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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성을 쌓는 사람들 느3:1-12 2014년 3월9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3-09 | 조회: 1820
1953년 5월 29일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이 지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산 정상이 정복되었습니다. 이 쾌거의 주인공은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문드 힐러리경 이었습니다. 그가 하산했을 때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이들 에게 힐러리경은 자기 옆에 선 네팔출신의 셀파 텐징 노르게이를 바라보며 "이 사람 때문이지요"하면서 그가 정상 정복을 마치고 내려오다가 경험한 위기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벼랑을 타고 내려오다가 자기를 맨 밧줄이 끊어지고 비상 로프마져 놓치는 순간 노르게이가 자기의 비상로프를 던져 둘이 함께 몸을 엮고 무사히 내려 올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들이 노르게이에게 힐러리경을 구출한 소감을 묻자,조금의 미동도 없이-"뭘요, 우리 등산하는 사람들은 항상 서로 돕지요.--우리는 어차피 운명의 끈으로 묶여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를 가르켜 우리는 요즈음 많이 쓰는 말로 '공동체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온통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고 또 그들이 한 일이 나오는데 어떻게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세계적인 강해 설교자인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느헤미야 3장을 강해할 때 의미가 없다고 하여 3장을 빼고 강해하셨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수많은 사람들을 왜 여기에 나열했을까 생각해보면 의미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15가지 이상의 직업이 나오고 75명의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고 또 무명의 사람들이 등장을 합니다. 성경의 기록은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도 우리가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무너진 성을 쌓는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 줍니다.

지금 본문에 나오는 성을 쌓는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함께 서로 격려해가며 무너진 성벽을 쌓고 불탄 성문과 망대를 세웁니다. 이 일에 동참한 사람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 출신 배경이 다양했습니다. 연령과 성별이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이 공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느6:15절에서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건축을 시작한 지 52일 만에 성벽 건축을 마쳤진 것입니다. 이것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142년 동안 무너져 있던 성벽을 단 52일 만에 재건했다는 말입니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함께 하는 사역의 중요성입니다. 물론 느헤미야의 철저한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한 사람이 52일 만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것이 아닙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 일을 했습니다. - 어느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해 왜 우리가 성을 쌓아야 하는지를 3가지 관점에서 리더십을 가지고 말합니다.




첫째, 동기부여의 원칙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이 건축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백성들이 자기 문제로 받아들여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 좋고 필요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고, 자기 생존과 연관이 없으면 그리고 자기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이 성전을 짓는 일도 아니고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그저 성을 쌓는 일입니다. 성을 쌓음으로 인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 손해를 보는 사람 등, 이에 따라 얽힌 이해관계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느헤미야는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1장 10절에서 왜 이 일을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2:3절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축복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허락하셨기에 어렵고 힘들지라도 민족의 미래를 펼쳐나갈 땅이라 믿고 있는 느헤미야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2장 1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이제 중건합시다.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맙시다.’ 한마디로 성을 중건하는 일은 너와 나의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느헤미야가 현실을 극복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수 있었던 원리는 연합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또한 3장 전체는 성벽 각 구역 공사를 책임진 사람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벽 재건 공사에 참여한 각계각층, 각양각생의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15가지 이상의 직업이 나오고75명의 사람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전체성벽을 42구역으로 나누고, 10개의 문과 4개의 망들을 세워 그곳에 필요한 사람들을 배치했습니다.

여러분 이 3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다음은(next)’인데, 원어로 ‘웨알’이라고 합니다. ‘웨알’이란 계획과 분담과 책임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무려 31번에 걸쳐 ‘그 다음은’이라는 연결고리의 말씀으로 공사에 참여한 사람, 공사구역, 공사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부분도 빠지지 않고, 백성들이 한 마음이 되어 공사에 참여했습니다. 자기 맡은 공사를 빼먹은 사람도 없고, 포기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그 다음은>으로 연결되어서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한 구역마다 사람들은 맡은 구역에서 할 일을 분담했고, 맡은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도록 했던 것입니다. 75명의 이름이 다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한 사람도 소외됨 없이, 연합해서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완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현실을 극복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수 있었던 셋째 원리는 격려와 칭찬의 원리입니다. 느헤미야 3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행한 일들이 나옵니다. 문짝, 문고리 달아 놓은 것까지 기록이 다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까지 다 적어 놓았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문을 펴면 온통 비판의 글들이 가득합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비판하고, 고용인과 고용주들은 서로의 잘못을 비판합니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으로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과 이 사회를 세우는 격려의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대입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우리가 바로 격려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7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협력했지만, 그렇지 않고 구경만 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같이 5절을 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무슨 말입니까? 모두가 헌신하는데 드고아의 소위 엘리트 귀족들은 이 과정에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구경꾼처럼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아무런 수고와 아무런 헌신이 없습니다. 참 답답하지 않습니까? 이방인도 나오고 가난한 자도 나오고 심지어 여인들도 나와 함께 하는데 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져버립니다. 드고아 귀족들은 핑계를 대고 빠지면 될 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시고 성경에 남기셨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사람이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한 마음 되어 건축하는 예루살렘 성을 보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은 오늘 날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상징하지 않습니까?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는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까요? 오늘 느헤미야처럼 무너진 성을 다시 재건하는 것처럼 다시 세워야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를 성전의 작은 벽돌로 비유합니다. 엡2:20-22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모퉁이 돌은 보잘 것 없는 돌이 아니라 corner stone입니다. 기준이 되는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즉 예수님은 모든 교회의 기준이요 중심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진리의 말씀이 기준이 됩니다.

