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이 행복한 삶입니까? / 요12:23-26. 2013년 12월 1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3-12-01 |
조회: 1557
병자호란을 아십니까? 1636년 병자년, 12월 14일에 조선의 임금인 인조는 청나라의 침략을 피해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그곳에 머무는 47일은 가장 혹독하고, 치욕스러운 겨울이었습니다. 한 겨울이라 가진 것도, 먹을 것도 변변치 못합니다. 그렇다고 나가서 싸울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인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종묘와 사직을 위해 결사항쟁을 하다가 장렬하게 죽자는 척화파 김상헌이 있습니다.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항복해서 살아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주장 사이에서 인조는 번민을 거듭합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결국 인조는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맙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고민을 하고 살아가십니까? 500여 년 전 청나라에 포위된 체 고민했던 인조 임금의 고뇌가 오늘 우리 삶 가운데 그대로 이어집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결정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척화파의 김상헌처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대의명분을 위해 바른 길을 가야한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승산이 없는 상황이라면 항복을 하고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화파의 최명길의 입장에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의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과 편안함을 위한 길이 있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을 씨앗에 비유한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 앞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많은 이적들 중에서 최고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은 각종 병든 자 고치시고, 시각장애인을 눈 뜨게 해 주시고, 귀신을 쫓아 주시고,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살린 사건은 죽은 지 무려 나흘이 지난 후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죽은 자를 살려도 가사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둥 허튼 소리를 하면서 안 믿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지 4일이 지나서 시체에서 냄새가 진동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많은 조문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인데 어찌 부인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번 경우는 전혀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그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마침 그 때가 유월절 명절이 가까운 시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객의 인파가 그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300만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며 성이 떠날 정도의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바리새인들도 1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3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고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때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간청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이 헬라인도 로마에게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아닙니까? 아마 이들이 찾아온 것은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사람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한번 예수와 손잡으면 옛날의 나라를 회복하리라는 비장한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23절에 비로서 당신의 마음속에 품었던 이야기를 꺼내 놓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아마도 그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3년 넘게 죽은 듯이 지내시지 않았는가? 조롱도 받고, 수모와 괄시를 얼마나 받으셨는가? 이제 드디어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 앞에 능력을 보이시고 세상의 권세를 무릎 꿇게 하시는구나. 세상 앞에 보란 듯이 천군천사를 동원해서 로마 군인을 몰아내고 로마의 앞잡이 헤룻의 무릎을 꿇게 만드시는구나’하는 기대감에 모두가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24,25절을 보면 이 백성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씨앗 이야기”를 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은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했을까요? “너희들이 요구하는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하나님나라의 영광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영화로운 상태를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영광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상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이 노벨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영광스럽다고 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칭송하는 것에 대해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남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고, 남이 얻지 못한 승리를 얻을 때 사람들은 영광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광, 성도의 영광, 하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이루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일들은 세상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각오가 없이는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도 죽어야 다시 삽니다. 요즘 김장철이라 바쁘시죠? <김치의 법칙>이란 글이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치입니다. 그런데 맛있는 김치가 우리 입 속에 들어올 때까지 적어도 5번 이상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땅에서 뽑힐 때, 칼로 배추의 배를 가를 때, 소금에 절일 때, 매운 고추와 젓갈 마늘의 양념에 버무려 질 때, 그리고 입 안에서 씹힐 때입니다. 배추는 5번이나 죽음을 거쳐 비로소 우리 입 안에서 김치라는 새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이란 맛을 내기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죽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자기 입맛대로 길들이려고 하면 갈등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아내가 남편을 자기 맘대로 조정하려고 하면 분쟁이 생깁니다. 서로 자신의 감정과 뜻을 죽이면 행복한 맛이 살아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 죽으면 삽니다. 부모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죽이고 자녀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서로 소통이 됩니다. 행복한 관계를 이룹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자기 뜻대로 주장하거나 가르치려고만 하면 관계가 악화됩니다. 자식도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좋은 관계가 됩니다. 그러나 불순종하고 자기 멋대로 하면 갈등이 생기고, 상처가 됩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남을 위해 섬기고, 자신이 죽으면 남을 기분좋게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인정받고,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항상 자기중심적인 사람, 남을 이용해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눈총을 받습니다.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직장에서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와 성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도 똑같습니다. 내가 죽으면 상대방이 편합니다. 내가 죽으면 상대방이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으면 자존심이 살아나고, 열등감이 살아나고, 교만함이 살아납니다. 