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극복하는 지혜 느5:1-5절, 13절. 2014년 3월 23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3-24 |
조회: 1378
사람은 누구나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끊임없는 위기의 연속입니다. 요즘같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하기 쉽습니다. 건강의 위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았는데 갑자기 찾아온 질병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직장의 위기가 있습니다. 평갑작스런 회사의 부도로 하루아침에 실직을 합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치열한 경쟁구조 속에서 한순간 방심하면 평생 쌓아온 회사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요즘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을 합니다. 교회 주변에도 수많은 가게들이 새롭게 시작했다가 금방 문을 닫습니다. 지금 잘 된다고 현실에 안주하면 언제 위기에 직면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영적침체라는 신앙의 위기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내에도 위기가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를 공격합니다. 이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무너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파도와 같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그 사람의 능력이요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위기를 대하는 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갑작스런 위기를 만나면 좌절하거나 낙심합니다. 남을 원망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위기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고 문제 자체에 매달려 헤매게 됩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입니다. 한자어로 위기(危機, crisis)는 '기회(chance)'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에서는 누가 능력 있는 사람인가를 가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전쟁 같은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위기 속에서 그 사람의 지혜가 빛이 납니다. 위기 속에서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이 드러납니다. 위기를 새로운 도약과 발전의 기회로 삼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지난주도 보셨지만,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성벽 공사가 중단 될 위기에 처합니다.
첫 번째는 외적인 박해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귀환을 허락합니다. 군대의 호위도 받고, 성을 재건할 물자도 지원 받았습니다. 이제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2-3장을 보면 저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낡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 곳곳을 손을 보기 시작합니다. 힘을 다해서 성벽을 다시 쌓습니다. 그런데 이 때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 성벽을 쌓는 것을 우연치 않는 적들이 방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적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산발랏입니다. 그는 북쪽 사마리아를 통치하는 자입니다.
둘째, 도비야입니다. 그는 암몬을 통치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암몬은 예루살렘의 동쪽 요단강 건너에 있는 나라입니다.
셋째는 아라비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아스돗은 블레셋에 속한 도시로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무력으로도 안 되니까 회유와 실인 음모, 그리고 타협등 별의 별 수단을 다 써서 어떻해서라도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방해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견뎌낼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가 그들의 내면의 문제입니다.
5:1절 이하에 보면 이 성벽을 쌓는 이 시기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모두가 하나가 되어 성벽을 쌓는 일에 최선을 다 합니다. 그런데 흉년이 든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생존에 위협까지 받습니다. 물질이 없다 보니 있는 자들에게 사채를 써가며 굶주림을 면하는데 이게 한계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한 순간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관행에 대한 불만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쌓이다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1절입니다.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이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대사람들을 원망하는데” - 여기 원망했다
여러분, 원망은 무서운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왜 멸망했는지 아십니까? 원망 때문에 멸망한 겁니다. 원망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늘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진 사람에게 가서 차라리 불평을 한다면 그 일이 개혁될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직접 얘기하지 않고 저 뒤에서 속삭입니다. 한 두 사람이 알고 또 얘기하다보면 모든 인생이, 그 교회가 하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게 보이는 겁니다.
그 당시 저들이 원망의 자리에 서게 된 이유는 첫째는, 기근 다른 말로 하면 흉년 때문이었습니다.(3절) 둘째는 과도한 세금징수 때문이었습니다.(4절) 셋째는, 과도한 이자놀이 때문이었습니다.(5절--갚을 수 없는 이자 때문에 자식들까지 종으로 잡혀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절망 속에 부르짖으며 삶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부자와 귀족들은 사람들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내지 못하면 그 자녀를 데려다 이방인에게 팔았습니다. 민족 전체가 성벽을 다시 짓겠다고 난리인 와중에, 자신의 재산이나 늘리고 있던 겁니다.
