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먼저 올라 갈 것인가? 삿1:1-7. 2014년 1월 19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1-19 |
조회: 1549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필리핀 사역을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우리 일행이 이번 하이옌 태풍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타클로반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습니다. 타클로반 공항에 도착하지마자 공항 청사는 포탄에 맞은 듯 쑥대밭 그 자체 였고, 길을 나오는데 퀘퀘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데 “야!! 재난의 현장에 왔구나” 하는 어떤 긴장감이 밀려 왔습니다.
한 순간에 1만 여명이 태풍에 쓸려 주검으로 변한 현장은 3개월이 다 되가는데도 그 참혹상은 그대로였습니다. 우리 일행이 태풍 지역인 사마르 섬을 도는데 5-6시간을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모습은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재앙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다음세대를 상징하는 아이들이 6000명이나 죽은 현실 앞에 그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할 가족의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얼마 전까지만해도 함께 울고 웃던 마을 주민들이 한 순간에 싸늘한 주검이 된 그 절망의 현실 앞에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인생의 허무감.. 의욕상실감 같은 극단적인 것들이 밀물처럼 밀려 올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그 절망이 서려있는 현장에 곳곳에 세계 각처에서 온 자원 봉사자들이 무너진 도로를 깔아주고 천막을 세워 주고 식량을 공급하는 모습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감동의 현장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고난이 왜 오는지 우리는 그 답을 다 담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현장 앞에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지, 아니면 다시 일어날 것인지는 그 판단 여하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여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절 상반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데, 여호수아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200만이나 되는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건너고, 금성철벽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공략하여 꿈에 그리던 가나안에 승리의 깃발을 꽂은 가나안 정복의 영웅입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죽은 것입니다.
믿었던 지도자가 사라진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도 산더미처럼 많은데, 그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 지도자가 죽은 것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가나안에 남아있는 잔존세력으로부터 반격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살다보면 이와 유사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 개인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 민족이 어디로 가야 할 지, 나아가야 할 방향 감각을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1절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기 여기에서 ‘여쭈어’ 라는 단어로 번역된 ‘샤알’은 단순히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강청하는 것입니다.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민족의 지도자인 여호수아 장군이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들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남아있는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까? 말씀 해주십시오.”라고 그들은 기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살길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라는 절절한 간구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서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매사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다시 묻자온대, 다윗이 가로되”(삼상 23장) 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먼저 묻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방향을 지시하시면 그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때때로 씻을 수 없는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호를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물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의 장벽이 여러분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믿었던 사람이 여러분들로부터 등을 돌렸습니까? 자녀들이 여러분들의 생각처럼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까? 생각지 않게 물질의 문제가 생겼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기도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야말로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때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함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기도로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2.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로 하여금 ‘앞장서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그 때 유다 지파는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하필이면 우리 지파입니까? 싫어요, 못해요”라고 하며 머뭇거렸습니까? 아닙니다. 4절 상반절을 보면 “유다가 올라가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올라갔다고 합니까? 유다 지파가 올라갔습니다.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히10:35-3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믿음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인생, 이것이 믿음입니다. 요즘 스포기 열기가 대단한데 우리에게는 익숙치 않습니다만, 럭비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럭비 경기가 매우 성경적인 경기라고 생각합니다. 럭비에는 후퇴가 없습니다. 축구에는 작전상 후퇴가 있습니다. 볼을 가진 선수가 볼을 뒤로 돌리며 드리블 할 수 있지만, 럭비 경기에서는 볼을 가진 선수는 대부분 뒤로 가지 않습니다. 1미터라도 전진하기 위해서 사력을 다합니다. 상대편에서 태클을 걸어도 죽자 살자 앞으로 전진 합니다. 여러 명이 에워싸고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 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이번 필리핀에는 삼성보다 현대가 더 알려진 것 같은데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자서전을 쓴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항상 도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철학을 말할 때 빼놓지 않는 것이 청개구리 철학과 빈대 철학입니다. 그 속에는 그의 무모한 듯 보이는 불굴의 도전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고 정주영 회장은 10대 때 출세를 위해 여러 차례 가출을 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아버지에게 붙잡혀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네 번째 가출을 결심합니다. 그 때 정주영은 교과서에 나온 ‘청개구리의 교훈’을 되새깁니다. 청개구리가 버드나무에 올라가려고 몸을 날려 뜁니다. 그런데 가지가 너무 높아 실패합니다. 하지만 청개구리는 포기하지 않고 열 번, 스무 번 계속 도전합니다. 결국 서른 번째에 성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개구리도 포기하지 않으면 성공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자식인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며 도전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결국 네 번째 가출에 성공하여 서울에서 엿 공장, 쌀가게 등으로 돈을 벌어 후에 현대그룹을 세우게 됩니다. 다음으로 그의 빈대철학이 있습니다. 청년 시절, 정주영은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방을 얻지 않고 노동자 합숙소에서 잠을 잡니다. 합숙소의 낡은 벽 틈에 빈대가 우글거렸습니다. 밤마다 계속 빈대들이 무는 바람에 잠을 설치기 일쑤여서 밤새도록 잡고 또 잡는 날이 많았음에도 빈대는 여전히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식탁을 침대처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식탁 네 다리마다 물을 가득 담은 세숫대야를 놓고 안심하고 잠을 잡니다. 그런데 빈대는 세숫대야의 물을 어떻게 건넜는지 잠자는 그를 괴롭혔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을 빈대는 해냅니다. 그래서 불을 켜고 자세히 살펴보니까 빈대가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자기에게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 정주영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빈대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렇게 노력을 하는데 인간인 내가 빈대만도 못해서 되겠는가!!!” 정주영은 그 때부터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도전을 했습니다. 그래서 단돈 500원으로 영국의 버클레이 은행장을 설득하여 울산조선소를 세웠습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낸다는 도전 정신이 그로 하여금 모든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도님들 가운데도 안 되는 말만 하는 분이 있습니다. 안 되는 이유만을 날마다 묵상하지 마십시오. 언뜻 보면 매우 신중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비관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이런 사람은 평생 안 되는 이유만 말하며 삽니다.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안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제 틀렸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도전하는 자에게 길은 반드시 열릴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도전정신이 없습니다. 항상 입만 열면 “할 수 없어요, 못해요, 안돼요, 무서워요, 어려워요, 살 떨려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해요”라고 말하는데, 이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겉모습은 믿음이 연약한 것처럼 “좋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한 번 도전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지파를 보십시오. 그들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4절부터 6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유다 지파가 올라가매 누가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였다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적들을 그들의 손에 붙여 주셨습니다.
