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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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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강 잃어버린 기쁨 룻1:1-5. 부흥회 첫날 주일 설교 2014년 2월16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2-16 | 조회: 1655
오늘부터 시작하는 이 부흥 사경회에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복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잃었던 기쁨을 찾은 인생’이란 주제로 수요일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이 집회를 합니다. 저도 말씀을 잘 전해야겠지만, 성도 여러분도 은혜 받을 자세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마13장에 보면 씨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4가지 밭이 있습니다. 하나는 길가밭입니다 - 저는 이를 소망이 없는 인생으로 구분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가 뿌려져도 마음이 닫혔는데 소용이 없습니다. 두 번째가 돌밭입니다. 아주 유치한 신앙압니다. 처음엔 은혜를 받으면 화들짝 기뻐하다가도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그냥 시들해지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가 가시떨기 나무 밭- 온갖 근심이 있어서 성장하지 못하는 삶,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제일 많습니다. 10, 20년을 다녀도 성장이 없습니다. 네 번째가 옥토 밭입니다. - 마음에 진리를 받아들일려는 자세가 은혜를 사모하는 자세- 최소한 30배 100의 결실을 거둡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멜렉 가정은 단란하고 아름다웠던 가정이었습니다. 엘리멜렉- 하나님은 나의 왕이란 뜻입니다. 이름만 뵈도 믿음이 좋고 경건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아내 나오미는 ‘기쁨,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경건한 남편, 기쁘고 사랑스런 아내가 믿음의 땅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에 예기치 않은 흉년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흉년을 피해서 삶의 자리를 모압이라는 땅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모압 땅으로 옮긴 엘리멜렉의 가정은 흉년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이민 생활 10년 만에 가장과 갓 결혼한 두 아들이 죽고 세 명의 과부만이 남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지금의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떠난 이 가정은 이젠 어쩌면 회복이 불가능한 것처럼 처절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미래가 더 나은 삶이 되기를 바라고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노력을 하고 삽니다. 그런데 이처럼 인생의 파탄의 자리에 설 때 이 상처와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한 여인의 아픔을 들어보십시요!! 룻1:20절에 “나오미기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느니라” - 여기 “나를 나오미 - 즉 기쁨, 희락이라 부르지 말고, 마라 - 즉 괴로움, 슬픔이라 부르라” 이처럼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기쁨을 얻기 위해 떠난 길이 슬픔으로 변한 삶!!사랑하는 여러분!

엘리멜렉의 가정에 불어 닥친 흉년이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던 우리 가정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찢어놓고 갈라놓았던 일들은 없습니까? 가족간에 이해와 사랑의 흉년이 들어 미움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소망이 없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흉년 때문에 삶의 자리를 옳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새롭게 살겠다고 시작했던 삶 속에 더 큰 어려움을 만나서 회복할 수 없는 중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인생은 흉년이 와봐야 내 수준이 드러납니다. 부족함이 없을 때는 뭐든지 믿음으로 감당할 것 같아도, 흉년이 오면 믿음의 현 주소가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 묻고 싶습니다. 이 흉년이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 이 흉년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일어났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유다 베들레헴은 흉년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땅입니다. 출3:8절에 보면 “내가 내려가서 그들은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베들레헴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그곳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이름 자체도 ‘떡집’, 오늘날로 말하면 ‘빵집’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에 어떻게 흉년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살다 보면 도저히 흉년이 일어나면 안 되는 곳에 흉년이 찾아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저렇게 예수를 잘 믿는 가정에 저런 아픔이 찾아올 수 있을까?’, ‘예수를 잘 믿는 저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인생의 흉년이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하는 의구심으로 가득한 것이 인생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인생의 흉년이 몰아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고난이 왜 오는지 우리는 그 답을 다 담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현장 앞에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지, 아니면 다시 일어날 것인지는 그 판단 여하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씨름하는 대신에 모압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이 흉년을 피해 찾았던 모압은 어떤 곳입니까?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너무 좋은 곳입니다. 수자원이 풍부해서 농사도 목축도 잘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악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의 사술이 있고, 죄악이 관영합니다. 따라서 모압으로 갔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이나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가정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흉년을 피해서 온 그들은 10년 만에 가진 것 마져 다 잃어버렸습니다.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마저도 죽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 모두 잃었습니다. 가장과 갓 결혼한 두 아들이 죽고 세 명의 과부만이 남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이럴 줄 알았으면 베들레헴을 떠났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원치 않는 이 고난이, 이 흉년이 왜 우리에게 찾아옵니까? 저는 어린 시절 산골마을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흉년 보릿고개를 몇 번 넘어 봤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산에 들어가 칡뿌리를 캐 먹고 들판에 흩어져 쑥과 나물을 캐다 끼니를 때우고 우리네 부모님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떡을 해 먹었습니다. 하물며 3000년전 팔레스틴 농경사회, 유목사회에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었다면 그 고통이 오죽했겠습니까? 오늘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흉년은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려서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 지신 분들, 사업에 실패해서 사채 따위로 전전긍긍하시는 분들, 경제적인 흉년을 만난 것이 아닙니까? 건강에 자신감을 잃어버려서 ‘이러다 잘못되는 것 아니야’,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의사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에 건강의 흉년이 온 것입니다.

