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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2024~2009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09-06-29 | 조회: 2506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수14:6-12.

요즘 자녀교육에 관심을 가진 부모라면, 카디자 윌리엄스이라는 이름을 알 것입니다. 이 18세 된 자매가 지금 세계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숙자 출신으로 남들이 가기 힘든 하버드 대학에 입학을 했기 때문입니다. 카디자의 어머니는 뉴욕 브루클린 빈민가 출신으로 14세 때 카디자를 낳은 뒤 집에서 쫓겨나 한 생을 노숙자로 살아갑니다. 카디자는 안정적인 거처가 없어 초·중·고 12년 동안 학교를 12번이나 옮겨 다녔습니다. 카디자는 초등 3학년 때 캘리포니아주(州) 학력평가에서 상위 1% 안에 들면서부터 공부에 자신감이 생긴 것입니다. 그때부터 새벽 4시에 거처를 나와 학교에서 공부하다 밤 11시에 돌아가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심지어 이 공부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카디자는 쓰레기봉투를 덮고 잠을 자고 무료 급식소에서 배를 채우면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미국에 아이비리그에 속한 대학에 들어가려면 학업성적뿐 아니라 남과 차별되는 특기와 스포츠, 봉사활동 경력을 쌓아야 합니다. 노숙자 센터와 홈리스 모텔을 옮겨 다녀야 했던 카디자에게 그런 특별한 경력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어려운 관문을 통과 한 것은 그의 주변에 그의 재능을 알아준 사람들의 배려와 그의 어머니의 격려는 그 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인생을 길바닥 인생으로 만든 어머니가 얼마나 원망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낳아준 어머니를 마냥 원망만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이 핏덩이인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집에서 쫓겨났고, 이곳저곳으로 노숙자 생활을 하는 중에도 자신이 길바닥 인생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배움이라는 이 목표를 향해 그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도 지하철의 땅바닥에서 신문 한 장 깔고 자는 그 절망의 자리에서도 결코 목표를 잃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져야 될 좋은 생활 태도는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내일이지만, 불안해하거나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보다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매일 매일에는 놀라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고 있을 때만 그 놀라움을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다." 기대감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분명한 꿈, 다시 말하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도전할 때, 기대감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습니까? 그래서 도전할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적당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삽니까? 그런 사람은 내일에 관한 기대감을 갖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가운데 간혹 운명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하고 자주 이야기하지만, 그 사고의 밑바닥에는 운명론이 깔려 있는 것을 봅니다. "아이고, 내 팔자. 더 이상 뭘 기대하겠어요? 그저 내가 태어날 때부터 피할 수 없는 숙명인데요. 내가 어떻게 합니까? 이젠 어쩔 수 없어요." 이런 말,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 것을 봅니다. 이런 운명론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처넣는 무서운 손입니다. 일단 그 감옥에 갇히면 우리는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세월 가는 데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목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대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아직도 이런 운명론에 끌려 다니는 흔적이 있습니까? 다시 한번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잠재의식들을 깨끗이 불태워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태도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절대로 용납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에 끌려 다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목표를 정하고 도전할 줄 압니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 자동차 회사의 한 모퉁이에 헨리 포드 부부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옆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남편 포드는 믿음으로 꿈꾸는 자이고, 아내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한평생 추구해야 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도전한 사람들이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이 본문을 보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여리고성을 점령하고 아이성을 함락 시키고 계속해서 엄청난 전쟁을 쉴 사이 없이 차룹니다. 거의 7년 동안 전쟁에 소용돌이 속에 빠져 살아왔습니다. 이제 어느덧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진격하기 쉬운 지형, 정복하기 쉬운 성읍들은 이제 거의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만한 땅은 확보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손에 쥘 땅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전쟁에 지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만 싸웠으면 좋겠다. 이 정도 차지했으면 우리도 살만한데 전쟁을 그만 했으면 좋겠다."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많이 풀어져 버렸습니다.

