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노년에 더욱 빈곤하게 사는 가구가 무려 102만 가구나 된다고 합니다. 이제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시기를 맞고 있는데, 이들이 은퇴하면 실버 푸어나 리타이어 푸어는 엄청난 숫자로 늘어날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하우스 푸어나 실버 푸어들이 대부분 중산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먹고 사는 것에는 별로 걱정할 것 없이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어느 날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대학에 들어가 캠퍼스 푸어로 대학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일을 하지만 소득이 적은 워킹 푸어로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결혼하면서 웨딩 푸어를 거쳐,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는 베이비 푸어가 되고,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사교육비를 대기 위해서 에듀 푸어가 되고, 좀 살만하면 집을 산 후에 하우스 푸어가 되고, 그러다가 직장에서 조기 은퇴하면서 소호 푸어로 살다가, 은퇴를 하면 실버 푸어-리타이어 푸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안에 경제로 인한 이 엄청난 부담이 우리의 가치,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삶이 어려운 시대적 환경에서 우리가 잃어가는 게 많은데 그 중에 현저하게 나타나는 게 감사의 메마름입니다. - 감사의 메마름. 그래서 사람들이 정말 날카로워지고, 서로 원망하고 불평이 잦아집니다. 심지어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지금 우리의 삶보다 더 어두운 시절을 경험한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암울한 환경 속에 갖혀 있으면서도 그 깊은 영혼 속에 감사의 샘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 아침에 우리에게 감사하는 삶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이란 뜻은 "포옹한다. 껴안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 즈음에 활동했던 선지자라고 짐작됩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사건중의 하나는 주전 609년 유다 왕 요시아 죽음입니다. 요시아는 성군이었고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왕입니다. 이 종교개혁을 통해 유다는 새로워졌습니다. 종교가 달라지니 정치와 경제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니 도덕적으로 바로 세워져 가난한 사람이 숨을 쉬고 부자들도 삶의 질서를 따라 나누며 살게 되는 등 나라가 전체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평안과 기쁨이 가득한 희망의 나라요,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죽자 유다 사회는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종교가 부패하기 시작하더니 사람들이 모두 자기중심적으로 변합니다. 자기 의만 주장하니 서로 다투기 바쁩니다. 정치적인 강포, 경제적인 무질서가 시작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 속에 살게 되고 악인들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 마음의 울분이 터졌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아니지 않습니까?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는 세상을 보시고도 하나님께서는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라고 하박국이 하나님께 묻는 것이 1장의 내용입니다. 2장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멸망시키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럴 때 하박국은 깊은 묵상을 시작합니다. “하나님 왜 유다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유다를 멸망시키시려는 겁니까?” 깊은 묵상 끝에, 3장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박국의 질문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하나님 왜 그렇게 섭리하십니까?’ ‘하나님 하필이면 악인을 사용하십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한경에 휘둘리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무슨 말입니까? -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 한다고 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게 때론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 하박국이 당한 환경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본문 16-17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여기 보면 부정어가 6번(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반복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3대 과실수가 무화과, 포도, 감람(올리브) 입니다. 과수원마다 애써서 지은 농사가 안됩니다. 밭도 마찬가지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다 짓밟혀버립니다. 이젠 어디를 찾아보아도 먹을 게 없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니 가축들이 죽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인간 조건으로 보면 완전 절망입니다. 끝장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감사할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게 정상입니다. 감사의 이유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건강하던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부요하던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권세와 지위가 있던 사람이 추락해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없음’의 소유에서부터 일어섭니다. “이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그는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이처럼 두려움에서 일어나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1. 첫째 하박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축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은 이 짧은 구절에 하나님을 두 가지로 표시합니다.?여호와??구원의 하나님?‘여호와’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한번도 택한 자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최악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절망의 골짜기에서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적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그는 확신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때로 내게 부딪힌 어려움, 고난, 이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만 아닙니다. 때때로 고난은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영원한 축복에 이르게 됩니다.



