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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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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9-14. 2013년 12월 22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3-12-22 | 조회: 1504
이어령 교수가 쓴 ‘지성에서 영성으로’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문사인 ‘워싱턴 포스트’에서 재미 있는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음악을 알아듣는 귀가 있나를 실험한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조슈아 벨(Joshua Bell)에게 거리의 악사처럼 허름한 옷을 입히고 3백만 달러(35억 원)짜리 최고의 명품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워싱턴 데팡스 지하철역에서 연주를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역은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입니다. 처음 그 실험을 계획했을 때에 약간의 걱정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슈아 벨을 알아보고 그에게 사인해 달라고 몰려들면 어찌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슈아 벨의 연주회가 있을 때면 수백만 원에 호가하는 입장권을 사야 들어갈 정도로 그는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침 7시부터 8시 반까지 한 시간 반 동안 조슈아 벨이 허름한 옷을 입고 지하철역에서 연주를 하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가면서도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연주하는 그 아름다운 음악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다들 휴대폰으로 통화하느라 정신이 없고, 바삐 출근을 하느라 걸음을 멈추어 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역 한 모퉁이에서 구두를 닦던 구두닦이 한 사람만이 그 음악을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그 구두닦이도 그가 조슈아 벨인지 알아보진 못했고, 그저 특별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을 뿐입니다.


거대한 연주홀에서 연주회를 개최했다면 그 때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가 몇 백만 원씩 하는 입장권을 샀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주회를 마쳤을 때에는 그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허름한 옷을 입고 지하철역에서 볼품없는 모습으로 연주를 하니까 아무도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비록 볼품없는 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조슈아 벨은 조슈아 벨입니다. 화려한 연주홀이 아닌 연주하기에는 초라한 지하철역이라 하더라도 그가 연주한 음악은 세계 최고의 음악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요? 2000년 전 오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이 참 빛은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가르칩니다. 바로 그 참 빛이신 예수가 이 땅에 와서 5절에 보면 “빛이 어두움을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조슈아 벨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워싱턴의 한 지하철역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는 그렇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셔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 심지어는 “이분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를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음악 깨나 한다는 사람들조차도, 고급 양복을 입고 젊잔을 빼는 소위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도 조슈아 벨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이끌고 그들의 영혼을 책임진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조차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메시야가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던 사람들도 그 베들레헴에서 메시야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성탄주일 아침!!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알지 못했을까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는데 왜 그들은 그 메시야를 맞아들이지 못했을까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탄생하던 그 때, 이스라엘의 형편은 모두가 깊은 절망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땅에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거의 400여년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구약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런 메시야가 절실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그렇게도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바람대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보내주셨는데도, 그들은 메시야를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사회적으로 너무 암울합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절망 중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메시야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메시야는 암흑 가운데 있는 세상에 빛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들의 빛 되심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9-11절에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 빛은 그 비추는 곳에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 빛이 비춰지면 그 빛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요8:12절에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첫째로, 왜 세상이 빛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이유는 여기 5절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죄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 걸어가면 너무나도 잃어버릴 것이 많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이 말한 ‘동굴의 비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사슬에 묶여 동굴 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굴 안쪽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실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가 동굴 밖의 세상을 보게 됩니다.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 동굴 밖의 세상이 진짜이고, 동굴의 벽에 그려진 그림자는 허상일 뿐입니다. 그걸 깨달은 그 사람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알려줍니다. ‘동굴 밖에 빛이 있고,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은 그 빛에 의해서 그려진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그 사람을 죽이고 맙니다.

그림자의 실체를 알려주는데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들이 지금까지 보아온 것 그것만이 진짜라고 생각해버리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플라톤은 예수님보다 약 40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빛이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우리의 어리석음을 설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암울한 자신들의 현실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암울한 현실에 빛을 비춰주셨는데도, 그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여관 주인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얼마나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습니까? 그러나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신 빛으로 오신 예수를 가장 옆에 그토록 가까이 있었던 이 여관 주인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여관 주인이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고대하던 메시야가 자기 집안에서 태어나는 영광이 주어졌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저 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그리스도를 맏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일상적 삶에 매여서 무엇이 우선순위인가를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 내 인생 마지막 역시 그 분 앞에서 어떻게 자신의 일생을 결산할 것인가를 생각지 않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비극이 바로 여관 주인의 비극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생명이 끊어지는 그 순간, 내 목숨이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물지 못할 때 과연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친 채 살았다는 그 후회감을 어떻게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간! 여러분은 일상적인 삶에 매여서 더 중요한 사건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들 마음에 들어오셔서 함께 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들 마음에는 이미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세상 것이 너무 많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둘째로, 세상이 알아보지 못했던 그분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장막을 친다 텐트를 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 실고 있는 곳에 함께 텐트를 치고 사셨다는 말입니다. 버림받은 창녀와 같은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오셔서 그 곳에 천막을 치고 함께 유숙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아무리 우리가 거부하고 발 버둥쳐도 우리에게 오신 이 영광은 변함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성탄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나와 영원히 거하기 위해 임마누엘로 오신 정말 기쁜 날입니다.

