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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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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넘어서서 느헤미야 2:7-10절, 17-20절. 2014년 2월 23일 주일 설교 말씀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2-23 | 조회: 1473
지난 금요일 새벽 참 우리는 아쉬운 시간을 전 국민이 가졌습니다. 선명치 못한 심판의 판정으로 지금 세계 여론이 며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지가 않습니다. 정작 개인은 ?찮다는 겸손함이 우리를 더 아쉬움을 주고 있습니다. 김연아선수는 7살에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습니다. 올해 들어 24살이 되었습니다. 김선수는 자신의 분야에 집중해서 실력을 갈고 닦음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김선수에게는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될 수 있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선수가 천부적 자질만 가지고 세계적인 인물이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수많은 시간 동안 뼈를 깎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인물이 된 것입니다. 영상을 보신 분은 알겠지만, 얼마나 빙상에서 수도 없이 넘어졌습니까? 한번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코치가 어깨에 매달아 준 끈을 의지해서 반복해서 훈련하는 장면이 제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속해 온 혹독한 훈련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콤 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 - 창조적 지성의 탄생과 성공의 비밀’이란 책에서 저자가 강조한 것은 ‘1만 시간의 법칙’입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은 신경과학자 다니엘 레빈틴의 연구결과입니다. 어느 분야건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내용입니다. 레빈틴은 작곡가, 야구선수, 소설가, 피아니스트 등 다양한 분야를 조사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어느 분야에서든 1만 시간보다 적은 시간을 연습해 세계 수준의 전문가가 된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는 두뇌가 어떤 분야에 적응하는데 1만 시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뇌가 그 분야에 적응하고 나면 그 사람은 해당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1만 시간은 하루에 3시간씩 10년 동안 연습해야 나오는 분량입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의 의미는 우리도 자신의 분야에서 1만 시간 동안 연습을 한다면 뛰어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글래드웰은 성공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일 똑똑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생각은 그릇된 신화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재능에 더해진 ‘연습’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모든 일에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취를 맛볼 뿐만 아니라 문제를 넘어설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에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장애물은 지치게 만들고 때로는 그 앞에 주저앉게 합니다. 우리 중에도 지금 삶의 어떤 희망을 가지고 가다가 장애물 앞에 주저앉아서 가만히 계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고자 했는데 건강에 이상이 옵니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거야.’ 하는 마음으로 어떤 일을 진행하다가 상황이 더 악화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방황하지 않고 잘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더 큰 방황의 여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인생의 장애물 앞에 중단하고 멈추어 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기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계속해서 함께 나누고 있는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어려운 과정 속에서 만나는 계속되는 문제 앞에도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하나 극복하면서 하나님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만났던 문제들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그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는가? 우리 역시 느헤미야의 지혜가 필요한 때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먼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예루살렘성의 재건을 계획하면서 가능한 모든 장애물을 미리 가정해 보았고 그 장애물들을 통과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가 아닥사스다왕에게 예루살렘 성의 재건작업의 허락을 받아내면서 그가 예루살렘 성에 도착하기까지의 통과증을 요청한 것도 이런 불필요한 장애를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왕으로부터 예루살렘 재건허락을 받아내고 성을 쌓는 물자의 자원까지 받을 때, 그는 그것이 기도의 응답임을 확신했습니다. 본문 8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예루살렘 성의 중건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요, 그가 인도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고국에 돌아가 성의 중건을 백성들에게 설득하자마자 어떤 일이 생깁니까? 18-19절을 읽어보십시오. 여기 이름조차 으시시한 산발랏, 도비야 이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0절에 의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의 흥왕을 원치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귀의 백성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마귀의 방해공작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면서 동시에 사단의 방해를 허용하실까요?