사회복지?萱?'애양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100년 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나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여수 지역에 만든 나환자촌입니다. 애양원이 유명해진 것은 지금부터 약 60년 전 위대한 성자 손양원 목사님이 배출되면서부터 입니다. 그분이 그곳에서 사역하다가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고, 그 두 아들도 순교를 당해 유명해진 곳입니다. 그 애양원에는 손발과 얼굴이 뒤틀린, 한 마디로 소망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특별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예배에 모이는 숫자가 똑 같은 한국의 유일한 교회입니다. 한 사람도 결석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배에 다 나오는 교회. 따라서 그들의 가슴은 뜨겁습니다.



그들은 양계, 양돈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이 되면 거기에서 번 돈으로 헌금을 하는데 수천만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말할 나위도 없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하면서 헌금을 많이 드리는지 모릅니다. 한 예로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을 세울 때 예산이 10억이 조금 넘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그들의 손에서 나온 헌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리고 여수 지방에 400여 교회가 있는데, 그 중 40개 교회가 이 나환자촌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서 드린 예물로 개척한 교회라고 합니다. 문둥병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세상을 비관하고 저주하며 살수밖에 없는 그들이 어떻게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들의 손에 무슨 감사하다는 예물이 들려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은혜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영적으로 누리고 보니 비록 육신은 망가졌지만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감사하는 것으로는 도무지 모자라 그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예물로 드리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주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시는 소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2. “찌라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비록’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이 ‘없을찌라도’로 끝나는 신앙은 줄여서 ‘찌라도’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박국 선지자 외에도 ‘찌라도’의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 3장을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나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세워놓고 모든 백성에게 절하라고 했습니다.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죽이겠다고 하여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느브갓네살 왕이 질문했습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단 3:15).



너희 하나님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건져낼 능력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 사람이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풀무불에서도 얼마든지 건져낼 능력이 있지만 설사 그런 기적을 베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결단코 우상숭배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찌라도’의 신앙입니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다윗의 신앙도 동일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다윗의 인생도 참 험합니다. 사울의 핍박. 압살롬의 반역... 하지만 그럴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두려움과 좌절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몸에 괴롭히는 육체가시가 있었습니다.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질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 번씩이나 그것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임을 깨닫고 만족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내가 약해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에 약하게 만드셨다는 응답을 받고 바울은 만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시대가 어려울수록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삶의 정황이 좋아진 다음에 하는 감사가 아니고 고통 한가운데 서서 고통을 바라보면서 다시 고통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는 감사가 진실한 감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어디까지 갈 때까지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의 수준일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은혜의 수준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다 얻고도 불평하며 불행해 하는 사람이 있고 세상을 다 잃고도 하나님 한분으로 감사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19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은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여기 사슴 하면 그 뿔과 날렵한 다리가 생각납니다. 사슴은 투명한 눈동자로 위험을 감지합니다. 골짜기에서 위험을 느낀 사슴은 그 즉시 날렵한 다리로 고지를 향해 춤추며 오르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골짜기에 서있던 사슴을 어느새 저 높은 고원의 언덕에 서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짜기를 굽어봅니다. 그 날렵한 사슴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놓은 곳에 있는 사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그렇게 인도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방금 전까지 우리는 어두움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괴로워하며 고통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절망하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사슴의 발같이 내 발을 들어올려 그 위험을 피하게 하시고 드디어 저 놓은 언덕, 나의 높은 곳, 가능성의 고지에 서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여러분! 위기가 닥쳐올 때 사람들은 다 큰일났다,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담대해야 합니다. 이 시간 기억하십시오. 모두가 답답한 현실이지만, 그 다음 우리가 내일을 바라 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폭풍우와 비바람 건너편에 있는 내일 새벽에 비쳐질 그 영롱한 아름다운 빛살을 볼 수 있는 안목만 있다면,/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환경다음에 나를 만드시고 또 나를 붙들고,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그 분의 손길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벌떡 일어 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하며 감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모두가 저녁에 나루 아트에 모여 이 땅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기쁨을 가지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찬양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감사하는 삶을 잃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 한 번 더 하박국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감사자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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