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고 싶으십니까? 느1:1-11 -느헤미야 강해 ①- 2014년 2월 2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2-02 |
조회: 1631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겠지만, 제게 있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을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아침마다, 이전에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합니다. 미리 연습해 볼 기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인생은 매 순간 낯선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인생이 버겁다’, ‘삶이 벅차다’라고 중얼거리게 되지는 않습니까? 이는 새롭고 낯선 것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만만치가 않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 정처 없이 방황하는 청년기, 책임질 것이 많아지는 장년기, 이렇게 점점 나이를 먹어 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인생 대소사를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준비 없이 맞아들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힘든 일이 있습니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부담스럽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일은 바로 ‘과거에 실패한 일을 다시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성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차갑게 거절당한 기억이 있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을 회피합니다. 결혼 생활에 실패한 적이 있는 사람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것이 망설여집니다. 입사 시험에서 여러 번 고배를 맛보고 나면 이력서를 넣는 일마져 두려워 집니다. 지금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직을 하고 싶지만, 다른 곳에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좌절을 경험한 탓에, 이제는 목표를 정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다면, 교회에서 아무리 특새를 자주 열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품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대부분 사람이 실패한 일을 다시 시도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이야기를 한다면 ‘같은 일 때문에 실망하고 상처받게 되는 것이 싫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고생과 희생을 더는 버틸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대한 일, 좌절감을 가져 오는 일, 대가 지불이 큰일일수록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이럴 때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냥 주저앉거나 회피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살펴 볼 느혜미야서는 그냥 덮어버리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문제를 만날 때, 이것을 어떻게 극복을 해나가는 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소개되는 느헤미야는 자기의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온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절망의 자리에서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를 받는 이방 땅에서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어느 날 느헤미야는 고향을 다녀온 형제 하나니와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떤지 물었다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하는지라.”
여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라는 말은 곡식을 타작을 할 때 쓰는 타작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종의 도리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 곡식을 깔아놓고 도리깨로 힘껏 내리치면 곡식알들이 전부 떨어집니다. 환난은 마치 사람들을 땅에 눕혀놓고 도리깨로 내리치듯이 호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능욕이란 단어는 인간으로서는 입에 참아 담을 수 없는 수치를 말합니다. 우리 종군 위안부가 당한 그런 수치입니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그 당시 예루살렘 길에는 날마다 시체가 즐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곽이 없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공격해 오면 대책 없이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고국에 와서 계속된 이 고난 앞에 저들의 마음에 담겨 있는 꿈마져 송두리째 짓밟힌 것입니다. 이제 저들은 더 이상 버틸 힘도 성벽을 재건할 힘도 다 상실 한 채 하루 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이처럼 고난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지내는 이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입니다. 해방을 맞자 그리던 조국에 스릅바벨과 함께 왔던 사람들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는 기쁨을 맛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이 꿈꾸었던 희망들이 뿌리채 뽑히는 고난이 끝도 없이 밀려 온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수치는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이방 사람들에게 우리가 지배를 받고 있는가?’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항도 해보고 하나님 앞에 절박한 심정으로 얼마나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끝도 끝도 없는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 올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고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내면과 삶 속에 희망이라는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희망과 도전이 자라야 할 사람들 속에 상심과 비탄의 잡초만이 무성합니다. 사명의 성벽은 무너지고 자포자기와 체념으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로 점차 성벽은 무너지고, 그것이 성격의 일부가 되어 오히려 무너진 삶이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다시 세우기가 불가능해 보여 지레 포기했습니까? 이 꿈을 상실한 사람들...보세요. 지금 느헤미야가 바로 그런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방해공작 때문에 성벽을 건축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갔던 사람들이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 당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에게 신임을 받아 수산 궁에서 ‘술 관원’으로 있었습니다. ‘술 관원’은 왕이 마시는 술에 독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미리 술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요즘의 경호실장이나 비서실장과 같은 직책으로서 독살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왕을 보호하고, 왕과 함께 앉아서 국정을 논하는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당시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는 이민자로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포로로 끌려간 사람으로서 출세하기 쉽지 않았지만,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페르시아 제국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떠나온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건,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져 있건, 성문이 불타 버렸건, 그러한 것은 그의 삶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에게는 모든 초점이 권력에 있습니다. 어떻게 권력을 잡을 것인가, 잡은 권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술관원 역시 어떻게 왕의 신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렵게 오른 이 자리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1,600Km나 떨어진 조국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잠깐 울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수일 동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가 취한 행동이 4개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울고, 슬퍼하고, 금식하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신약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롬9:1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큰 근심이 되었고, 그 근심이 지나쳐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육체가 아픈 것을 고통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아픈 것을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아픔이 지나쳐서 그것이 바울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이런 절규를 합니다. 