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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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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결산 딤후4:6-8. 2013년 12월 8일 주일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3-12-08 | 조회: 1930
12월의 길목에 들어서는 이 한 주간은 저에게 죽음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지난주일 저녁에 저의 장인어른과 우리와 함께 동역하던 사랑하는 김란 집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특히 김란 집사님의 죽음은 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인간의 무력감에 대한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김란 집사님의 건강회복을 위해서 시간마다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건강하게 회복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와 슬픔과 고통을 그치게 하시고,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부르셨습니다. 슬픔당한 유족들과 함께 기도한 동성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히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오늘 죽습니다. 그 죽음의 그림자는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란 실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그것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책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두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하루의 삶 속에서도 많은 죽음을 목격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든지 간에 죽음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월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인 김달진 님은 “60세에는 해마다 늙고, 70세에는 달마다 늙고, 80세에는 날마다 늙고, 90세에는 시마다 늙고, 100세에는 분마다 늙는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세월 따라 늙어가는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이라는 그림자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바울 사도를 만납니다.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소망을 노래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죽음을 바로 앞두고 한 고백입니다.

6절에 나오는 ‘전제(a drink offering)’는 제물이 타 타고 마지막에 그 위에 술을 부어서 드리는 제사로 바울이 자신의 순교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자신의 몸을 주님의 제단에 드릴 순교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음 앞에서 주저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여기 7-8절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어떻게 사도바울은 순교를 앞에 두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1.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디모데 전. 후서는 바울이 교회에게 쓴 것이 아니라 디모데에게 개인적으로 쓴 편지입니다. 그러데 자기 제자인 디모데에게 자신이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꺼냅니다. 딤전1: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 사도는 아무리가 생각해 보아도 자기가 하나님의 직분을 맡은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선교여행을 통해서 이루어 놓은 업적을 생각하면 교만할 법도 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부족한 나를 충성 되이 여겨주셔서 직분을 맡겨주셔서 감사하다’ 이 말씀은 자기가 충성했기 때문에 사도라는 직분을 주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어리석고 미련한 자신을 충성되다고 인정해 주셔서 일군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3절에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자기 제자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자기가 과거에 행했던 부끄러운 일들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지난 날 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드러내며 자기 제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믿어 주셨기에 가능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서라도 그 믿어주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시고,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신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이 믿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자기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실토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쳐들고 자기 공로를 이야기할 만도 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수고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합니다. 참, 겸손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렇게 자신을 믿어 준 그 시실을 알 때 한 생을 다 쏟기까지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 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7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 말씀에는 같은 의미의 세 가지 내용이 하나로 묶여있습니다. 바울의 일생을 요약하는 세 마디: '싸웠고, 마쳤고, 지켰노라'가 나옵니다. 이는 그가 살아오면서 신앙인의 삶의 자세, 그리고 삶의 목표, 더 나아서 그 속에서 흔들림이 없는 자기 내면의 영적 자세가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고백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인으로서 삶에 최선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솝의 우화 중에 사냥 잘하는 들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들개는 너무나 빨라서 어떤 짐승들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토끼를 쫓다가 놓치고 말았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다른 짐승들이 놀려댑니다. “야 발 빠르다더니 별거 아니구나. 이제 그 실력도 녹슬었구나. 앞으로 어디 제대로 먹고 살겠니” 이 때 들개가 이렇게 해명을 했습니다. “그 놈의 토끼는 목숨을 위해 뛰었고, 나는 저녁식사나 하려고 뛰어서 그래”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당해내기가 힘이 듭니다. 어떤 일을 맡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그들이 일을 냅니다. 반면에 능력이 있고.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일을 낼 수가 없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금년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셨습니까? 우리의 여건을 탓하기 보다는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에서 핑계거리를 찾기보다는 최선을 다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어떤 일을 맡았든지, 또한 어떤 상황 속에 놓여있든지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지 못한 인생들이 나옵니다. 딤후 4: 9절 이하를 보면 정반대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10-11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니 이제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난 '데마'와 갈라디아로 간 '그레스게,' 그리고 달마디아로 가버린 '디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시련에 처한 바울을 지켜주는 사람은 오직 누가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6절에 보면, 바울이 로마 관리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아무도 자기와 함께 있지 않고 자기를 버렸다고 탄식합니다. 데마, 그레스게, 디도, 알렉산더, 이들이 누구입니까? 한 때는 바울의 제자요 동역자로서 예수를 잘 믿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자 예수와 바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 속으로 돌아가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한 싸움을 중단하고 악한 싸움에 휘말려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달려 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지 못한 채 중간에 기권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의 지조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단지 바울 곁을 몰래 도망쳐 버린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못된 짓을 노골적으로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14절에 나오는 구리장색 알렉산더로서 바울에게 큰 해를 끼쳐서 바울이 주님이 대신 원수를 갚아주실 것을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14절은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라고 말씀합니다. 구리 장색이란 옛날에 구리로 우상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이 우상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로 인하여 장사에 막대한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바울을 심히 괴롭혔습니다. 바울에게는 그의 목회사역을 방해하던 아주 원수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괴롭히던 사람들에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희에게 갚으시리니" 하며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내가 더 이상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너희도 저희를 주의 하라"고 얘기할 뿐입니다.

