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을 대할 때마다 눅22:14-23. 2013년 11월24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3-11-24 |
조회: 1425
어떤 사람이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의 왕국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 그는 "여러분, 당신들은 내 건물을 빼앗아 갈 수도 있고, 내 공장들을 불사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 재산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나의 중요한 참모들만 주면 잃어버린 왕국을 재건하겠습니다." 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건물이나 공장이나 재산이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을 더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정말 온통 주님의 관심은 제자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얼마나 생각이 많겠습니까? 내일이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주님은 3년 동안 함께 생사고락을 하던 제자들에게 만찬을 베풉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성찬식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갖던 중에 있었던 대화입니다. 최후의 만찬에 대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분위기는 매우 무겁고 침통한 것입니다.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모진 고문과 수모를 당하신 후에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비통한 모습으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 이는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거 동락을 했던 가룟 유다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스승을 배신하여 팔아먹은 유다는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더 슬픈 것은 우리 주위에서도 유다처럼 은인을 배신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는 것입니다. 배신당했을 때에 마음이 더 아픈 것은 배신하는 사람이 보통은 가장 가까운 사람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배신자라는 단어 자체가 배척이라는 의미의 '背'에 믿음이라는 의미의 '信'이 합쳤습니다. 즉 믿음을 저버렸다는 의미이니까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당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배신을 두려워하여서 항상 측근을 경계하면서 삽니다. 극단적인 예가 광해라는 영화를 보면 아무도 믿지 못했고 잘 때에도 궁궐을 여러 개 마련해놓고 당일까지 어느 궁궐에서 잘 것인지를 아무도 모르게 하지 않습니까? 사업하면서도 배신을 두려워하여서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정보는 감추기도 하고 배신의 기미가 보이면 가차없이 잘라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가 배신하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돈 관리를 맡긴 것도 유다에 대한 신뢰를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역을 할 때에도 유다에게도 다른 제자와 마찬가지로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고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배반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고 사랑하고 믿어 주어야합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첫째로 우리가 오늘 이 성찬에 동참을 하지만, 내가 이 예식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느 누구가 자신의 의로 자신의 공로로 이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먹고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떡을 들고 잔을 마실 때마다 나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은 목숨인데, 내가 누구 때문에 죄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깊이 생각을 해야합니다. 나의 삶, 나의 사역, 이 모든 것을 통 털어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주님을 높이는 것과 연관이 되지를 않는다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 나는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을 마음에 두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주의 주신 이 넘치는 은혜 앞에 회개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은혜 앞에 섰다면 그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은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한 성찬을 통렬하게 꾸짖습니다. 그리고 당부합니다. 성찬을 대할 때, 고전11: 28-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자기를 살피라는 말은 자기의 죄와 허물을 살피고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조그만 죄와 허물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죄를 짓는 것도 무서워해야 합니다. 한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입으로는 대단히 요란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찬송하지만, 마음속에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우상들이 자리잡을 수 있는데 그것이 돈입니까? 쾌락입니까? 야망입니까? 아니면 이 인간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목적입니까? 이 우상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면 나도 모르게 잘못되고, 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적 타락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은 없습니까? 또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진 않습니까? 하나님께 불평하진 않습니까?
이 "자기를 살피라!"는 말은 "남의 허물보다는 자기의 허물을 크게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남을 판단하지 않게 되고, 결국 주님의 판단을 받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나 판단하지 않는 소극적인 삶보다는 적극적으로 칭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칭찬하면 칭찬 받는 대상은 물론 칭찬하는 사람에게도 치유와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고, 또한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비판보다는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십시오. 저 사람의 스타일이 나와 다른 것은 오히려 축복 받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스타일과 다양한 체험들이 사랑과 칭찬 안에서 녹아질 때 오히려 우리는 더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성찬을 대할 때, 그 성찬의 은혜 앞에 섰다면 섬김의 삶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은혜스럽고 기쁨이 넘치는 성찬 예배를 드렸다면, 인류의 영원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성찬 식탁은 얼마나 벅찬 감격과 주체할 수 없는 은총의 현장이겠습니까? 이 땅을 살아간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께서 직접 인도하는 성찬에 참여한 사람은 제자들 12명이 유일합니다. 그런 은혜의 현장에서 제자들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본문 2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그토록 진지한 자리에서 제자들은 은혜의 폭포수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권력투쟁을 했습니다. ?다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필로네이키아(φιλονεικια, philoneikia)?는 ?좋아하다, 사랑하다?란 뜻의 ?필로스(φιλο?, philos)?와 ?싸움?이란 뜻의 ?네이키아(νεικια, neikia)?의 합성어입니다. ?논쟁하기를 아주 좋아하다?의 뜻입니다. 즉 제자들은 이 싸움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도 여러 번 했고, 지금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서 24절은 ?또(also)?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25-2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