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는 말씀에서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인데,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데마’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 없지만,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형제, 나의 친척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 부르짖음이 있습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한 때 도움이라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바울에게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이 피를 토하듯 끌어안고 기도하며 사랑했던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을 배척했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같이 바울은 일생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평생 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태장을 때린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자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자기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칠만큼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갈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핍박할수록, 견딜 수 없는 자리까지 고난에 빠뜨려도 오히려 바울은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더 간청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억만리 멀리 떨어진 고국에서 들러온 소식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습니다. 자신은 페르시아 왕궁에서 높은 지위에 앉아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조국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조국과 그 조국에서 고통당하는 동포들의 소식을 듣고 수일 동안 음식을 먹는 것 마져 잊고 슬피 울었습니다. 왜요? 성벽이 불타고 훼파되었기 때문입니까? 고난 앞에 고통 받는 그것 때문입니까? 물론 그것도 있겠습니다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동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기 형제들이 가슴에 타오르던 꿈을 포기한 모습 때문입니다.‘꿈을 꾸다 멈춰 버린 사람들 ’입니다. 그것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제일 쓰기 어려워하는 인생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살 의욕이 없어지고,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포기는 곧 절망이고 절망은 희망의 유일한 적인 것입니다. 난치의 질병과 싸우시는 분들을 관찰해 보면 한 동안 잘 견디시다가 한 순간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스스로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병세가 위중해도 악 조건 속에 잘 견기다가 한 순간 극적으로 호전되고 기적을 체험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포기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젊어서부터 인생을 열심히 살았던 젊은이가 있습니다. 여러 장사도 해보고 식당도 운영해보고 사업도 해서 돈을 벌기도 했지만 결과가 안 좋았습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인데 집도 넘어가고 빈털터리가 되었어요. 아내도 자녀들도 실망하여 그를 떠났습니다. 혼자가 되어 나라에서 주는 극빈자 구제금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그의 나이가 65세입니다. 외로움, 상처, 피곤, 의욕상실이 몰려왔습니다.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힘없이 거리를 지나가는데 한 교회에서 찬송소리가 들렸어요.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몰아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못 위로해주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
이 찬송을 듣자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잊었던 하나님이 생각났어요. 어럴 적에 교회 다니면서 행복했고 즐거웠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어졌어요. 다시 교회다니길 시작했어요. 그런데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다시 일을 하고 싶은 의욕이 살아났어요. 훗날 그는 “하나님이 소망을 주셨다” 고백했어요. 그런 가운데 다시 사업을 구상한 것이 바로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이었어요. 닭을 잘라서 밀가루를 묻혀서 기름에 튀겨 튀김 닭을 만들어 파는 거에요. 돈이 없으니 투자자를 찾아 다녔어요. 그런데 나이든 할아버지가 어설프게 설명하는 것을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한 사람 두사람 수없는 사람을 만났지만 선뜻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상담했지만 포기한 사람이 무려 일천 팔명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이 이쯤되면 절망하게 되지요. 아니 벌써 절망했어야 당연하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중년 신사는 포기를 몰랐어요. 절망을 몰랐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1009번째 만에 투자자를 만났어요. 그리고 4평에서 시작한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지 미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돈방석에 앉아 65년 동안 손해 본것 다 회복했습니다. 그의 마음의 상처도 외로움도 다 떠나가고 회복의 기쁨을 맛보았어요. 이 사람이 누구냐 오늘 날 전 세계에 엄청난 매장을 가지고 있는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의 창업자 커널 센더스 얘기입니다. 그가 투자자를 10번 정도 해 보고 소망을 포기했더라면 아니 그가 1008번까지 해 보고 포기했더라면 그는 오늘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겁니다. 인내했기에 결과가 좋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기 느헤미야를 보세요. 비록 자기 백성들이 저렇게 나자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이것을 결코 모른 채 하거나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느혜미야는 조국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하려고 합니까? 여기 5절 말씀을 보세요.“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 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 지금 느헤미야의 경우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아닥사스다 왕이었습니다. 왕의 말 한마디면 쉽게 문제가 풀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날마다 그를 만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총애 받는 신하가 말 한번하면 들어 줄수 있는 위치 아닙니까? 그러나 느혜미야는 자기의 문제를 바로 왕에게 아뢰이지 않은 것을 주목하십시오.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물론 그는 현실적으로 아닥사스다 왕의 행정적인 결재가 없이는 예루살렘성의 중건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결재에 앞서서 하나님의 결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응답의 싸인을 받고 싶어한 것입니다. 사람이 허락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움직이셔서 허락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왕을 통해 이 허락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11절의 기도를 읽어보십시오. 지금 그는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을 움직이셔서 그의 신임과 허락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쉽게 이 문제를 왕에게 말하지 않고 기도만 계속했다는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한 것을 보여 주지 않습니까? -왕이신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중에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죄사함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의 영원한 나라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신 그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힘든 시절을 겪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기도 하고, 벗어나고 싶기도 하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을 하지 못한 채, 무너진 터 위에서 자포자기합니다. 그러나 여기 느혜미야는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한생을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저 눈 한번 감고 이국만리에서 모른 채 하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것 때문에 시비를 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거 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누가 기도하느냐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누가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냐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포기하지 말고 자식을 위한 것이든 사업을 위한 것이든 교회를 위한 것이든 지속적으로 소망을 품고 기도하세요. 앞서가시는 하나님!! 한번 택한 나를 결코 놓치시지도 포기하시지도 않습니다.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이 소망을 주신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자. 인내하며 기도하며 나아가자. 이 믿음과 이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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