그러니 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왜 우리만 이렇게 고통 받아야 되지? 우리 아이는 노예로 팔려 가는데, 어떻게 저들의 자녀는 호의호식할 수 있는 거냐?” “다 같은 이스라엘 사람인데 우린 풀부리 같은 걸로 연명하고, 저들은 잘 먹어서 피둥피둥 살만 찐다. 도대체 이게 뭔가?” “이러고도 우리가 형제란 말이냐? 우리가 지금 뭐 때문에 이러고 사는 건데? 우린 더 이상 못하겠다!” 문제는 정말 정말 심각했습니다. 공사의 어려움과 주변 민족의 방해 공작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한데 뭉치게 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습니다. 다 같이 힘들고 똑같이 공격받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번 문제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서로 다른 입장과 상황 때문에 내부에서 분열과 분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위기가 다가오면 공동체의 마음 흩어집니다.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서로 책임 전가하고 추궁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 살 길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다 다투고 분열이 됩니다. 느헤미야의 역량을 볼 때, 그에게 있어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일하기로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격려하며, 성전과 성을 지어서 그분의 백성으로 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분열과 분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이런 분위기라면 성을 다시 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성벽을 쌓는다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이렇게 온갖 모함을 하고 흔들어 댑니까? 300 영화 <300>의 주 무대인 고대 그리스 도시 ‘스파르타’는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 습니다. 그곳은 평야가 비옥하여 자급자족이 가능했습니다. 덕분에 외부와의 교류 없이 폐쇄적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스파르타는 B.C. 4세기 말까지 성벽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스파르타 왕이 이웃 나라 군주에게 이런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군대나 무기도 스파르타의 성벽을 뚫을 수 없소!”
그러자 이웃 나라 군주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습니다. “폐하, 스파르타에는 성벽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폐하께서 그토록 자랑하시는 성벽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스파르타 왕이 자신의 군대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기 있지 않소! 스파르타의 군대가 곧 성벽이고, 모든 사람이 그 성벽을 이루는 벽돌이라오!” 정말 근사하지 않습니까? 우리말로 표현하면 ‘동성교회가 곧 성벽이고 여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벽돌’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도 IMF 이후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를 보십시오. 절대가치가 사라지고 전통적인 기반, 그리고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 직장도 가정도 사회도 실리문화로 바뀝니다. 요즘사회는 20-40대를 쥐어짜서 어떤 목적을 극대화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래 위의 질서가 무너지고, 공동체 의식이 사라져갑니다. ‘세대 간 격차’는 갈수록 심화되고, 사회는 그에 따른 막대한 재정 손실을 감수합니다. 한쪽에서는 청년 실업을 걱정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령화 사회에 대한 고용 대책을 요구합니다.
이와 같은 극단적 다양함을 감수하며 한 시대를 공존하는 것이 버거운 시대입니다. 모든 세대는 저마다의 아픔과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조직과 가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다녔던 50대의 깊은 좌절과 60대의 절망, 늘어난 수명을 대비하여 제 2의 인생을 준비해야하는 30대와 40대의 초조함, 삭막한 경쟁 사회에 혼자 내던져질 20대의 두려움과 고달픔…. 여기에 예배드리는 여러분도 얼마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갈등이 많습니까?
그러나 교회만 오면, 주의 은혜 앞에 나를 맡기고 서로를 받아주고 격려하며, 나아갈 때, 누가 뭐래도 그 교회로 달려오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기성세대가 청년세대를, 자녀세대가 부모세대를 마주 보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한다면, 우리 교회는 공동체로서 더욱 견고하게 새워질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높이 자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 서부에 서식하는 ‘레드우드’(소나무목 측백나무과의 나무)입니다. 레드우드의 밑동 지름은 10미터 이상이며, 100미터 넘는 키를 자랑합니다. 가뭄에도 좀처럼 타거나 흔들리지 않지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뿌리가 2-3미터밖에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나무의 높이와 너비에 비해 뿌리가 별로 깊지 않다는 말입니다.
겨우 2-3미터 정도 되는 뿌리가 그토록 엄청난 몸집을 어떻게 견뎌 낼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은 바로 ‘공동체’에 있습니다. 레드우드의 뿌리는 땅 밑이 아니라 옆으로 25미터 이상 뻗어 가는데, 한 뿌리에서 여러 그루가 자랍니다. 즉, 여러 그루가 한 뿌리에 연결되어 ‘나무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서로 얽히고설키는 가운데 붙잡아 주고 지지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그 지체 된 우리는 한 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으로 거듭난 주의 자녀들이 한 뜻과 한마음과 한 입술로 무장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깨지면 구성원 전체에게로 피해가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성벽을 쌓는 것은 단순히 외형적인 벽돌 한 장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믿음의 벽돌을 쌓는 그래서 외부가 견고해 지는 것처럼 내부도 믿음으로 다져지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공동체를 통한 개혁과 변화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시작을 합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5장 6, 7절 앞부분을 보면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중심에 계획하고”라고 나옵니다. ‘계획하다’는 아람어 ‘말라크’에서 온 단어로 ‘심사숙고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즉, 내가 내 자신과 상담하고, 의논하며, 깊이 생각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6절 ‘크게 노하여’ 와 7절 ‘중심에 계획하고’는 서로 상반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 일어난 일에 느헤미야도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고 회의를 열 정도로 심각한 문제임을 인식합니다.