여기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온전한 건물이 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작은 건물들이 서로 잘 연결될 때 멋지고, 아름다운 건물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서는 성도 각 개인이 믿음과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어떤 공격에도 끄덕하지 않는 강건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불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기 위해 지도자와 평민, 대제사장,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 남성과 여성의 각계각층 사람들과 각양각색의 직업군들이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 공사에 참여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를 보세요. 처음에는 다 잘 자랐습니다. 처음엔 양질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목회자도 병들고 자라기를 멈춰버리고 교회 안에 중직을 맡은 직분자들도 다 배가 불러 성장을 멈춰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가 안 나오나, 버가모나 두아디라교회처럼 세속화를 받아들여 문란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고 자기 쾌락을 즐기는데 정신이 팔린 성도들만 득실 득실거리는 교회가 되버리지 않나 또 영적으로 죽어버리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스스로 배가 불러 자만하며 나는 이만하면 됐다는 열심히 다 식어버려서 주님이 보실 때는 다 토해내고 싶은 역겨운 교회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장이 멈춰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참 무서운 병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건강해야 합니다.(서로 인사- 건강하게 삽시다.) 오늘 희귀한 불치병 가운데 하나는 “프로제리아”(Progeria) 라는 병이 있습니다. 일명 “조로증”입니다. 이 병은 주로 아이들에게 걸리는 병인데 아이들이 출생하여 자라다가 2개월쯤부터 3년 사이의 아이들에게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 병이 오면 어느 날부터 성장이 멈추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세포가 정상인보다 10배나 더 빨리 늙어갑니다.

그래서 체구가 왜소해지고 탈모증세가 나타나고 어린 아이인데도 피부주름이 노인처럼 되고 어른처럼 동맥경화증에 걸리고 노쇠현상이 급격이 나타나 나이는 분명 어린아이인데도 생김새는 노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부분 10년 정도 생존하다가 생물학적인 노화과정을 다 거친 후 죽는다고 합니다. 성장을 안 하고 도중에 멈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때를 따라 잘 자라면 하나님께 영광, 남에겐 유익, 자신에겐 기쁨과 복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지 못하면 하나님께 아픔이요, 남에겐 부덕하며, 자신에겐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때를 따라 자라야 되듯이 우리의 믿음도 자라가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되고 인격이 자라야 됩니다. 이는 너무너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자라지 않는 발육부진의 자녀를 둔 가정에 둔 부모는 얼마나 고통이 큽니까? 발육이 멈춰버린 교인들만 그득한 교회에 가 보세요. 기도하지 않습니다. 봉사가 없습니다. 헌신도 열심도 없는 그런 모습으로 바짝 메말라 있어요. 좋은 교회가 되려면 목회자로부터 어린이까지 계속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성장하고 계십니까? 나는 주님이 서 계신 곳까지 가기 위해서 얼마나 성장합니까?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준비하고 열심히 기도합니까?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 얼마나 은혜를 사모합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라면 천리만리라도 달려갈 만큼 갈급한 심령이 있습니까? 여러분 내가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쳐서 날마다 복종시킵니까? 아예 그런 노력 안하면 문제가 일어나요. 특별히 교회 안에 중직을 맡은 분들, 내가 직분만 맡으면 다 된 줄 알고 그 다음엔 성장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다른 교회를 가면 그런 사례를 너무 너무 많이 봅니다. 직분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모두가 자라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 이 무너진 성벽을 쌓고 불에 탄 성문을 다시 다는, 그리도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망대를 올리는 이 일이 언제 시작이 되었습니까? 느헤미야 3장의 서두는 ‘그때에’로 시작합니다. 1절입니다. “그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살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그때가 언제입니까? 느헤미야가 백성들과 함께 성벽을 건축한다는 소문을 들은 주변국의 총독들인 산발랏, 도비야, 게셈이 비웃고 업신 거리고 모함할 때입니다. 힘겨운 상황입니다. 주변 총독들의 인신공격과 모함과 방해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느헤미야는 백성들과 함께 뜻을 모아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우리를 주저앉히고 절망스럽게 하는 소식들이 많습니다. 나는 지금도 내 귓전에 들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티에서 콜레라가 창궐하는 한 산속의 부족들에게 약과 식품을 가지고 유엔 집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 깊은 산속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마치 원시 시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은 것처럼 마을의 광경을 보고 아픔을 느꼈습니다. 물이 귀하다보니 콜레라가 마을 전체를 덮는 그런 고통이 와도 손도 못쓰고 죽음을 운명처럼 바라보는 그들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눈의 초점을 잃어버린 채로 여기저기 누워 쓰러져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것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삶을 차라리 포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젊은이도 있었어요. 제가 한 청년에게 접근을 해서 예수 믿으시죠. 예수 믿으세요. 그런데 들은 척도 안해요. 제가 큰 소리로 예수님은 당신의 희망이 되십니다. ‘Jesus is your hope’ 예수님은 당신의 희망이 되십니다. 그랬더니 얼굴을 쳐다보면서 두 마디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No hope, No hope 희망 없어요. 희망 없어요. 과연 희망이 없을까요?

느헤미야가 가정 힘들 때, 그는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 합니다. 1:5절에 “크신 하나님, 언약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 궁휼이 많으신 하나님” -오늘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 되십니다. 이때 일수록 우리가 더욱 한마음이 되어서 나에게 맡긴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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