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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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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17) 2012.11.1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11-19 | 조회: 1433
오늘은 참 좋은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이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여 어느 때보다도 크게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두 가지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수장절이라는 절기입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밭농사를 주로 지었는데 한해의 끝 무렵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수장절이라는 절기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보면 "너희는 밭에서 애써 가꾼 것을 거두어들이는 한 해의 끝 무렵에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7동안 초막을 짓고 살면서 조상들이 출애굽 이후에 광야 생활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수장절을 초막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청교도들이 드린 추수감사절 예배가 추수감사절의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지금도 미국은 이 청교도들이 미국에 들어와 감사한 날을 국경일로 삼고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당시 그 유명한 아메리카의 신대륙을 향해 탑승했던 메이플라워호에 합승한 ‘엘리자베스 합킨스’라는 여성도가 영국에 있는 자기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한 토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출발에서 도착까지 상상외로 노도광풍과 침몰의 위기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항해의 출발이 결격사유로 인해서 지연된 까닭에 항해 중 비축해 놓았던 식량의 거의 전부를 소모했습니다. 더욱이나 항해가 시작했을 때는 여름이 아닌 9월의 초가을이었고 모두 102명이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았던 살인적인 괴혈병에 시달려야 했고 이미 여러 사람을 장사지내야 하는 불행한 사태를 겪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출발 후 두 달이 다되어도 목적지가 보이지 않았고 있던 식량마저 바닥이 났습니다.


한 지도자는 하루분의 비상식량이라도 비축할 필요가 있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금식의 날’로 제안했을 때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그러자 한 다른 지도자는 금식은 동의하나 ‘감사의 날’로 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감사의 날이라뇨? 하자 이제 우리는 그토록 열망하던 신대륙에 거의 가까워 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건강하게 살아있고 또 우리 안에는 아직도 신대륙에 소망이 담겨있는데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이 지도자의 제안으로 ‘감사의 날’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꼭 닷새 후에 1621년 11월 22일에 프리모어 항에 도착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도시 지식인 출신이었습니다. 겨울에 도착했기 때문에 절반 가량이 그 해 겨울에 죽었고 봄이 되자 인디언 족장 한 사람이 와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해 가을에 곡식을 수확하게 되자 너무 감사해서 인디언들과 함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이 감사의 근원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을 기록한 바울 역시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절망의 상황 속에 있습니다. 지금 차디찬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쇠사슬에 매인 체 갇혀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나이가 상당히 들었습니다. 빌레몬서1장9절을 보면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이제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 온 것을 알았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외로웠습니다. 차가운 옥중, 늙은 몸, 보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외로웠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런 외롭고 쓸쓸한 상황에서 그가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항상 감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매 장마다 감사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감사를 가르칩니다. 감사를 권면합니다. 그는 상황을 초월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처럼 환경을 초월한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1. 바울은 그의 삶을 예수님께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골2:6-7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2:6-7) 여기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무엇이 우리의 삶을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만들어 줍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우리의 감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귀한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큰 축복인 사실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보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아낸 것같이 횡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한 것보다 더 큰 축복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 영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송명희 여사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그 이름’란 시를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수 없네/그 이름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속에 있는 사랑을/그 사랑을 말할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내게 있는 귀한 비밀, 오 나는 말할수 없네/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렇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비밀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걸고 탐색하고 찾아도 다 헤아릴 수 없는 비밀입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 끝나도 저 영원까지 계속될 비밀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구원의 기쁨, 섬김의 기쁨은 그분의 이름이 지닌 영광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증거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지상의 모든 이름들을 잊을 마지막 순간에도 붙들어야 할 유일한 이름입니다.


골1:27에서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분안에 인생의 모든 비밀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분과 더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분을 더 아십시오. 바울은 그분을 더 알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오히려 우리는 배설물을 간직하고자 그분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그분만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분을 추구하십시오.

