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때 잘해. 벧전 4:7-11. 2013년 12월29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3-12-29 |
조회: 1883
얼마 전에 상영된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버킷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불치의 병에 걸린 두 노인, 콜(잭 니콜슨)과 카터(모건 프리먼)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목록을 작성합니다. “스카이다이빙 하기” “눈물 날 때까지 웃기” “장엄한 것을 직접 보기” “모르는 사람 돕기”…. 그리고는 주변의 가족과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떠납니다. 이집트에서 도착한 그들은 황혼녘에 눈앞에 보이는 피라미드를 보면서 카터가 말합니다. “천국의 문 앞에 서면 하나님이 질문을 하나 하는데, 그것은 ‘인생의 기쁨을 찾았느냐?’라네.” 이 이야기를 듣던 콜이 자신은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다’고 하자 카터가 다시 묻습니다. “자네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했나?” “자네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했나?”
여러분 어떻습니까? 한 생을 살면서 정말 주변 사람들, 그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인생을 살았습니까? 아니면 아픔과 상처는 주지 않았습니까? 이제 이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한번 자신들을 돌아보세요!! ‘나의 인생이 다른 살람들을 기쁘게 했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고 살아 오셨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에 대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 하실 때가 다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보다 더 큰 위기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이것이 이 땅의 진리라면, 누구나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 한다는 것은 하늘의 진리입니다. 땅의 진리는 우리에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하지만, 하늘의 진리는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금년에 마지막 주일을 맞이합니다. 참 답답한 한해의 끝자락에 있습니다. 아마도 한해의 마지막 주일이지만, 점점 더 힘든 삶 때문에 절망과 낙심의 분위기가 이 땅을 덮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춥고 답답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 한해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던 것을 다 내려놓고 싶고,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2013년도 마지막 주일에 드려지는 이 시간, 나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 정말 후회 없는 결산을 위한 일종의 중간 결산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작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함께 한 본문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 은사를 받은 청지기답게 서로 봉사하라” 저는 이 말씀을 오늘 설교 제목처럼 “있을 때 잘해”라는 주의 음성으로 와 닿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로 함께 부름 받았다면,
첫 번째로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종말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뜨거운 서로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8-9절을 보면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라” 주님께서는 말세에는 불법이 성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요즘 날로 악해져 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뜨겁게”라고 번역된 “엑테네”라는 말은 “열심히” “열렬한”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데, 단어는 원래 이 말은 '잡아늘인다' 하는 뜻입니다. 그냥 보통 열심히 아닙니다. 잡아 늘인다는 것입니다. 여기 고무줄이 있어요.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잡아 늘여요. 스프링의 탄성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까지 잡아 늘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의 영역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얼마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영역, 사랑의 힘을 잡아 늘여!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구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허다한 죄를 덮어요. 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해야 되요.
여러분, 여러분 생애에 한번 이렇게 화끈하게 사랑해 본때가 한번 있지 않았습니까? 한참 뜨겁게 사랑할 때, 정신없이 사랑할 때, 추운 것도 모르고 더운 것도 모르고, 뭐 작으면 작은 대로 좋고 크면 큰 대로 좋고, 실수하면 실수하는 대로 예쁘고, 그냥 무턱대고 마냥 좋기만 한 때가 있었지요? 없었어요? 그러면 불행한 거죠. 그래도 그렇게 한번 미쳐본 때가 있잖아요, 이게 바로 사랑이 잡아 늘여진 사랑이거든요. 그 순간에는 허물이란 없어요. 실수도 없어요. 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자는 피곤함이 없습니다. 허물이 보이질 않아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예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그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삽니다. 이 세상이 다 좋은 것이 많아도 사랑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 인생의 삶을 끝까지 신나고 힘 있게 만들며,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사랑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뜨겁게 사랑하고” 우리 성도들은 열심히 해야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열심히 해야 됩니다. 일을 해도 열심으로, 적당하게 하면 안 됩니다. 사랑도 가만히 되겠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기독교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때 그냥 사랑했습니까? 독생자를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적극적으로 우리를 사랑한 겁니다. 이렇게 우리 쪽으로 적극적으로 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사랑하려면 자녀 쪽으로 가시고,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 쪽으로 가시고,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 쪽으로 가시고,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 쪽으로 가셔서 적극적으로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 자 있을 때 잘합시다. 어떻게요? 서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아-멘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순교자를 꼽으라면, 단연코 손양원 목사님(1902-1950)일 것입니다. 성탄 특집으로 일반 방송을 타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란 제목으로 시청자들에게 심금을 울렸습니다. 우리가 손양원 목사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여수 애양원의 나병환우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주는 천사같은 목자의 이미지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두 사랑하는 아들 동인과 동신을 죽인 학생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들임으로 인해 얻은 별명인 “사랑의 원자탄”의 이미지입니다. 제가 처음 손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손목사님의 무덤이 있는 여수에서였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정말 딴 세상의 사람처럼 보였고, 감히 넘볼 수 없는 성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손 목사님이 남긴 기록을 보고 또 한번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나환자들을 만났을 때에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 진동하는 악취에 코를 막고 괴로워했었다.” 또한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당신의 양아들로 삼아서 함께 밥상을 마주 할 때에, “돌멩이를 삼키는 것처럼 괴롭다”고 솔직한 심정을 동고동락하던 나병환우들에게 털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어쩔 수 없는 인생의 한계로 체념하지 않고, 그 연약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하기 위해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주여 저들이 내 눈에 천사같이 보이게 하옵소서.” 그런 후에 비로소 그들의 피고름을 만졌고, 다시 힘들어지면, 또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고 몸부림쳤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양아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마음속을 비집고 올라올 때마다, “주여, 용서하게 하옵소서. 사랑하게 하옵소서.”