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과 나눔과 실천 요일 3:13-18. 2013년 12월 15일. 주일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3-12-15 |
조회: 1553
'경색(梗塞)'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습니까? 경색이란 우리 몸 안에 있는 혈관이 혈전 따위로 막히는 것을 말합니다. 경색이 무서운 것은 결정적인 고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정상처럼 보이다가 일단 조짐이 시작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차가운 길거리에서 철도민영화로 노조간의 한치의 양보없는 일로 얼마나 경색되어 가고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나라와 중국과 일본의 영토 문제는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합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경색의 혈관이 꽉 막혀 신음하고 있습니다. 막히고 닫힌 사회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회의 곳곳에 막혀 있는 혈전을 녹이고 뚫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 사회가 동맥경화증에 걸리지 아니하고 건강한 피의 순환을 촉진하는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본문은 그러면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젊은 날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인물인지 모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한 마을을 성두리째 불을 싸지를 만큼 과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훗날 사랑의 사도로 변화를 받습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이 요한일서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도요한의 말년에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교훈을 달라고 애원하자 “내게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밖에 줄 교훈이 없다”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본 본문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 “그가”는 누구를 말합니까? 오늘 이 서신서와 함께 쌍둥이 복음서인 요한복음 3:16절에 ‘그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 독생자- 바로 예수를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나 하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단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게까지 하시면서 나를 구원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주셨다는 이 말은 우리 한글 성경이 너무나 단순하게 번역을 해놓아서 ‘주고받는다’ 할 때의 그런 단순한 의미만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셨다는 '표현을 '샤워하다(shower)'라는 것으로 하는 것이 원문의 뜻을 드러내는 데 보다 적절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샤워하면 흔히 몸을 씻는 것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샤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가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아무 자격도 없는 내가 그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마땅하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페일로멘”(opeilomen)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뜻입니다. 여기 “사랑하라”는 말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의무적인 실천사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17절을 보세요.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모두 빚진 자입니다. 그럼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빚을 졌습니까? 그건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평생을 갚아도 값을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빚을 우리는 하나님께 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그 생명의 빚을 너무 자주 잊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우리가 생명 얻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는 의당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의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잊기 때문에 사랑과 생명의 빚진 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며 삽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꾸어 얻은 귀한 생명인데, 우리는 그 귀중함을 잊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중의 한 명인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그런 분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1885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선교활동을 하던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1902년 6월 11일 호남지역을 선교하기 위해서 군산항에 도착할 즈음, 선교사님이 타고 가던 배와 다른 배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 충돌사고로 이화학당에 다니던 여학생 두 명이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아펜젤러 선교사님은 그 여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고, 결국 한국 최초의 선교사였던 아펜젤러 선교사님은 마흔 넷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며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아펜젤러는 총명하고 잘 생긴 사람이다. 미국에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가 낙후된 한국에서 죽은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왜 장래가 보장된 총명한 미국의 젊은이가 박해를 받는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해야 했고, 여학생을 구하려다 귀중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불모지인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한 것도, 그리고 마흔 넷의 젊은 나이에 바다에 빠진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것도 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다에 빠진 여학생을 구하려다 자신의 목숨을 잃는 순교의 자리에 서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빚진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섬김의 자리, 나눔의 자리에 기꺼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람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채권자형으로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채무자형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①. 채권자형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아이들 가운데도 부모님이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부모님이 자신을 낳았으니 길러주시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지 부모님을 졸라서라도 얻어내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자라다보니 나중에는 자신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다고 부모님을 살해하는 경우까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기를 때에 부모가 자식에게 해 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부모님의 은혜를 알도록 해줘야 합니다. 채권자형으로 사는 사람은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직장이 자신을 먹여 살려줄 책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신이 수고한 것도 있지만, 자신이 일한 것에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채권자의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하면 많은 문제가 야기 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노사문제가 잘 풀려지지 않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채권자형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이 모두 채권자의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회사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하는 대신 투쟁을 해서라도 더 받으려고 합니다. 자신을 뽑아 일하게 해 준 것에 대한 감사는 다 잊어버리고 받아야할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채권자형으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언제나 불평 속에서 살아갑니다. 채권자형의 자식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충분히 베풀어 주지 못한다고 불평합니다. 채권자형의 마음으로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수고한 것에 미치지 못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평이 생겨나고 불만이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됩니다. 거기에는 기쁨이나 고마움이 없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채권자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에 무조건 응답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에 응답해 주시되 꼭 자신이 요구한대로 응답해 주셔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섬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여러분, 채권자형으로 인생을 살지 마십시다.