그 상황에서 보통사람 같으면 ?내가 삼년이나 데리고 다니며 가르친 사람들이 겨우 이 정도라는 말인가?하며 한숨을 쉬거나 호되게 닦아 세울 법도 한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어떻게 다른 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보세요. 제자들은 누가 좌의정, 우의정을 할 것인지로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닌 보상을 충분히 받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들은 자기를 주인으로 삼고 다른 사람들은 종으로 삼으려고 하고, 권력자들은 자기들이 마치 은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반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권력을 쥔 사람들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언제나 대접을 받아야 하고 남은 불편해 해도 상관없지만 자기는 불편하면 안 되고, 마치 자기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를 포장합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주님은 이 성찬석상에서 무엇을 하신지 아십니까? 요13:3-4절에 보면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던 예수님께서 그렇게 진지하게 말씀하셨음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자리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몸으로 섬김에 대해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씻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구두나 운동화와 같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샌들과 같은 신을 신었습니다. 양말도 신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팔레스틴은 비가 적게 오는 지역이라 먼지가 많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의 발은 더러움과 역겨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가서 대야에 물을 떠오시고, 그 앞에 무릎을 꿇으시는 예수님은 결코 스승의 모습이 아닙니다. 완전히 종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당황하며 만류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제자들이 서로 그렇게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마음으로 서로의 부족한 부분, 추한 부분, 감추고 싶은 부분, 버리고 싶은 부분을 도와주며, 섬기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의 공생의 삶을 ?나의 모든 시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표현이 아니라 제자들이 보기에 그렇게 보였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따뜻하게 대접을 받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을 위해서는 떡 다섯 조각,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였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빵 한조각도 만드신 일이 없습니다. 여러 병자들을 고쳐서 집으로 돌려보내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하셨지만, 정작 예수님은 쉬실 곳이 없어서 찬바람을 맞으시며 산에서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그렇게 쉽지 않은 삶을 ?모든 시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떠나지 않고 함께 했다고 하셨습니다. ?함께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디아메노(διαμενω, diameno)?인데 이것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머물다?입니다. 제자들이 공생애 초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음에도 함께 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28절을 느낌을 가지고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동안 나와 함께 한다고 고생이 많았지? 끝까지 함께 해 줘서 정말 고맙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29-3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지금 제자들의 모습은 형편없고, 아주 보잘 것 없습니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앞으로 당신이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 또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를 가장 진지한 자세로, 반복해서 말씀하셨음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한 자리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주저함이 없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이제 제자들에게 맡기신다는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 세상에서 큰소리치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은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나라와 거기에 속한 자리는 유한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자리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약속처럼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제자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은혜 앞에 선자들은 고전11:26절의 말씀처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과거 2,000년 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현재 우리의 사명을 다짐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우리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그들을 천국의 백성 삼기 위해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터뜨리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는 복음을 위해 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패하고 병든 세상과 족속으로부터 생명을 건지는 일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만드는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천방지축 같은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마신 이들은 더 이상 세상 가치에 인생을 걸지 않았습니다. 12제자들을 보세요.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는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된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빌립은 북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A.D. 54년에 십자가에서 처형됐습니다. 마태는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에서 사역하다가 A.D. 60년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일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십자가 못박혀 죽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몸이 찢겨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거꾸로 못박혀 죽었습니다. 야고보의 형제 다대오 A.D.72년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바돌로매 역시 폭행을 당한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가롯유다 대신 뽑힌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매질을 당하고,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요한은 기름이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달아났습니다. 그 후 도미티안 황제에게 붙잡혀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고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지금 성찬을 통해 생명의 보혈을 마시고 생명의 살을 나눈 저들이 지금은 정말 형편없는 자들 같지만, 장차 이 땅에 이들을 통해 주의 나라가 확장될 것을 믿었습니다. 성찬 공동체는 하나되는 공동체입니다. 생명을 나누고 주를 위해 삶을 기꺼이 드리는 공동체입니다.
알렉산더가 4만의 군대로 이수스에서 당시 40만의 다리우스 군대를 쳐부순 것도, 중국 공산당 의 초기멤버인 정강산의 23인의 동지가 장개석의 국민당을 제압하고 10억 중국을 접수할 수 있었던 비결도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그들이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는 세상의 기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 보혈의 능력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영광과 능력과 권위는 초대 교회 교인들의 헌신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글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입은 절대적인 헌신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아침! 우리는 감히 우리 스스로는 이 성찬에 초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베푸신 은혜의 성찬에 나와 이 세상의 최고의 만찬을 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모을 상징하는 떡을 뗄때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대할 때, 도대체 내가 누구이길래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터뜨려 나를 구원의 자녀로 삼으셨는가 깊이 생각하며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시한번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사함의 은총과 구원의 확신을 통해서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이 땅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이 생명의 떡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하는 축복의 성찬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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