유다 지파가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전진하는 사람,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이 맛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계산기 잘 두드리는 사람보다, 믿음으로 전진하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직하지만 멈추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경주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시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여기 먼저 올라가기로 앞장서기로 결단한 유다는 함께 앞장 서 달려갈 동역자를 구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올라가자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성령님은 우리가 모이는 곳에서 역사합니다. 기도도 모여서 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전도도 힘을 합쳐 모일 때에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온 백성들이 남녀노소 불문곡절하고 힘을 모아 돌 때에 무너졌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졌습니다.
저는 낯선 곳에 가서 식사시간을 맞이할 때가 참 자주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까? 식당을 찾는 분명한 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실패하지 않는다. 그래서 차가 많이 서 있는 식당, 발 디딜 틈이 없이 모여있는 식당에 찾아가면 실패하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모이는 곳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일 수 없는 공동체는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훈련의 사역이든 사역의 자리든 함께 모일 수만 있으면 그 자리는 큰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성도들이 모일 때에 하늘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앞장서는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반드시 승리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저들이 도전했던 아도닉 베섹 왕은 시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이방 임금 70명을 물리치고 70개 부족국가를 다 정복했던 힘있는 국가였습니다. 이런 아도닉 베섹을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올라가 박살을 내고 돌아온 것입니다. 앞장서는 사람을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십니다. 앞장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앞장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맡겨 주십니다. 새 역사의 주인공은 나다. 이 교회의 주인공은 나다. 주인공 의식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쓰십니다.그만큼 믿고 그만큼 복을 받았고 그만큼 성장했으면 이제 징징거리지 말고 이웃을 섬기십시오. 어린아이 정신, 어린아이 태도를 버리십시오. 때로 권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되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돌봄 타령이나 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쓸 수가 없습니다.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라고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 앞장서 가라고 하나님께서 내게 무거운 직분을 준 것입니다.이제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한 구절 말씀이라도 부둥켜안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몸부림하고 그 말씀을 내 삶의 현장 속에 실천하지 못하여 그 말씀을 움켜쥐고 안타까워 할 줄 아는 사람들, 그 말씀에 능력을 이루기 위하여 실천해 보려고 몸부림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구경꾼 신앙가지고 새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훈련의 현장으로 달려가십시오. 잃어버린 사명은 없습니까? 꼬깃꼬깃 접어 두었던 사명은 없습니까? 새롭게 펼쳐 보십시오.제임스 그레이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그림동화 「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한 남자가 새를 잡으러 숲 속에 갔습니다. 나무그늘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독수리 새끼 한 마리를 주워왔습니다. 그리고 양계장에 넣어서 닭들과 오리와 함께 키웠습니다. 닭 모이를 먹고 자랐던 이 독수리는 닭 정신으로 충만했습니다. 5년을 키웠더니 큰 독수리가 되었고 날개깃 하나가 3m도 더 되는 엄청난 새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날기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인 청년은 이 독수리에게 독수리 정신을 가르쳐 주기로 작정했습니다. 독수리를 안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는 순간 독수리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저 해를 향하여 나는 날아갈 수 있다. 웅장한 자연을 두루 두루 보여 주었습니다. 독수리의 가슴속에는 뭔가 용솟움쳐 오르는 무서운 힘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날개를 펼쳐 주었습니다. 날개를 치고 저 벼랑을 향하여 집어 던졌습니다. 독수리는 꺄약~ 소리를 내며 날기 시작했습니다. 비상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에 그런 글을 남깁니다. “아프리카인이여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다. 아프리카인이여 우리도 하늘을 날 수 있다.” 식민지배에 신음하고 있는 자기 동족을 바라보며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자기 본국에 던지는 저자의 해방의 메시지였습니다.
지금까지 썩을 세상을 보고 있던 눈을 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펼쳐 줄 저 푸른 창공이 예비되어 있는 신령하고 풍성하고 값진 세계를 바라 보십시오. 여러분의 발은 이 세상만 향하여 걸어가라고 주신 발이 아닙니다. 거룩한 길, 천성 가는 길, 멋진 길이 여러분을 향하여 예비되어 있습니다.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닙니다. 잠시 잠깐의 고난이 있다고 거기 웅크리고 앉아있지 마십시오.
참 신앙인은 내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교회는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생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합니다. 하수구에서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라와 싹을 트는 것을 보았습니까? 집채만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하며 허리가 꺾이고, 형벌 같은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날개를 펴십시오. 한 두번의 실패가 있다고 영원히 실패할 사람인 것처럼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앞장서십시오. 달려가십시오. 믿음의 날개를 펴고 저 푸른 창공을 향하여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멋진 세계를 향하여 달려가십시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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