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느4:1-6. 2014년 3월16일 주일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3-16 |
조회: 1579
어떤 교인 한 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은사가 꼭 하나밖에 없어서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기독교 역사에는 단 하나의 은사를 가지고도 주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성도님의 그 한 가지 은사는 무엇이지요?"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비판의 은사인데요"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다시 "그렇군요. 저는 그 은사도 유익하게 쓰여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성도님이 그 은사를 가지고 남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을 비판하는 일에 쓰신다면 말입니다"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성경에는 비판이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비판은 거의 분별과 동의어로 쓰여 집니다. 분별의 동기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개인과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것에 궁극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분별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분별은 영분별과 같이 은사의 하나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잘 분별하여 사랑으로 충고하는 이웃들에 대하여 열린 귀와 열린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비판은 개인과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일에 궁극적인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은 하나님이 아닌 사탄에게서 온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비판을 삼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마7:1,2절에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비판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바로 이런 부정적인 비판으로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던 예루살렘 성이 극적으로 세워지는 현장 속에서 산발락과 도비야, 게셈은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성 쌓는 일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목표를 세우고 어떤 일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할 때 누군가 비판하고 반대하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여러분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한 대를 맞으면 두세대를 때립니다. 그 결과 전면전이 벌어지고 성경말씀과 같이 피차 망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승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은 뒤로 물러섭니다. 비판과 반대라는 첨예한 공격 앞에 뒤로 물러나지만, 패배의식 때문에 마음에 한을 품고 병을 얻거나 기회가 되면 폭발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아 반대했던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진행하는 중에 사람들이 반대하고 조롱하고 경멸하며 나올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느헤미먀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할 때, 그런 파괴적인 비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 1절에 어떻게 비난을 합니까?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여기에 산발랏이 나옵니다. 당시 산발랏은 사마리아 지역의 총독이었습니다. 유대의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은 이 산발랏에 의해 건립되었고, 이 성전의 대제사장으로 자기 사위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든지 사실이 아니든지, 사마리아를 다스리고 있는 산발랏은 무너져있는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루살렘 성이 재거되면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산발랏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고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3절에 보면 암몬 사람 도비야의 조롱이 나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옆에서 산발랏의 비난을 듣고 있던 도비야도 거들었습니다. 만약 무너져 있는 예루살렘 성이 다시 재건된다 할지라도 너무 약해서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조롱과 비난은 산발랏과 도비야 두 사람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비난하는 반대 세력들이 많아졌습니다. 도비야에 이어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산발랏의 방해 작전에 동참했습니다. 그 때 비전의 사람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을까요?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느헤미야의 지혜를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1.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비난을 받았을 때 화를 낼 수도 있고, 비난하는 사람을 향해 욕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비난한 그 사람을 향해 반드시 그 이상으로 갚아주겠다고 복수를 다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따진다고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자대면하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만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만 더 생기기 때문입니다.
죤 드라이든은 “고통을 받을 때는 침묵이 최고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토마스 칼라일은 “언어는 위대하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위대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비난을 많이 받으신 분도 없습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오해도 받고, 없는 자리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면전에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던 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곰곰이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해를 직접 풀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조용하게 침묵하셨습니다. 사실 침묵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 중에 하나입니다. 느헤미야 당시의 주변 부족 지도자들의 비판은 거의 조롱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 편에서는 얼마나 분노할만한 조롱들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끌어 안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4-5절의 느헤미야의 기도 속에서 그가 당시에 느꼈던 모멸감과 분노를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는 4절에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원컨대 자기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5절에서 이런 자들은 용서하셔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지나친 기도라고 느끼십니까? 오죽하면 그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얼마나 억울하게 느꼈으면 그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직접적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방에 대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대신 그 문제를 가지고 주께 나아와 주님께 기도하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기도가 비판을 대응하는 그의 첫 번째 처방이었던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느헤미야의 이런 저주기도가 과연 성경적인가를 논의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우리시대의 문학가요 기독교 변증가였던 C.S. Lewis가 구도자이었던 시절 성경을 읽으며 첫째로 부딪쳤던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기독교를 알아보기 위해 시편을 읽다가 한때 성경을 던져버린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아름다울 시편을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다가 원수들에 대한 저주들이 기록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어떻게 성경인가?"라는 물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묵상하다가 깨달은 것은 적어도 성경은 인간의 감정에 가장 정직한 책이란 생각과 함께 성경의 하나님 특히 시편의 하나님이 "이런 인생들의 누군가를 저주하고픈 마음까지도 받아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하나님--그가 어떤 불평, 어떤 좌절, 어떤 감정을 쏟아 놓아도 넉넉히 들어주시고 받아 주시는 그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감정을 쏟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이 계십니까? 복수하고 싶은 원수가 생기셨습니까? 그러면 주께 나아오십시오. 주께 쏟아 놓으십시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그분에게 말하십시오. 그는 당신이 어떤 말을 해도 잠잠히 나무라지 않고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도우실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표현합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온전히 받아들여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분노할 일의 연속인 삶을 살았던 다윗, 시편 62편을 통해 자신에게 분노가 있고 반대와 비판에 부딪힐 때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중략)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여러분 가운데 토할 때 아까워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속에 있는 것을 그냥 다 토해내지 않습니까? 다윗은 안타깝고 억울한 심정을 하나님께 다 토했다고 했습니다.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고 내 마음과 소원을 알아주시는 분도 그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풀 수 있을 듯이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쏟아내고 있습니까? 오히려 쏟아 내었기 때문에 큰 아픔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가슴에 묻어두면 병이 됩니다. 어딘가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을 속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감정도 창조하신 분이 우리가 얼마만큼 분노하고 속상해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주님 앞에 쏟아내십시오. 주님이 그 마음을 받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대와 비판에 직면하여 좌절과 절망을 느낄 때 해야 할 일은 사람들에게 불평과 원망 그리고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먼저 기도하는 것이 비판과 반대를 해결하는 신앙인의 첫째 되어야 할 방법입니다.