오늘 이 아침 모인 우리는 오늘 나의 신앙의 결산을 갖게 된다면 과연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있는지 아니면 출발은 좋았는데, 끝이 변질 되지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2. 내게 주어진 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여기 "싸웠노라, 마쳤노라, 지켰노라!" 하는 말은 진리 사수를 위한 양보 할 수 없는 전투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 속에는 우리의 마음으로 다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 11절에 보시면 누구를 데리고 오라고 디모데에게 부탁을 합니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가 누구입니까? 마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었고 사도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 따라 갔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병에 걸려 보름정도 꼼짝 못하고 고생하였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마가를 간호하느라고 애를 썼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병이 겨우 완쾌되자 무슨 까닭인지 사도 바울과 동행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때 바울은 몹시 당황스러웠고 섭섭했었습니다.


그 후 2차 전도여행을 다시 떠나려 할 때 마가는 바울을 찾아와서 동행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마가가 이번에는 도중하차하지 않고 끝까지 동행할 것을 아무리 맹세를 해도 사도 바울은 끝내 허락하지 않고 거절하였습니다. 이 일로 이번엔 마가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최후의 날이 가까워 오자 바울은 마가와의 일을 괴로워하며 매우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이 시간 그를 만나 화해도 하고 또 그를 격려해 주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마가를 데려오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결산이 다가올 때 꼭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찾아가서 화해하고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서로의 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꼭 만나서 화해하고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은 없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이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롬13:11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용서의 첫 단계는 상대방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한 것을 알고도 상대방을 덮어주려 할 때에 상대방은 비로소 변하게 된다고요."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에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들의 죄를 사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도 자유지만 저들에게도 자유를 주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았던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을 때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의 하는 짓을 저들은 알지 못하옵니다"하고 죽었습니다. 저들을 용서해 줌으로 스데반도 용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들도 나중에 회개하고 자유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 용서를 통해 바울이 변한 것입니다. 귀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버킷 리스트’ 라는 영화에 보면 자동차 정비사 카터와 재벌사업가 에드워드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같은 병실을 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리스트를 만듭니다. 세렝게티에서 사냥하기, 문신하기, 카레이싱과 스카이다이빙, 눈물 날 때까지 웃어보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등. 두 사람은 병실을 박차고 나옵니다. 두 사람은 리스트에 있는 내용을 실천하면서 가족과의 화해와 삶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시한부 인생이 된다면 내 인생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는 무엇입니까?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허둥거리는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내 인생의 시간을 의미 있게 채워야 합니다. 덧없이 흘러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 말씀도 하나의 비유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면류관”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면류관”이란 말은 원어로 “스테파노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고대 올림픽에서 우승자에게 주어지던 올리브 나무 가지로 만든 관을 말합니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우승자 한 사람에게 신전 곁의 올리브 나무 가지를 꺾어서 관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그는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자기 나라에서 영웅일 뿐 아니라 온 그리스 세계에서 최고의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돈을 받거나 토지를 받는 등 물질적 보상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 영예일 뿐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모든 사역을 마치고 최선의 경주를 끝내고 한 가지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저는 자랄 때 내성적이었고 참 소심한 편이었습니다. 숫기도 없고 뭐하나 적극적이질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통 칭찬을 받아보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숙제 하고 나면 선생님께서 숙제를 한 공책에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참 잘했어요!”가 새겨진 도장입니다. 어떤 때는 그 위에 빨간 색연필로 별도 몇 개씩 그려주셨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 도장을 한번 보고 또 보고 했습니다. 그 도장 받을 기대감에 집에 오면 제일 먼저 숙제부터 했습니다. 별까지 받아보려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기대하며 오늘 내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대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결산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때 둘 중의 하나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칭찬 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께 칭찬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해를 지는 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보내야 할 시점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신앙의 결산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해의 불성실과 거짓됨을 안고 새해로 가지 마십시다. 내 인생을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제는 지난 날 과거에 메이지 말고 오늘, 바로 오늘 정말 진실하게 성실하게 사십시다. 비전을 이루는 일에 성실하십시다. 하나님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일에도 이제는 성실하고 진실하십시다. 사람들 앞에서도 그 초라한 모습 벗어 던지고 진실하고 성실하십시다. 당신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존경받고 존귀함을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코 허공을 치는 무익한 경주가 아닙니다. 경기에 우승한 선수들이 상금과 메달과 트로피를 받듯이 우리 역시 심판장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로마의 쥴리어스 씨이저는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인생 경주를 다 마치게 될 때 어떤 말을 하시겠습니까? 바울처럼 말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싸웠노라, 마쳤노라, 지켰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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