결국은 서로를 찌르고,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바로 김치와 같이 죽어야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변명하고 싶어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따지고 싶을 때 다 따질 수도 없습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목사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는 누군가가 창으로 가슴을 푸욱 찌를 때 그때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억울하다고 변명하거나 아프고 힘들다고 그 창을 뽑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창을 부여잡고 십자가를 생각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창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녹여내면 결국 하나님께서 문제를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사가 승리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저의 모습을 보면 참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나도 모르게 원망이 나옵니다. 속이 상해서 잠 못 이루기도 합니다. 내가 십자가 앞에 온전히 죽지 못하고 내 욕심이, 내 뜻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고백합니다. 우리가 암송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존재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의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였는가?’입니다. 내가 얼마나 죽었는가를 보면 내 신앙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은혜를 받고, 은사를 가졌다 할지라도 아직도 내 안에 혈기가 죽지 않고, 내 고집과 내 주장이 살아있다면 더 엎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밀알 신앙의 소유자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25절 보세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여기서 생명은 헬라어로 푸시케인데 목숨이라는 일반적 의미 이외에도 ‘자아’ ‘뜻’ ‘의지’ ‘소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은 우리의 뜻이나 소원을 부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렇게 힘들게 나오셔서 설교를 듣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과연 이 설교를 듣고 어떻게 반응을 하십니까? ‘인생은 해석이다’라는 말을 아십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들려진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입니다. 이 부분에서 실패한 대표적 인물이 삼손입니다. 삿16:20절에 “드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불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어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
삼손은 이미 하나님이 떠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가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영적 둔감함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복을 복으로 여기며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그 둔감함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 이는 자기에게 있는 죄의 소원 욕망의 소원을 죽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얼마나 신앙생활에 치명적인지 아십니까?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도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영적 민감함으로 늘 날을 세우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썩어지는 밀알의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요하지 않는 일, 민감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는 둔감하고, 민감해야하는 부분에서는 민감해야 합니다. 외모에는 좀 둔감해도 좋습니다. 연예인 가십거리에는 둔감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는 민감해야 합니다.
WEC 선교회를 창설한 C. T. 스터드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의 옥스포드 출신으로 재벌가 집안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자 평생 복음을 위해 살기로 작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살았고, 나중에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 그가 나이가 들어 임종을 눈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 온 것 같다. 이제 돌아보니 즐거웠던 몇 가지 일이 생각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중국에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 가족들은 다 반대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결단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것,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즐거운 추억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이 있다. 부자 청년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나에게도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유산 받은 것을 선교를 위해서, 가난한 자를 위해서 다 흩어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유쾌한 추억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 앞에 펼쳐질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두고 가는 것이 아까워서 눈을 못 감는 사람에 비해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까?
그분이 섬겼던 WEC(국제복음선교회)의 본부가 영국의 런던에 있습니다. 그 WEC 본부의 지하실에 내려가면 수십 개가 넘는 가방들이 바닥과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된 채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임기를 마친 뒤 귀국 길에 찾아가겠노라고 남겨둔 가방들입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님들의 가방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남아있는 가방들 - 바로 그 가방들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위한,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 자기 헌신의 표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방의 주인들이 어느 곳에서 생을 마감했건, 그들이 있었던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 주기에 합당한 참된 십자가의 증인들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남긴 가방은 단순한 가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이 남겨진 참 생명의 흔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란 결국 삶이란 하나의 가방으로 남게 됩니다. 지금껏 여러분들께서 꾸려온 가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기희생과 헌신의 표적입니까?, 아니면 자기 욕망과 이기심의 결정체입니까?
26절 말씀을 다 같이 읽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는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삶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자입니다. 자신을 낮추어서 상대방을 높여주고, 존귀하게 여기 줄 아는 자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일군은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을 따르는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주님과 동행하며 썩어지는 밀알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내가 죽어서 남을 살리는 자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만 다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피어납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기억됩니다. 우리는 생일을 기억하지만 실상은 죽는 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죽느냐가 그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절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병자호란의 아픔을 서두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조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죽어서 살 것인가(我死卽生), 살아서 죽을 것인가((我生卽死)?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오늘 우리도 이 질문 앞에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잠깐의 편안함과 유익을 위해서 살다가 후회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지금은 좀 힘들고 어려워도 아름다운 인생의 마무리를 위해 고난 받기를 기뻐할 것인가? 이 결단을 후회 없이 하는 자가 정말 행복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나의 사명을 고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 한 해의 끝자락에서 우리들, 다시 한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정말 정망 후회가 없는 삶, 그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임을 깨닫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삶과 죽음을 걸고 응답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외칠 그런 고백이 있습니까? 이제 그 사명을 고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명에 기꺼이 희생과 인내로 응답하시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주의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