이때 나이 85세 된 노인 갈렙이 가나안 땅에서 아직도 정복되지 못하고 있던 헤브론 산지를 바라보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수년 동안 전투를 해왔지만 그곳은 아직 감히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슬슬 피하면서 지금까지 남겨 놓은 땅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이 그 땅을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내가 올라가서 저 산지를 취하겠나이다. 저 땅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땅이니 내가 소유하겠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와같은 생각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그 당시 갈렙의 나이가 85세였습니다. 아무리 옛날이지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85세면 노인입니다. 아무리 체력이 좋고 싸움도 할 수 있고 칼도 쓸 수 있다고 하나 역시 노인은 노인인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이 자리에 50대, 60대 이상 되시는 분들은 이런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교훈하시는 지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50대를 넘어서면 대부분 무기력해지고, 인생의 목표를 상실한 채 하루하루를 살기 쉽습니다. 일에서 손을 떼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한 채로 앞으로 20-30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연령으로 봤을 때는 청년인데 그 속에 든 것은 세상의 썩어지고 병든 것이 가득 하여, 자신의 야망과 꿈 이룰 생각만 하는 청년답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렙과 같은 사람을 통해서 무언가를 배우고 도전 받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모두가 다 내려놓으려고 하는 이 때 유독 갈렙만 나서서 “이 산지를 달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갈렙은 평생을 여호수아의 그늘아래서 그는 평생 제2인자로 살아왔습니다. 수14:10을 읽겠습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7절에 의하면 갈렙이 여호수아와 함께 유다 지파를 대표하여 정탐꾼의 사명을 수행한 때가 그의 나이 40세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나이는 85세, 그러니까 지난 45년의 세월을 그는 제2인자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동안 그는 이름도 빛도 없이 겸손한 제2인자로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자신의 현실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서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외치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생각해 보세요. 모두가 다 내려놓으려고 하는 이 때 유독 갈렙만 나서서 “이 산지를 달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 여기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전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비전의 유무에 따라서 자세가 달라집니다. 비전을 다른 말로 목적의식이라고 할 때 살아가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비전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상실했을 때, 그는 40년간 쌓아온 하나님의 귀한 사역이 한 여인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새로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나갔지만 그가 비전과 사명을 상실했을 때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비전을 가지고 850명과 싸워서 승리하는 정말 놀라운 일을 했지만 그 비전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로뎀 나무에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는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돌아섰습니다. 바로 비전과 꿈을 잃어 버렸을 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갈렙에게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나이가 많던 적던 인생의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산지가 어디인지 기도하면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도전해야 될 목표가 무엇인지 각자 하나님 앞에 질문해 보십시오. 나이에 관계없이 금년에 내가 도전해야 될 목표가 무엇인지, 나의 남은 생 몇 년 동안 도전해야 될 목표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명히 찾으십시오. 찾고 나면 거기에 도전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활력을 되찾는 것입니다.

지금 갈렙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정복하겠다는 도전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산지를 달라’고 한 갈렙은 높고 안전한 성곽에서 진을 치고 있는 강한 아낙 자손과 위험한 도박을 벌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지역을 점령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있을는지 모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갖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땅이다. 내 발로 밟는 땅은 다 내 것이 된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어. 그러므로 내가 가서 밟으면 그것은 내 땅이야.' 확신이 분명했기에 값을 지불하는 것쯤은 두려워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신앙은 도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동성 교회가 40주년을 맞이했다는 그 자체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처럼 모든 게 힘들고 어렵다보니 사람들이 고슴도치처럼 움추려들고 있고,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고난과 실패 경험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두려우면 바른길을 갈 수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름기만 먹이고 운동은 시키지 않고 그래서 어린나이에 성인병이 웬 말입니까? 온실에서만 키우고 군대도 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녀들을 정신적인 불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고생 좀 시키세요. 영적인 세계가 아니라 이 땅의 일도 고생 좀 하고 살아야 빛나는 인격이 되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렵고 험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반드시 주님 곁에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지난번에 저의 눈으로 그 동안 궁금했던 명품 악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찾아가는 음악회에서 정명훈 지휘자가 제1 바이올린 연주자를 소개하는데 그의 손에 들려진 바이올린이 스트라디바리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저는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흥분을 하고 보았는지 모릅니다. 