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우리를 유익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고 다 만사형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도 장애물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고 착수한 일에 장애가 존재한다고 해서 너무 서둘러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속단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간혹 인생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쓸데없는 고통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행복한 인생은 문제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생의 잘못된 등식 가운데 하나는 '행복한 인생 = 문제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많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늘 문제없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인 줄 알기에 문제가 없기를 소원하고, 문제가 없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 인생 가운데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인생이 계속 행복해질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우리는 게을러지고 나태해지고 쉽게 유혹에 무너져 타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그런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그런 가정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참으로 어려울 때는 그 가정이 하나가 되어 연합하여 열심히 일을 합니다. 조금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남편도 노력하고 부인도 노력합니다. 가난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없이 기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응답이 와서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제 아무런 문제가 그 가정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남편이 다른 데 눈을 돌리고, 자녀가 비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문제 가운데 휘말려서 고난 속에서 부르짖으며 차라리 그 때가 좋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인물들이 그러한 길을 밟아왔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심각한 죄를 지었을 때가 언제입니까? 그가 고통을 당했을 때가 아니라 아무런 일이 없었을 때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잘 살게 되고 부하게 되고 모든 문제가 없을 때에 심각한 죄악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사사기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에 몸이 약간 약하게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합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으니까 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에 골골 80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타고난 사람들은 몸을 함부로 사용합니다. 이유는 그들의 건강에 문제가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주로 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면 신체가 탁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없는 교회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땅에 문제없는 교회가 있다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제가 그 교회로 옮겨가겠습니다. 하루는 무디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상담을 합니다. "무디 선생님, 문제없는 교회를 저에게 좀 가르쳐 주세요. 제가 세 번이나 교회를 옮겼는데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무디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제가 문제없는 교회를 알긴 아는데 추천을 못해 주겠다."라고 했어요. "왜 못해 줍니까?" "제가 당신을 그 교회에 소개해 주는 그 날로 그 교회는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여러분,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문제없는 가정과 교회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나가는가가 너무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문제 앞에서



2. 결코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17절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으로 왕의 지원을 받게 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지위, 권한, 물자를 확보합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는 현지의 형편과 정황을 살핀 뒤, 백성의 지도자들을 모아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자고 도전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는 느헤미야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 또한 예루살렘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탄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무너진 성벽은 글자 그대로 ‘곤경’이었습니다. NIV 성경에 쓰인 ‘trouble’이라는 표현처럼, 그야말로 ‘문제, 곤란, 골칫거리’였던 것입니다. 아주 신경 쓰이고 거슬리지만 쉽게 해결할 수 없으므로 그대로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상태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며 나름 적응하게 된 삶의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성벽은 ‘수치’였으며, 하루라도 빨리 벗어야 할 불명예였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정의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 또한 바뀌기 시작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문제를 삶의 일부로 인식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사는 것이 최선은 아니었구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 이 의식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초창기 미국의 뉴욕이 번창하자 맨하튼 섬과 부르클린을 왕래하는 사람이 늘어만 갔습니다. 다리가 없던 때라 사람들은 배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워낙 물살이 세서 다리를 세울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존 뢰블링이라는 기술자가 교각 없는 다리를 설계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전문가들이 존을 보고 공상가라고 놀리고 비웃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존 뢰블링은 아들 워싱턴 뢰블링과 함께 교각 없는 다리를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처음부터 난공사였습니다. 불과 몇 달 되지 않아 뜻하지 않은 사고로 존 뢰블링은 공사장에서 숨을 거두었고, 아들 워싱턴 뢰블링은 뇌를 다쳐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면서 중환자실에 누워있게 되었습니다. 뢰블링 부자의 꿈뿐만 아니라, 교각 없는 다리도 좌절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겨우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있었던 워싱턴 뢰블링은 침대에 누워서 자기 아내의 팔을 두드리며 대화를 시도했고 침상에서 다리 공사를 진행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워싱턴 뢰블링의 열심에 감동 받은 공사장의 사람들도 침식을 잊어가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기를 13년, 마침내 브루클린 다리는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83년의 일입니다. 교각 없는 다리를 한번도 본적 없는 사람들의 조롱도 거센 물살도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한 죽음과 장애도 맨하튼 섬과 브루클린 사이에 교각 없는 다리를 세우겠다던 뢰블링 부자의 꿈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이 다리는 교각 없는 최초의 다리라는 것 보다 수많은 좌절에 굴하지 않고 세워진 다리로 더욱 유명합니다. 인생의 거친 돌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운명에 맞서 극복하며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 했던 사람들이 오늘 우리 주위에도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3.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2:17-18절