라고 절규하며 영혼의 몸부림을 쳤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삶의 능력과 향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이것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남들과 다른 타고난 성품과 능력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에 대한 솔직한 인정,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간절한 부르짖음, 그리고 끊임없이 넘어질수록, 더 매어달리는 기도의 무릎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샘이 흘러넘치기 위해 우리가 있을 때 정말 잘해야 하는 것이 바로 기도의 삶입니다. 7절에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라는 “소프로네사테”는 “분별력을 가져라” 혹은 “마음을 잘 추스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근신하여”는 “침착하다” “냉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넵사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라는 말은 “무엇이 중요한 가, 어떤 상황에서도 분별력을 잃지 말고 정신을 차리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위기의 순간에, 큰 환란이 닥쳐오는 순간에도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이 정말 내가 해야 할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있을 때 잘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감정 조절이 잘 안되서 함부로 상대에 대해 비난하고 정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보니 자기 통제가 안 되고 자꾸 화가 쌓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잃고 사람을 잃습니다. 기도를 호흡이라고 합니다. 우리 신체도 이 호흡을 잘 못하면 신체 기능이 쉽게 상하게 되고 심지어 호흡 곤란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화가 많습니다. 심지어 화병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 아침마당에 황창연 신부가 나와서 이야기 하는데 많은 공감을 하였습니다. 숨을 잘 쉬어야 합니다. 숨을 잘 쉬어야 화를 조절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부부싸움을 할 때 숨을 쉬고 하나요? 쉬지 않고 하나요? 안 쉬고 싸웁니다. 턱에다 걸어놓고 싸웁니다. “당신 말이야 나 시집 올 때 해 준게 뭐 있어! 그렇다고 애를 돌봐 주기나했어! 애한테 동화책을 읽어 주기나했어! 놀이 공원을 가기나했어! 설거지를 한번이나 해봤어!!” 점점 얼굴이 빨게 집니다. - 왜 그렇습니까? 숨을 안 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숨을 안 쉬면 산소가 인체에 공급이 안 됩니다. 산소가 공급이 안 되면 죽습니다. 그래서 생기는 병이 화병입니다. 숨을 쉬면 인체 안에 모든 장기가 원활하게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싸울 때도 숨을 쉬면서 싸워야 합니다.
“당신 말이야 나 시집 올 때 해 준게 뭐 있어! 그렇다고 애를 돌봐 주기나했어! 애한테 동화책을 읽어 주기나했어! 놀이 공원을 가기나했어!”-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키고 쉬세요. 그리고 “친정 엄마한테 용돈을 줘받어!! 그 흔한 생일에 나한테 원피스 하나를 제대로 준적이 있어!!” 또 쉬고 그러면 아무리 급한 남편도 주먹이 안날라 옵니다. 맞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호흡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호흡은 너무 중요합니다. 성도도 의견이 안 맞으면 다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역을 하다 지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내 신앙생활은 시험에 들게 됩니다. 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함께 있을 때 잘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기도의 호흡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자리에 서게 되면 ①. 마음이 편해집니다. ②. 주의 뜻 앞에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③. 그리고 기도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 앞에 자신의 한 모든 일들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깨닫게 되고 그 은혜 앞에 모두가 사랑스럽게 됩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은 말하기를, “나는 망원경으로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천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망원경을 옆에 두고 방안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는 망원경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 망원경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신비함을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천체도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수많은 세상의 정보를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정보는 인터넷에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구원의 길을 거기에서 찾을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생명의 길, 승리의 길, 행복의 길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때에, 하나님 앞에 새벽에 기도할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한없는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이 힘은 교회를 세상 앞에 무력하게 만들지 못하도록합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것은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봉사해야합니다. 10절을 보시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여기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이코노모스, 청지기라는 말은 옛날 번역에는 집사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 집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타율성이 있고 자율성이 있습니다. 집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주인을 위한 겁니다. 주인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주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인이 맡겨 준 것이 있습니다. 요만큼의 영역을. 재산도 심지어는 하인도 혹은 어떤 권력을 맡겨주었습니다. 그 한계 안에서는 자율적입니다. 그는 자유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자율적으로 감당해야됩니다. 이게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가 곧 이제는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오늘은 소중한 결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선한 일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봉사를 우리의 섬김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인간의 성공은 은혜를 아는데 있고 은혜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아는데 있고 은사를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기는 삶이 최상의 가치를 사는 길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를 베풀었느냐. 당신은 얼마를 섬기며 살았느냐. 이걸 묻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열심으로 사랑하라' 그랬어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습니다. 이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으로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대접하고 서로서로 봉사하면 돼요. 거기서 우리의 삶의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의미 있게 꽃피워가야 할 것입니다. 정말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201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를 결산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직 인생의 중간 결산인 게 다행입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기에 감사합니다. 이제 한해를 마감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 다시 말하면, 있을 때, 좀 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있을 때 잘합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고 또 우리의 마지막도 점차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우리가 터득해야 합니다. 내일의 미래는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 결정되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열심히 서로 사랑하며 형제의 허다한 죄를 덮어줄 때에 주님도 우리의 죄를 덮어주며 우리를 보듬어 주실 것입니다. 원망보다는 감사, 불평보다는 이해로서 서로를 섬기시고 그리고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십시다. 다시 ‘정말 있을 때 잘합시다!!’ 기도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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