채권자형과는 반대로 채무자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채무자형의 사람은 ‘나는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도 빚을 지고 있고, 친구들에게 빚을 지고 있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교회에 다녀도 교회와 교우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으로 다니고, 하나님 앞에서도 늘 빚진 사람처럼 -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직장을 다녀도 빚진 마음으로 일하면 일하게 해 준 것에 감사하고, 더 열심히 섬기지 못해 미안하고, 그런 자신을 계속해서 일하게 해 준 것에 감사하며 직장생활하게 됩니다. 그래서 채무자형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자신이 더 베풀지 못하고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해서 늘 안타까울 뿐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이나 교회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미안할 뿐이고 감사할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속한 사람입니까? 채권자형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채무자형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채무자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신앙인입니다.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기에 그 크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모님께서 내가 기대한 것만큼 내게 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모님의 한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 아니면 누가 당신을 구제하겠어. 나에게 고맙게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당신이 나 같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결혼해 주었으니 감사할 뿐이지요. 당신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평생 장가도 못 갔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야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이구요. 여러분, 아직도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지 못해서 뭔가에 갈급해 하며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채권자형의 사람은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고, 칭찬 받고 싶어 합니다. 허전한 마음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채무자형의 사람은 작은 것으로도 마음이 가득 채워집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됩니다. 작은 것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무엇인지를 기쁘게 고민하며 삽니다. 형제들과 이웃에게 더 베풀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삽니다. 그게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게 복 받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받을 때보다 줄 때에 더 행복합니다. 채권자형의 사람은 사랑을 베풀 때에 느끼는 그 진한 감동을 알지 못합니다.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욕구불만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들과 갈등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마음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모두가 사랑에 빚진 자란 의식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제 다음 주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우리 곁에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실 때,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이 있었습니까?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 만유의 주 하나님의 외아들이 어떻게 처녀의 태속에 들어갈 만큼 낮아지실 수 있단 말입니까?
마르틴 루터의 표현대로 한다면 가난하고 비루한 시골처녀 마리아, 겨우 나이 열서너 살 먹은 처녀의 자궁 속에 들어갈 만큼 작아지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태어날 때 왕궁에서 난다든지, 황금 침상이나 요람에 누워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 짐승들이 잠자는 축사에 들어가 말이나 소의 먹이통, 구유에 누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말하길 ‘우리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 아들에게 우리 인류가 최초로 준 선물은 구유였으며 마지막으로 준 선물은 십자가였다’고 했습니다. 정말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주님은 오히려 이 땅에 섬기로 오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사회는 곳곳에 경색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노동패널 조사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 이후로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고, 경제활동인구 1만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건강불평등에 따른 소득격차도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양극화의 흐름이 지금처럼 지속된다면 언제 사회적인 뇌관이 터져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을지 모릅니다.
사회의 곳곳에 막혀 있는 계층간의 혈전을 녹이고 뚫는 것은 베풂에 있습니다. 주는 삶, 베푸는 삶은 우리 사회가 동맥경화증에 걸리지 아니하고 건강한 피의 순환을 촉진하는 최고의 명약입니다. 나눔은 사회 경색의 원인인 물질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이기도 합니다. 사회의 수준은 사람들의 물질관에 비례하는 법입니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인생의 격과 질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바른 물질관을 동기부여하는 섬김과 나눔이야말로 경색으로 막혀있는 우리 사회를 살리는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태생적으로 자선과 베풂의 체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풂의 원조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전부인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맨 처음 베푸신 분이시며 가장 후히 베푸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것을 나누고 베푸는 것은 당연지사요 신앙적인 권리이기도 합니다.
베풂에는 기적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를 베풀면 예수님은 거기에 손을 얹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열배 백배의 기하급수적 은혜로 나누시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웠던 오병이어의 사건은 베푸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년 역시 허기졌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숨기고 움켜쥐려는 당연한 욕구와 내면의 유혹을 억누르고 자신의 것을 내어 놓았을 때, 자신은 물론이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의 배고픔이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 소년은 일평생의 삶의 뼈대가 되었을 베풂의 기적을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나눔을 통해 베풂의 정수를 맛보았던 오병이어 소년의 은혜가 양극화라는 경색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에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연말이 되어 더욱 몸과 마음이 시린 어려운 이웃에게 내미는 베풂의 손이야말로 계층간의 꽉 막힌 혈관을 뚫고 이 사회를 소생시키는 생명줄이며, 또한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 교회는 노숙자를 위해 설립된 등대 교회를 오랫동안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양4동에 거주하는 어려운 이웃에게 우리의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몇 해 동안 성탄헌금을 사랑의 쌀 헌금으로 드려서 직접 사랑의 쌀 나누기를 실천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 그 은혜와 축복을 가난한 자들, 사회적 약자와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믿습니다. 이 섬김과 희생을 통해 이 땅에 주님의 평화가 가득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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