행복했던 가족관계가 깨어지고 부부관계 혹은 부모자식 형제들의 관계가 깨어졌습니까? 교회 안에서 함께 사랑해야 될 우리 형제 자매들, 목장안에 가족들, 같은 사역팀 안에 관계가 사소한 말다툼이나 의견차이로 점점 골이 깊어져서 이제는 대화가 안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까? 인간관계에 흉년이 온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말씀이 읽기 싫어졌습니까? 분명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해야 되겠는데 기도의 문이 막혀져 버렸습니까? 내 영적인 향상이 사라져버렸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신앙생활의 흉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때 흉년을 긍정적으로 직면하고 해결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한 것 같습니다. 될 때로 되라 포기해 버리곤 합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문제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사이 점점 악화되어져만 갑니다. 환경을 바꾸면 해결되겠지 도피해 봅니다. 보기 싫은 사람 나 안보면 그만이지. 도망갑니다. 때로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인생의 난제 가운데 하나가 왜 인생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예수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왜 흉년이 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① 하나님의 징계로 고난이 올 때가 있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지고 건강에 이상이 오고 영적인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② 고난 가운데 내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가? 내가 가진 신앙이 참된 신앙인가? 테스트 하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③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싸인으로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탕자는 고난을 당했을 때에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 아버지께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고난이 가져다 주는 유익입니다. ④ 고난은 하나님의 훈련 방법 중 하나입니다. 고난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누군가 고난을 겪고 있다면 너무 쉽게 그 사람을 동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그 사람을 다듬고 있는 중입니다. 그의 인격과 신앙을 만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맑아지고 깨끗해지는 순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는 고통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C. S. Lewis 교수는 옥스퍼드 대학의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나올 때, 한 학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증거 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이런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겁니까?? 그 때 루이스 교수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이 있어도 교만한 인생인데, 만약 인생의 길에 고통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교만하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확성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커갈 때, 남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잘 할 때, 손대는 일마다 잘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폭풍이 불고, 풍랑이 밀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고통은 세상의 온갖 산만한 소리에 집중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가는 우리를 일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확성기로 들려주시듯 고통으로 우리를 집중시켜주셔서 바른 길로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119: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니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아픔, 밤에 잠 못 이루며 신음하는 절망적인 실패, 말로 할 수 없는 인생의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우리도 시편 기자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고통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고난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요, 변장하고 찾아오는 축복의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수준으로까지 성장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멜렉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씨름하는 대신에 모압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실수입니다, 현실 도피입니다. 엘리멜렉과 그의 가정은 자신들에게 닥쳐 온 흉년을 보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려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이들 가정에 흉년이 든 때가 언제입니까? 1절에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입니다. 성경을 앞으로 넘겨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의 기록인 사사기가 있습니다. 삿21:25절에 보면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이 자기 소견이 옳은대로 행하던 때입니다. 그리고 사사는 재판관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그들이 정한 규율과 기준은 존재하지만, 성경적 가치관은 없는 시대였습니다. 조금 좀 살만하면 범죄하고 그래서 타락의 길로 빠지고, 그러다 다시 회복하고 또 범죄하고 타락하고 그러다 다시 회복하고, 또 범와 타락, 회개하는 본성이 극명하게 나타난 때가 사사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사가 치리하던 때에 흉년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내 소견이 옳은대로 살다가 물질의 흉년, 건강의 흉년, 붑관계의 흉년이 듭니다. 그리고 그 흉년의 가장 괴로운게 바로 영적인 흉년입니다. 영적인 흉년이 무엇ㅂ니까? 어느 날부터 말씀보기도 싫어지고, 교회 가기도 싫고, 사람도 만나기 싫다면, 그것이 정말 무서운 영적인 흉년입니다. 웃고 떠들고 사람들과 어울려도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목장에 참석해도 다른 나눔은 안듣고, 내 감정만 풀고 오는 것이 영적인 흉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안들리는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 말도 안듣는 법입니다.

육적으로 풍년이면, 풍요로워서 말씀이 안들리고, 영적인 흉년이 오면 깨닫지 못하고 무감각해져서 말씀이 안들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에 권태가 오고 그냥 직면하지 못한 채 도피합니다.




②엘리멜렉의 두 번째 치명적 실수는 ‘궤도 이탈’입니다.