지난 주에 보았던 하박국 선지자를 보세요. 하박국 선지자는 원래 불평과 불만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그 말씀이 맞았습니다. 아무리 나라의 경제가 어렵고 국제적으로 전쟁의 위기 때문에 몸서리가 쳐지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붙잡는 믿음’ 그거 하나면 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합3:16-17)

“갈대아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치러 올라온다는 소리를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갈대아 군대의 함성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갈대아 군대가 이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올라오는 이 환난 날을 기다리므로 내 뼈가 썩는 것 같고, 내 몸은 두려워서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그러면서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러분,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기쁨의 찬송을 부르게 하며, 그 믿음이 우리로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게 합니다.사회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조건이 72가지였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 필요한 것이 18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가 진화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500여 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또 절대로 필요한 것은 50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60년 전보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오늘의 현대인들이 60년 전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게도 더 많은 것을 누리며 더 많은 것을 소유하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오늘의 현대인들은 60년 전보다 결코 행복해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소유했는데도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소유가 행복을 주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 분을 알아갈 때, 진정한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2. 우리들이 환경을 초월해서 감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말씀 속에 풍성히 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1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말씀 속에 풍성히 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골로새서에서는 ‘말씀 충만’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차디찬 감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성령 충만함입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진리의 말씀이 가득 채워져 있으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절제가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밀려옵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항상 사랑하며 삽니다.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배고픈 사람처럼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그래서 시인 박노해 씨는 ‘나쁜 사람’을 ‘나 뿐인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나 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마디로 나쁜 사람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이 충만한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은 타인을 배려합니다. 자기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속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고, 감사가 넘칩니다. 바로 그 마음속에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넘쳐납니다.

오늘 바울은 주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비결은 바로 성령 충만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사는 사람은 언제나 천국을 경험합니다.


(김형우.- 에레베이트. ?라와 헵시바 ①. 기관 활성화 ②. 나루 아트 - 우리 아이들도 좋은 공간에서 꿈을 심어 줄 수 이다는 것. 이번 중국 신학교 - 교회는 선교해야 한다. - 거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소망이 있다. 동관


사랑하는 여러분!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환경이 좋을 때는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상황이 달라질 때는 그 상황 앞에 우리의 삶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 안에서만 인생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이것 밖에 안되지?” 하는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도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을 바라볼 때는 다릅니다. 우리가 일제의 핍박 속에 있을 때 우리 민족에게 용기를 주었던 인도의 타고르라는 시인을 잘 알 것입니다. 그는 당시 탁월한 글을 발표했던 이탈리아의 철학자 크로체에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시인 타고르가 강에서 배를 띄우고 크로체가 쓴 “아름다움에 관해”라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책이 말하는 한 철학자의 눈에 보여진 아름다운 세계에 기뻐하며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촛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는데 워낙 열중해서 읽다보니 촛불의 심지가 다 타 들어가 꺼진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문득 주위가 캄캄해지고 책을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칠흙 같은 어둠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이제까지 촛불에 가려졌던 세계가 그의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주변이 눈에 익으면서 흐르는 물이 보이고, 달빛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들이 하나하나 다가옵니다. 타고르는 고백합니다. “나는 그때까지 촛불에 의지해서 크로체의 아름다움을 읽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촛불이 꺼지자 하나님이 빚으신 저 아름다움이 나에게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창공에 떠있는 별과 달의 아름다움,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물결에 굽이치는 달빛, 온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나는 촛불이 꺼진 다음에야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때 내 것으로 차 있었고, 내 노력, 내 의지로 가득차 있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었던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내 운명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주님 앞에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이 쏟았던 모든 것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부터 쓰레기처럼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름다운 보석들이 각각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 갑자기 영롱하고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들어오자, 이제까지 광채를 빛내던 모든 보석이 빛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참된 인생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삶의 새로운 목표를 발견합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기쁨. 뜨거운 감격, 가슴 깊은 곳에 저미도록 스며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알 수 있는 넘치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사합니다.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감사합니다./ 감옥에서 저미어오는 매맞음의 통증을 끌어안으면서도 감사합니다./ 살 소망이 끊어진 자리에서도, 지금의 고난은 장차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며 감사합니다./ 그는 신약 13서신을 기록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성도들에게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이 전천후의 감사는 바울의 삶을 능력 있는 삶으로! 승리하는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의 삶에 감사가 잃어가고 있습니까? 왜 예전보다 더욱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우리에게 감사보다 불평과 짜증이 많아집니까?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감사거리를 찾지 못하게 만듭니다.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빼앗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하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린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욕심의 이끌려 살지 않고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은 환경이 불리하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여건이 좋지 않다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문제가 내 인생길에 장애물처럼 가로막고 있다고 풀 죽어 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모든 환경과 여건과 문제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상황이나 여건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 하박국 선지자처럼 “오직 나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이렇게 한번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18세기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가 이런 아름다운 기도시를 남겼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주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을!" 오늘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디 이 감사의 계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함으로 감사를 회복하시고 행복한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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