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완성, 그 이후 느 6:15-19절 7:1-4절 2014년 3월30일 주일 낮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3-30 |
조회: 1449
요즘 ‘꽃보다 할배’에서 스페인을 배경으로 촬영한 것이 아옵니다. 그런데 첫 방송에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당이 나옵니다. 이 건물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20세기 최고의 건축가가 지은 건물입니다. 가우디가 건축한 유명한 건축물들이 여럿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바르셀로나에 세워진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당입니다. <사진1> 성가족성당이라고 불리는 이 성당은 너비가 150m이고, 높이가 17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건물입니다. 지금도 이 성당을 보기 위해서 전 세계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건축물입니다.
이 성당은 가우디가 31살 때인 1882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그가 74세에 사망할 때까지 온 열정을 다 바쳐 공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192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후에도 지금까지 거의 90년 가까이 공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건축가 가우디의 생각과 맞물려 있습니다. 가우디는 이 성당을 건축하면서 건축공사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 ‘이 작품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서두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2026년도에 건축을 완공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지만, 언제 공사가 끝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계획대로 2026년에 완성된다 하더라도 이 성당은 무려 150여년에 걸쳐 지어진 건축물이 되는 셈입니다.
또 하나의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사진2> 이것은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시에 세워진 ‘T-30’이라고 이름 붙여진 30층짜리 호텔 건물입니다. 이 호텔은 아주 단 기간에 지어진 건물로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호텔을 짓는데 얼마나 걸린 줄 아십니까? 바닥 다지기 등 기초 공사를 제외하고 30층짜리 건물만 짓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2주일이었습니다. 건축에 필요한 대부분의 부품들을 공장에서 만들어 가져와서 조립하는 ‘조립식 기법’을 사용해서 그렇게 짧은 기간에 30층짜리 건물을 완공했다고 합니다.
‘안전성에 문제가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데, 이 호텔을 지은 건축회사는 지진 9.0의 강진에도 버틸 수 있을 정도라고 주장합니다. 2주일 만에 지었다는 중국의 ‘T-30’ 호텔 건물, 2주일 만에 지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불안해서 마음 편안하게 그 호텔을 이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도 그렇습니다. 과정 없이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때로는 힘든 과정을 인내하며 겪어내기도 하고, 그 과정에 수없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내고, 가고 싶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중고등학교 때에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도 그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때로는 실패하기도 하고,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 애를 태우며 부단히 뛰어다녀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적인 사업을 일구어낼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메달을 따거나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편히 쉬는 시간에도 땀을 흘리며 훈련을 해야 합니다. 훈련하지 않고 훌륭한 운동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음악가나 화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의 과정 없이 그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그건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도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답지 못한 모습, 여전히 세상을 닮아 있는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해져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다고 해서 우리의 인격과 삶이 완전히 거룩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 거룩하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라고 불러주신 것뿐이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거룩해져 가야 합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성화는 거룩해져가는 과정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드디어 6:15절에 보면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52일 만에 성벽 공사가 완성이 됩니다. 말이 52일이지 이 성벽을 쌓는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뿔뿔히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에 올 수 없던 사람인 느헤미야가 오면서부터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꿈꾸다 포기해 버린 일을 다시 시도하고, 감당할 수 없는 장애물을 극복해 나가며,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넘어 성벽을 완성합니다. 마지막 돌을 쌓아 올렸을 때 그들이 느꼈을 감격의 크기를 우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 완공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성의 완공보다 그 안에서 살아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야 할 사명이 무엇이가를 더 깊이 생각을 합니다. 성벽이 ‘틀’이라면, 이제 그 틀에 담아야 할 ‘내용’, 즉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서는 두 가지의 성벽을 쌓는 이야기입니다. 1-7장에서는 공동체를 상징하는 ‘물리적인 성벽’을 쌓고, 8-13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내면세계와 삶이라는 ‘영적인 성벽’을 쌓습니다. 7장에 보면
1. 사람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1절을 보실까요? "성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짝 단 것이 끝이 아니라 그 다음 작업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했습니까? 1절 후반부를 읽어 보실까요?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사람을 세운 것입니다.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당신이 기적 같은 놀라운 선교를 할 수 있었던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프로그램도 아니고 전술 전략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그와 함께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어떤 큰일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위기에도, 절박함에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열두 제자 곧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는 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제일 먼저 세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은 사실 모두 레위인들입니다. 레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강조하면서 적어놓은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길러야 하고 세워야 하는데 제일 먼저 어떤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는 말입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를 길러내야 합니다. 프로그램 잘 짜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줄 아는 사람을 길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날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예외 없이 예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예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진심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4장 23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는 누구입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즉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진리 되시는 예수님과 더불어 예배하는 자입니다.