보세요. 백성들은 자신들이 먹지도 못하고 굶고 있으며, 빚을 지고, 세금을 내기 위해 집과 포도원을 팔았다고 호소합니다. ‘부자와 귀족의 자식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갖는데, 왜 우리 자식들은 종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같은 민족이 아닌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 앞에 분노가 일어납니다.그러나 느헤미야는 좀더 본질적인 원인을 생각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공동체 의식’에 이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자신의 가족이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8절에서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을 쌓아도 이스라엘 백성이 본질적으로 하나되는 공동체 의식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차량봉사안내와 예배 안내, 교사나 성가대 그리고 여러 직분을 맡아서 맡은 대로 봉사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 본질인 구원의 소식을 증거하고 전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하늘로부터 임하는 은혜와 축복으로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바꿔가기 위해 이렇게 모여 예배 드리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직분자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분자가 담당하고 있는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을 잃고 있다면 직분도 교회건물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혼란과 어려움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동안 자칫 잃어버렸을 수도 있는 본질을 찾을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느헤미야는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갈 기회로 삼았습니다. 13절 말씀 느헤미야는 갈등을 통해서 백성들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이 바로 설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내가 옷자락을 떨치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찌니 저는 곧 이렇게 떨쳐져 빌찌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그랬을 때 온 회중이 ‘아멘’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뜻을 행하는 변화가 생깁니다.
지금 이들은 하나가 되기 위해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남을 억울하게 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를 세워주는 성숙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희생이 들어갑니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늘 남의 허물만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섰다면, 그 은혜의 힘을 가지고 서로 세워주는 일에 전심을 다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바로 자신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 때면 사람들이 얼마나 더욱 이기적이 되는지 모릅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 장애인 보호시설에 돕는 손길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삶의 부담을 나누려 하지 않고 희생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느헤미야는 하나님 말씀이 그 속에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롬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흐름을 따라 갈 것이 아니라, 갈등의 원인은 우리 속에 하나님 말씀이 없기 때문임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되새기는 기회로 삼을 때에 말씀이 약속하시는 축복을 다시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실수도 어려움도 많았던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끝까지 쓰신 이유가 있습니다. 위기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늘 자기를 살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잘못을 지적할 때 왕좌에서 내려와 옷을 찢으며, 재를 뿌리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기도하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시고 주님 앞에서 쫓아 내지 말라며 회개했습니다. 말씀을 다시 되새기며, 말씀 따라 살아가는 기회로 삼았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끝까지 쓰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뜻을 따르지 않아 큰 물고기 뱃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서라도 하나님 말씀을 붙잡았을 때 다시 사명을 이룰 기회를 얻었습니다. 위기와 갈등이 올 때 여러분의 행동 원칙은 무엇입니까? 본능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다시 세울 기회로 삼고 신앙적으로 돌아보는 것입니까?미국 실업가로 장관까지 지냈던 존 워너 메이커는 백화점 왕으로 불립니다. 존 워너 메이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탁월한 판단력과 뛰어난 경영 능력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메이커가 투자해서 구입한 물건은 매번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한번은 신문기자가 메이커에게 지금까지 투자한 것 중에 가장 성공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메이커는 ‘열두 살 때에 2불50센트를 투자해서 산 성경책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그 성경책이 오늘날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시한번 말씀 드리지만 갈등 그리고 방황의 시간 동안 감정대로 따라가지 마십시오. 오히려 역으로 하나님 말씀이 내 삶과 가정 그리고 민족 공동체 속에 바로 세워지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고 느헤미야처럼 새롭게 결단하는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을 드린 적이 있습니까? 위기와 어려움의 때에 ‘이제는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한번이라도 이런 서원을 드린 적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말씀의 원칙을 다시 세울 때입니다. 가정에서 말씀을 다시 세우고, 교회에서 말씀을 다시 세우고, 내 삶의 여정 속에 무너진 말씀의 단이 무엇인지 돌아볼 때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 같이 느껴도 하나님께서 손 놓아버리시면 쓸모없습니다. 하나님께 인생의 마지막까지 붙들린바 되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심령 속에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먼저 본질을 찾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지금까지 살려 두셨는가? 왜 이 가정과 교회를 허락하셨는가? 왜 이 한반도로 나를 부르셨는가?’ 본질적인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는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원인을 다른 데서 찾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마음속에 잃어버린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과 주님 말씀을 다시 세우고, 주의 은혜로 갈등과 위기를 극복하는 모든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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