느헤미야는 고국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나도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이 그곳에 온 목적과 계획에 대해 침묵합니다. 다만 모두 잠든 한밤중에 측근 몇 명과 함께 무너진 현장을 답사할 뿐입니다. 현지 사정에 밝은 귀족이나 관리에게 설명을 요구할 정당한 권한이 있는데도, 느헤미야는 처참한 폐허의 현장을 직접 걸어 다니며 자기 눈으로 살펴보았습니다. -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입을 엽니다. 느2:17-18절에 함께 보십니다.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는 구구절절 설명을 길게 늘어놓지 않습니다. 그는 이 일이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일이며, 느헤미야 한 사람만의 꿈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백성 안에 타오르고 있던 열망이었음을 짚어냅니다. 성전 건축은 ‘너희’가 아니라 ‘우리’의 일이며, 단순한 공사가 아니라 민족의 숙원 사업이라는 것을 되새겨 준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벨론에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 폐허더미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성을 회복하고, 그분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이제 잠들어 있는 우리의 손과 발을 깨워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꾸던 꿈을 다시 이루어 봅시다!”

희미해진 꿈,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는 이 메시지는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자신이 섬겨야 할 공동체를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뜻과 생각을 관철시키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여러분은 왜 이것밖에 못합니까? 하나님의 도성을 폐허더미로 내버려 두고도 마음이 편하던가요? 그러고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얼마든지 질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그는 질타하는 대신, 이스라엘 백성이 잊고 있던 본질을 되새겨 주었습니다. 백성의 영성과 의식 수준은 비록 낮았지만,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꿈과 열정이 일어나도록 이 일에 정당성과 또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문제를 넘고 함께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인생이 만만치 않습니다. 언제 풍랑이 일어날지, 언제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 앞에 우리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여기 한 사람은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응답 앞에 당당히 나아갑니다. 거기엔 강력한 반대도 있고, 이로 인해 포기하고픈 어려움도 있었던 것 사실입니다. 폐허가 된 상안에 사람들도 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설득하고 다시 일어섭니다. 꿈을 잃은 그들과 함께 일어납니다. 오늘 이 아침!! 문제없는 가장, 문제없는 교회 문제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기도할 때가 아닙니까? 모든 노력을 다 해 보셨다구요? 정말 기도해 보셨습니까? 아니 부르짖어 기도해 보셨습니까? 1929년 역시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미국에서의 소위 경제 대 공황은 1933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소위 루스벨트 대통령의 “우리는 두려움 외에는 두려워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겸허하게 신의 도움을 구하며 새 길을 걸을 것입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대 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믿음의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이 경제 대공황의 끝에는 세계 제2차 대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너머 산이었던 이처절한 문제 앞에서도 마침내 세계 대전을 종식하고 그는 대통령직을 물러나며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어두움의 터널을 빠져 나왔습니다. 이제는 기도의 결과로 회복과 번영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문제 앞에 무너지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넘어 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계속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휘슬이 불려질 때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일관성있게 달려야 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하나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제자가 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인생의 마지막 가장 큰 문제는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십자가를 단순한 고통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십자가를 질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얼굴에 땀 방울이 변하여 피 방울이 되기까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엎드려 기도하시는 그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나타나 새 힘을 돋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담담히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은 우리의 깨끗함을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새롭게 삶을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다시 사심은 우리의 다시 삶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당당히 나아갑시다. 새 인생이 시작되실 것입니다. 인생의 장애물을 넘어서실 새 힘을, 새 희망을 얻으시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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