Ⅱ. 위기관리를 위해 두 가지를 함니다.
자칫하면 공사가 중단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흘러갑니다. 지도자로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입니다. 느헤미야는 두 가지 조치를 취합니다. 첫째는 든든한 방어태세를 갖춥니다.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을 가족별로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합니다. 여기 보면 13절에 “내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이 종족에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일반적으로 적의 시야에 노출되는 낮고 넓은 곳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중무장한 군대가 배치되었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줌으로써 이쪽의 경계태세를 보여주고 상대방의 기세를 꺾으려고 합니다.
둘째로, 백성과 지도자들을 격려합니다.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명합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들을 위하여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하여 싸우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서는 것을 보면서 원수들은 자기들의 작전이 노출된 것을 알고 공격계획을 취소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활 한번 쏘지 않고 한 사람의 피도 흘리지 않고 전쟁을 막습니다. 느헤미야의 전략이 먹혀들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자기가 세운 전략이 좋아서 적이 계획을 포기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꾀를 폐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유다 백성들을 원수의 손에서 지키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성벽 재건을 완성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위협적인 분위기가 수그러들자 백성들은 성벽 공사를 재개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적의 침공계획을 포기한 것을 알고도 경계태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 일터로 돌아가서 다시 성벽을 쌓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한 그룹이 공사를 하면 다른 그룹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지고 파수를 보게 합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관리들도 느헤미야를 도와 성벽을 쌓는 백성들을 뒤에서 지원합니다.
그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무기를 잡게 하며 각자 칼을 허리에 차고 일하게 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합니다. 느헤미야 자신은 나팔을 부는 자는 항상 자기 곁에 두면서 적의 기습이 있을 경우 나팔을 불어 백성들을 한 군데로 집결시켜 싸울 준비를 갖춥니다. “공사가 너무 광범위하여 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나팔 소리를 들으면 우리 있는 곳으로 달려오라.”
철저하게 싸울 준비를 하면서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강한 믿음을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은 매일 동이 틀 때부터 별이 나올 때까지 절반은 계속 일을 하며 절반은 창을 들고 경계를 합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성 밖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자기들을 위해 밤에는 경비하고 낮에는 일하게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와 그의 형제들, 종들, 그리고 느헤미야와 함께 있는 경비병들은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항상 무기를 휴대합니다. 이것은 언제 적이 쳐들어와도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결의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은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무기를 들고 가서 일체 적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사십니까? 우리가 살면서 건강한 비판은 믿음으로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면 거기엔 정말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대를 죽이고 파괴하는 비판은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만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공격했던 원수들의 작전의 하나는 일종의 김빼기 작전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의욕을 좌절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만일 실망하여 성건축을 포기했더라면 원수들은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이것이 바로 사단의 작전인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의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사역이 진전되지 못하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다행한 것은 당시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작전에 말려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 하였음이니라" 여기 ‘마음을 들여’라는 말은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오히려 비온 뒤에 땅이 더욱 단단 蠻測 것처럼 더욱 더 믿음의 행보가 일어나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바램대로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으나 자기로 인해 하나님 뜻이 좌절되는 것을 허용치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쪽을 선택하셨습니다. 자기를 못 박는 로마병정보다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였기에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쏟아진 비난과 반대의 말을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의 친구다. 율법의 파괴자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정신 나간 참람한 자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다.’ 정말 듣기 어려운 비난의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하는 일은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는 것이라 말씀하며 쏟아지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이루고자 정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간직해야 할 것은 반대나 비판하는 입장에 서거나 반대로 받는 입장에 서거나,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나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가, 내 생각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시대는 비판과 반대로 인해 소중한 것을 너무 많이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무엇을 위한 비판과 반대인지를 살펴보면서 역사 앞에서 후에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를 살피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어떤 일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욕을 먹고 비난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나쁜 일을 했으면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일이나 실수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비난을 받는다면,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런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데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뒤에서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만히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비난을 극복한 느헤미야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을 때마다 느헤미야처럼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우기보다, 침묵하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을 때마다 느헤미야처럼,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으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게 비난받을 때마다, 비난하는 사람을 신경 쓰기보다 느헤미야처럼 이루어야 할 비전과 달려갈 목표에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귀한 손길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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