이 바이올린은 최상의 명품입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이 바이올린은 전 세계에 500-700개 가량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태에 따라 가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다른 바이올린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신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음악 애호가들은 지금이 17-18세기보다 과학기술이 훨씬 발달했는데, 왜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바이올린을 만들 수 없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습니다. 그리고 스트라디바리우스 소리의 비밀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최근 식물학자와 기후학자 연구팀이 그 비밀을 밝혀냈다고 해서 주목을 끌었습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소리의 비밀은 나무 재질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구팀에 따르면 1400년대 중반부터 1800대에 중반 유럽은 ‘소빙하기(Little Ice Age)’라고 불릴 정도로 추운 날씨가 몰아쳤다는 것입니다. 연구팀은 소빙하기의 강추위 때문에 나무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에 착안했습니다. 나무들이 성장하는 대신 매우 내밀해졌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어떻게 자랐는지는, 나이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이테 간격이 넓은 것은 여름에 자란 흔적이고, 나이테 간격이 좁은 것은 겨울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나이테 간격이 극히 좁다는 것은, 그만큼 외부 환경이 좋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는 1700년부터 1737년까지 바이올린을 제작했습니다. 그가 바이올린을 만들 때 사용한 재료들은 모두 ‘소빙하기’의 극도로 추운 날씨 때문에 내밀하게 자라난 나무들이었던 셈입니다. 결국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나무가 자라면서 겪은 ‘진통’을 아름다운 선율로 녹여낸 결정(結晶)이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면서 겪은 ‘진통’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겪은 진통의 경험이 우리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을 만들어냅니다. 어떤 나무들은 추운 날씨를 견디면서 자랍니다. 사람들이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하게 자랍니다. 작은 성장이지만 의미심장한 성숙을 통해 튼튼하게 자랍니다. 그런 나무는 외형 성장보다 내면 성숙을 통해 거듭납니다. 빠르게 성장한 나무는 충격에 약합니다. 자칫하면 부러집니다. 그러나 더디게 자라난 나무는 웬만한 충격과 압력에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 내성을 갖습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신비는 혹독한 추위를 버티면서 참아내고, 그 세월을 마침내 내면으로 승화시킨 나무가 들려주는 매혹의 소리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외쳤던 갈렙!! 그는 한생을 여호수아의 그늘에서 어쩌면 빛을 못본 인생인지도 모릅니다. 무기력해서도, 무능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명장입니다. 그는 출애굽한 백성들 모두가 광야 40년을 지나고 가나안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오직 출애굽 다음세대와 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가나안 땅을 밟은 역전의 용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든 소외되든 세상 앞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항상 하나님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는 비전의 사람입니다. 어떤 분은 갈렙이 이런 나이에 헤브론 산지 정복에 나선 것을 그의 노욕이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갈렙의 도전의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일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음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14:9을 보십시오.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그리고 이제라도 그 땅을 밟을 때 그 땅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이 될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그 땅에 대한 도전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헤브론 산지는 거인이라고 칭함 받은 산족들 곧 아낙 자손들이 거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여기 ‘혹시’라는 말은 '정녕', '필시'라는 소망과 확신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정녕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이 임마누엘 믿음으로 그는 마침내 이 산지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갈렙의 야망의 승리가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적어도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승리 없이 우리의 승리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모든 성도의 자세는 결국 갈렙과 같이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여정임을 기억하십시오. 본문 14절에서 그가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쫓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온전히‘라는 원어는 ’말레‘라는 단어로서, ’충만하다‘, ’만족시키다‘라는 의미로서, 갈렙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정도로 충분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산지의 정복으로 그의 믿음의 여정은 비로소 온전함을 성취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제 우리가 이 한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 목표를 정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LA에서 여객기가 떠서 태평양을 건너 열 몇 시간 만에 서울로 온다고 합시다. 그런데 여객기가 열 몇 시간 동안 날면서 지정된 항로대로 나는 경우는 전체 10%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나머지 90%는 항로를 벗어난다고 합니다. 본래 항로를 벗어났다가 제자리에 돌아오고, 벗어났다가 또 제자리에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나중에는 목적지 공항에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목표에서 벗어나고, 실패하고, 주저앉기도 하지만, 계속 그 목표를 향해 믿음으로 도전하면 결국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가 손에 넣어야 할 산지를 분명히 확인하면서 달려가면 남은 후반기 동안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가 우리 눈앞에 펼쳐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목표, 곧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열심히 뜁시다. 또 내 삶에 있어서 반드시 얻어야 되는 목표를 설정하고 하나님께 구하면서 열심히 도전합시다. 그래서 아말렉이 있는 산지를 우리의 소유로 만드는 한 해가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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