이 맘 때면 항상 공연하는 작품이 있는데 「Jesus Christ Superstar」라는 제목의 뮤지컬이 있습니다. 이 뮤지컬 맨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을 못 박았던 가룟 유다가 되살아납니다.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그 혼령이 되살아나서는 돌아다니며 구슬피 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가룟 유다는 ?why didn't you tell me?라고 슬피 울면서 노래합니다. ?왜 당신이 부활한다고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습니까??는 말입니다. ?당신이 말씀만 하셨다면 내가 미쳤다고 주님을 팔겠는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말씀 안 한 게 아닙니다. 얼마나 자주 고난을 이야기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이야기하고 또 다시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것은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주 교회에게, 또는 개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계시록에 보면 말세에 나타날 일곱 교회 모습을 보여주면서 항상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3장에서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하십니다. 세상에 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을 모르실리 없는 주님께서 왜 하필이면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는 당신이 하시는 말씀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깊이 깨닫고 세기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읽어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리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순종해야 할 자리에서 순종하지 않습니다. 겸손해야할 자리에서 낮아지려는 대신 내 욕심을 채우려는 무서운 자가 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토록 메시야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가운데 과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그 당시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행한 성탄의 자세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6개월 먼저 왔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어머니,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제사장이기는 했지만 아주 평범한, 무명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자식이 없어서 외롭게 살다가 이제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구를 이끌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 옆으로 밀쳐 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는데 쓰임 받은 요셉이라는 사람과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10대 후반이거나 아니면 20대 초반의 아주 젊은 나이의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평생 목공소를 경영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시골뜨기 청년들이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의 여러 마을 가운데서도 그 이름이 끼이지 못하는 아주 후진 곳입니다. 따라서 별 볼일 없는 데서 태어나 그저 한 생 살다가 가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 소리를 듣고 찾아온 목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 당시에 목자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천민 중에 하나였습니다. 남의 양떼들을 밤새 지켜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제 이름 석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식자들이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도 바깥 마당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와야 하는 천민들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탄생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좋아하던 시므온이라고 하던 선지자와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를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다 초라한 사람들이요, 평생 외롭게 산 사람들입니다. 안나 같은 사람은 결혼하고 7년 만에 과부 된 후고 84년 동안 아무 혈육 없이 그저 성전에서 날마다 심부름이나 해 주고 기도나 하고 먹을 것 없으면 금식이나 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자, 이런 몇몇 사람들이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환영하고 기뻐했다 그 말입니다. 모두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천대받는 사람이요,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들이요, 세상에 무슨 소망이나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이 분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모두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통해서 목자들은 천사를 통해서, 두 노인은 성령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들 메시아가 이 땅에 태어났는데,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났는데 거기에 징조도 없고 계시도 없이 태어나셨겠습니까? 첫 번 성탄에 주님을 만난 분들은 하나같이 하나님 계시를 받고 그것을 순종함으로 이 축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무지한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주님을 위해 바르게 살 수 없고 바르게 헌신할 수 없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 동성 교회는 몇 년에 걸쳐서 성탄에 사랑의 쌀 나눔을 통해 우리 주변에 사랑을 주었습니다. 얼마 전에 태안반도를 가보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부터 5년 전에 충남 태안 앞 바다에서 일어난 원유유출로 그곳 어민들이 얼마나 고통 속에 있었습니까? 우리 교회가 작은 사랑의 헌금과 드렸고 또 현장에 가서 하루 종일 기름에 쩔은 바위 하나하나를 붙잡고 하루 종일 씨름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의 섬김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쪽방에 가서 노숙자들과 함께 식사도하고 그들에게 겨울을 날수 있도록 쌀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이젠 7-80명이 모이는 희망 공동체가 되었고, 얼마 전에는 제직을 세우는 자리까지 서게 되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교회 앞에 그러니까 IMF때 공장의 어려움으로 지방으로 가셨던 화공 약품 공장을 운영하던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이 분은 불교인인데 우리 교회를 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군포에서 이곳까지 사랑의 쌀을 위해 100만원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금 나라가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 사실이지만, 그 여파가 우리의 일상의 삶에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성탄의 계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그 작은 일 마져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를 세상은 거절 했지만, 우리는 생명의 빛을 마신 자들입니다. 그 주님을 영접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 은혜 앞에 섰다면, 그 진리 앞에 섰다면, 이번에도 우리 주변에 구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신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 함께 실천하여 우리의 섬김과 사랑이 이번 성탄절에도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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