몸은 예배의 자리에 있지만 마음이 딴 데 있으면 참 예배의 모습은 아닙니다. 우리는 찬양을 드려도 열심히 불러야 합니다. 음정 박자는 좀 틀려도 괜찮습니다. 립 씽크만 하지 마시고, 크게 찬양하십시오. 찬양 부를 때 악한 영이 떠나갑니다. 찬양을 부를 때 마음에 기쁨이 찾아옵니다. 찬양 부를 때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기도드릴 때도 전심을 기도하십시오. 오늘 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면 성전을 떠나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시고 매달려 보십시오. 주님은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3)”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내 영이 살아야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머리로 듣는 말씀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말씀이 내 심령에 부딪힐 때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십시오. 우리는 말씀을 듣다가 낙심한 영혼이 새 힘을 얻습니다. 말씀을 통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예물을 드릴 때도 정성을 다해 구별해서 드려야 합니다. 최선을 것을 드려야 합니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액수가 아닌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넘치도록 채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믿으십니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받으시고, 만복으로 채우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 순서 순서마다 마음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자신의 목을 치는 심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어찌 자신의 목숨을 내건 자리에서 하품하며, 졸수 있습니까? 이것은 마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배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 받으면 그것을 쏟아버리게 만듭니다. 예배의 승리는 곧 인생의 승리입니다. 예배에서 실패하면 신앙생활에서 실패합니다. 결국 인생의 낙오자가 됩니다. 예배의 승리자가 결국 인생의 승리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배를 통하여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세상의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온전한 예배자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리면 반드시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놀라운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어떤 분은 힘들고 어려우면 예배를 멀리합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려울수록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더 열심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면 문제는 눈 녹듯 해결됩니다. A.W. 토저 목사님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셔서 먼저 예배자로 만드시고 그 후에 일하는 자로 만드신다.” 사역보다 예배가 우선입니다. 교회 안에 보면 일을 하는 데는 열심인데 예배를 소홀히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먼저 일하려고 애쓰지 마시고,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 힘쓰십시오. 그것이 바로 은혜를 누리는 비결입니다.
2. 느헤미야가 성벽을 쌓고 그 후에 한일은 바로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 이제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리더를 선정합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느헤미야가 수산 성으로 되돌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뽑았습니까? 잘 보십시오. 하나니와 하나냐입니다. 자신의 동생 하나니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 됨됨이가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리 중에서 돋보이는 자라"고 말입니다. - 참 근사한 말이 아닙니까?
여러분,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가 언제 드러납니까?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할 뿐입니다. 겉모습은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우므로 비로소 진위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생화와 조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 꽃의 잎은 떨어지지만 인조 꽃잎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짜 꽃은 벌이나 나비에게 기꺼이 자신의 꿀을 빼앗겨 주고 나누어주지만, 모조 꽃은 떨어지거나 빼앗길 것을 아예 소유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요즈음 조화를 얼마나 잘 만듭니까? 구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떨어짐과 빼앗김의 유무에 따라 생화와 조화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몰라요!! 다 각오도 다짐도 하지만, 정말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자인지는 평소에는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 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충성된 신앙인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사명을 부여합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 무엇이 이어집니까? 4절과 5절 말씀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인들과 민장과 백성을 모아 그 보계대로 계수하게 하신고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를 얻었는데 거기 기록한 것을 보면” 합니다. 5절 이후에 이어서 기록이 나옵니다.성 건축을 마쳤지만 성에 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성안에 사람이 없으면 성읍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주신 축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케 했다’고 되어 있는데, 원어로는 하나님께서 생각을 넣어 주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귀환자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느헤미야 7장 6절부터 73절 까지 나오는 명단은 주전 538년에 예루살렘으로 1차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 42360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차에 걸쳐 귀환했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유대인 200만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불과 4만명만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깐 200만 중에 2%만 돌아 온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집도 짓고, 장사도 하고, 상권도 얻고, 자녀교육도 시키고, 인간관계도 맺었는데 그것을 다 버리고 800마일이나 되는 먼 길을 불평 없이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걸어 온 신앙의 용사들입니다. - 2차, 3차로 귀환한 사람들은 찾기 쉬웠지만 1차로 귀환한 사람들은 벌써 100년의 세월이 지났기에 그들의 후손이 어떻게 지내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족보를 찾아서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과 숫자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후손 대부분이 예루살렘에 살지 않고 다 흩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주신 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훼파된 예루살렘 성과 잦은 침략으로 현실은 몹시 피폐했습니다. 아무도 변호해주거나 지켜주는 사람 없이 살길을 찾아 이리 저리 사방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았습니다. ‘너희들이 거할 땅이 이곳이 아니냐? 이곳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이다. 너희 선조들이 민족을 다시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자 고생을 감수하며 바빌론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냐. 잃어버린 우리 사명을 다시 찾자.’
11장을 보면 느헤미야는 그들을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주시킵니다. 그들은 사명을 다시 찾고 황폐한 땅이지만 다시 옮겨왔습니다. 11장 본문 뒷부분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을 짓기 위해 요즘으로 치면 5백만 불에 해당하는 금은보화를 내놓습니다. 사람들이 헌신하며 가진 소유를 내어놓으니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맞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찾아 온 사명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열방을 향한 축복의 통로로 사는 사명을 어려워도 성취하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잠자던 그들의 사명을 일깨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역시 새봄과 더불어 나의 믿음의 약동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예배자로서, 충성된 섬기는 자로서, 사명자로서 서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믿고 30년 40년 믿다 보니까 처음에는 감격하고 처음는 은혜 받고 믿었지만 나도 모르게 굳어진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는 많은 형식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형식적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젊은이들 가운데서는 희망을 걸지 아니하고 교회를 향하여 냉소적 비판을 향하는 그런 교회 내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잘못된 세속의 벽을 허무십시오.
타클로반 - 다 허물어야 합니다. 학교, 교회 그것 깨닫고 왔습니다. <사진 3> 우리는 지금 공사 중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인격도 온전한 모습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공사 중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때로 공사 중에 실수하고 실패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 주신 힘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때론 죄의 유혹에 넘어지고, 세상의 무거운 짐에 눌려 쓰러질지라도, 좌절하지 말고 주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금 용기를 내어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완성품이 아닙니다. 아직도 공사 중입니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제작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도록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주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십시다. 우리의 모습 가운데 아무리 못난 부분이 많다 하더라도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우리를 온전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은혜 앞에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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