엘리멜렉이 흉년을 피해 도망간 곳은 모압 지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다급했어도 모압 지방은 하나님의 백성이 절대로 도망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과 철저히 분리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땅이 아무리 비옥하고 풍요롭다 해도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바로 그 모압으로 도망감으로써 궤도를 완전히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이런 우(遇)를 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흉년을 통해 영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내가 왜 흉년을 만나야 하냐고 반항하며 모압으로 도망갑니다. 궤도를 이탈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멜렉 자신은 물론이고 그 자녀들까지도 몰락하게 만든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요즘 서울에는 그런 현상을 잘 보지 못하지만, 옛날에 보면 비가 온 다음날이면 도로 위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온몸을 배배 꼬며 죽어가는 지렁이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처음엔 지렁이가 너무 징그러워서 이리저리 피해 가기 바빴는데, 문득 왜 이렇게 많은 지렁이들이 아스팔트 도로 위로 나와 죽어가고 있을까 궁금하게 여긴 적이 없나요? 왜 지렁이들은 왜 흙 속이라는 따뜻하고 안락한 거처를 두고 메마른 도로로 나왔을까? 어느 책에 보니까 그 답이 나왔습니다. 지렁이는 원래 피부의 감각에 따라 움직이고 피부로 숨을 쉰다고 한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와서 흙 속에 물이 차면 숨 쉬기가 어려워진 지렁이들이 숨 쉴 곳을 찾아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렁이가 흙 밖으로 뛰쳐나간 것은 자기 나름대로 살길을 찾아간 것입니다.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 엘리멜렉이 가서는 안 되는 모압으로 가게 된 것도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과적으로 궤도 이탈을 일으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숨 쉴 곳을 찾아서 나갔다가 햇볕이 내리쬐는 도로 위에서 온몸에 흙을 뒤집어 쓴 채 비참하게 뒹굴며 죽어가는 지렁이같이 말입니다. 인생에 흉년이 찾아오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닥쳐왔을 때 내 의지로 한 번 해보겠다고 아스팔트로 찾아나서는 지렁이 같은 인생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름대로는 살 길을 찾아 나선 것이지만 그 길에는 결국 비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앞의 두 갈래 길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이 쓴 시편 11편1절이 얼마나 귀한 고백인지 모릅니다. 다윗이 인생의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빠져서 한치 앞도 안보이는 절망의 골짜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자식이 등을 돌려 아버지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알았을 때, 얼마나 고통이 컸겠습니까? 다윗은 인생의 절망적인 그 흉년에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시11:1절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인생이 고난을 만나면 그 앞에 두 갈래 길이 펼쳐집니다. 하나는 다윗이 선택한 길, 여호와께로 피하는 길입니다. 또 다른 길은 세상 사람들이 권하는 길입니다. 새처럼 날렵하게 산으로 도망하는 길, 현실 도피의 길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고난이나 흉년을 만나면 하나님을 찾지 말고 우리 방식대로 살길을 찾아 도로로 나가라고 권합니다. 날렵하게 ‘네 산’으로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산으로 도망가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피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은 자기 방식대로 잘 살아 보겠다고 모압으로 피해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도 모두 몰락시키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룻기서는 이렇게 한 가족의 몰락을 그리는 비극의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 가정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방치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룻기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도로에 널브러진 지렁이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린 실패한 엘리멜렉과 그의 가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위해 또 다른 축(軸)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판단으로 실패하고 몰락해버린 그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것이 룻기의 또 다른 한 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룻기서를 읽다가 복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복음 속에 나타난 그 은혜의 진수가 어떤 것인지를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한 인생을 결코 놓치시지도, 포기하시지도 않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은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41:4, 개역한글성경에 보면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리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부르십니다. 타락과 궤도 이탈로 말미암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역사가 예고되어 있는 인생 앞에서 그들이 회복되기를 바라시며 안타까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도로 위를 뒹굴고 있는 지렁이같이 실패한 인생, 죽음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회복될 수 있습니까?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거기서부터 회복이 일어납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날렵하게 네 산으로 도망가라”고 해도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정에 흉년이 찾아왔습니까? 그것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습니까? 건강을 잃었습니까? 과거의 잘못에 대한 후회로 절망하고 있습니까?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가정이 깨어졌습니까? 자녀들이 방황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괜찮습니다.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룻기가 절망적인 엘리멜렉의 가문으로 시작했지만 다윗의 가문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이번 집회를 통해서 “우리 가정이 다시 회복과 축복의 열매를 맺는 그런 은혜를 달라고 외쳐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은혜를 구해야 한다. 실패한 인생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큰 은혜가 되었던 찬양이 있습니다.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는 지렁이 같은 우리 인생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 구원의 감격을 누가 알겠습니까? 나의 실패와 실수까지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가 무슨 말로 감사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떠올려지고, 그 감격이 회복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실수와 실패까지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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