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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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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향한 주님의 마음 요9:1-7. 2014년 4월6일. 장애우 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4-06 | 조회: 1292
오늘 교회는 장애우 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누군가가 평범한 사람이 갖지 못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또 그것이 살아가는 데 자신의 삶 자체를 흔들 수 있는 고통이라면 얼마나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우리는 장애인하면 선천적 장애인을 연상하지만 장애인중 선천적 장애인은 20%미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산업화되면서 더욱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결과로 산업 재해, 교통사고, 약물 복용 노인성 질환들이 증가하면서 우리는 많은 후천적 장애인들을 양산하는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느 나라이든 그 나라 인구의 10%는 장애인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현재 500만명 이상이 장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장애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어떤 통계는 앞으로 20년후 에는 인구 다섯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우리 모두가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인으로 일생의 한 시기를 살다가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비 장애인의 범주에서 예외 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장애를 입게 되면 그것을 극복을 해야하는 쉽지 않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1.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편견에 대한 문제입니다. 작년 제33회 장애인의 날 행사 슬로건 공모전에서 당선된 내용을 보면 “우리의 편견으로부터 장애는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장애는 우리의 편견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길을 가시다가 지나치는 맹인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2절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부모니이까?” 우선 우리는 이전 제자들의 질문의 밑바닥에 뿌리박고 있는 그들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편견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 제자들이 던진 질문‘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소경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엄청난 천대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겨운 고통입니다.

당시에는 장애인이 성전에 입장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가 마음대로 하나님을 부르며 구원의 은총을 찬송하는데, 거기서 소외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단지 앞이 보이지 않는 육신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이로 인해 영적인 고통까지 당하는 이중적인 고통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정말 그 사람의 인생은 어둠 그 자체였습니다. 요즘에도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암암리에 그런 차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소말리아 나라에서는 아예 인구 조사할 때 넣어주지도 않고 호적도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시각장애인을 낳은 부모는 죄인 취급을 받아 숨을 죽이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겠습니까?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장애나 질병을 무조건 죄의 결과로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다 그런 게 아닙니다. 3절에 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을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편견의 잣대를 가지고 달려들었던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이 사람의 경우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우연이 없습니다. 우연이라고 여겨지는 그 모든 것 속에는 필연이 있고, 그 필연 속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절대로 의미 없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한 가지 한 가지가 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섭리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사람 앞에 상처를 받을 수 있고, 환경 앞에, 문제 앞에 절망하는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나의 믿음을 견고케 해주는 전환의 기회가 될 수가 있고 영적으로 깨어 각성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사람, 의미가 없는 일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요셉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다른 형제들보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던 그였지만, 그것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는 종의 신세가 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요셉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보디발장군의 집에서 종이었지만, 그의 성실성과 진실성 때문에 주인의 인정을 받은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습니다. 이 유혹을 뿌리친 대가로 그는 또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는 절망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여러분, 요셉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한가지씩만 떼어놓고 생각한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그와 같이 어려운 길로 인도하실 수가 있을까? 하고 의아심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되어진 일들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붙잡고 계셔서 그 모든 상황 속에 개입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는 동안 애굽왕 바로의 두 신하를 만났습니다. 저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나중에는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요셉이 감옥 속에서 3년동안 바로의 두 신하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냥 보냈겠습니까? 거대한 애굽의 정치를 수강료도 불지않고 최고의 강사 밑에서 배우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전액 장학금을 받고서 정치학 박사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료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이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감옥에 들어가서 바로의 신하들을 만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요셉의 형들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애굽으로 갈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요셉의 삶 전체를 볼 때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최선의 것으로 내 인생을 붙들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이 고난이, 이 어려움이 왜 내게 다가와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주는지 잘 알수 없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 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내가 있어야 할 것과 또 내가 버려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내 인생에 잠깐의 고난을 허용하심으로 나를 더욱 가치 있게 사용하신다는 이 사실을 믿고 나간다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가장 아름다운 승리자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6-7절을 보십시요.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어두움으로 몰아넣었던 이 장애를 벗어던질 때, 얼마나 얼마나 기쁨이 컸겠습니까? 이제 그는 더 이상 장애자로 자기 안에 갇힌 인생으로 살아가지를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은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았던 한 불행한 사람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 주신 싸인입니다. 그가 눈을 뜨자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다들 야단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종파이며 정파인 바리새파 사람들, 서기관 등 기득권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기존의 질서가 흔들릴까봐 심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아예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제명출교를 시킨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신앙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생존권이 박탈되는 것입니다. 소경되었던 그 사람은 그런 핍박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증거합니다.

17절에 보십시오. “(예수님은) 선지자니이다.” 예수님을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었다고 해서 죄인으로 정죄하고 몰아붙이지만 그는 뭐라고 증거합니까? 25절에 보시면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32절~33절에 보면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나중에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는 주님 앞에 뭐라고 고백합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한생을 절망과 사회로부터 철저한 버림을 받고 산 이 장애인의 삶은 더 이상 상처를 안고 살지 않습니다. 이젠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여기 - 바로 내 인생에게 다가 오셔서 내 인생을 사람답게 만든 그는 환희에 찬 감격을 토해 놓습니다. -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는 육신의 눈만 고쳐진게 아닙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떠진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영적인 눈이 떠집니다. 영적인 눈으로 본다는 것은 깨닫는다는 것이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인생의 비참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절망과 좌절과 고통 속에 살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 환희에 찬 인생으로 바뀝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 장애우 주일을 맞이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4절을 읽어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여기 ‘나를 보내신 이의 일’ 이를 우리는 미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미션이란 단어는 본래 ‘보냄 받았다’는 라틴어 단어 ‘missio'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미숀을 “우리를 보내신 분이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가 하여야 할일”이라고 정의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가장 큰 미숀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를 위대한 명령 혹은 지상 명령(Great Commission)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명령 못지않게 우리가 수행해야 할 또 하나의 명령을 가르쳐 우리는 위대한 계명 혹은 가장 큰 계명(Great Commandment)이라고 합니다. 이 위대한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작은 자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토요일마다 장애우 예배- 실로암 대학을 여는 이유입니다.

갈2:7-8에 보면 바울 사도는 베드로에게 주께서 그의 동족인 유대인 복음 전도를 맡기신 것 같이 나에게는 이방인 복음 전도를 맡기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전도는 바울 사도의 사명의 우선순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갈2:10에 보면 복음 전도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가져야 할 또 하나의 관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작은 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보편적인 습관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마태 25장 최후의 심판의 장에서 예수께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심판하시는 그날-그분은 작은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심판의 준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25:35-36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 때 그들이 대답합니다.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을 그렇게 공궤하였습니까?” 주님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돌볼 수 있는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베풀고 도와준 그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주님은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작은 자 사랑-그것은 주님의 사명이요, 주님의 제자 된 여러분과 저의 사명임을 잊지 마십시다. 이 사랑을 필요로하는 나의 이웃이 있습니다. 이 사랑 속에는 용기와 배려가 묻어있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을 가졌던 미국대통령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는 1920년대의 미국의 대경제 공황 당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미국인들에게 비전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이 위기를 잘 돌파하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개인적으로 두려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패배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 해에 캄포벨로의 여름 별장에서 찬물에 빠져 하반신 불수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입었습니다. 쇠붙이로 받침대를 만들어 다리에 붙이고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고, 옷도 자기 손으로 입지 못하고 두 다리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정치 생명이 끝났다고 말했습니다.그러나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 엘레나가 곁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루즈벨트가 엘레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이런 불구자가 되었는데 지금도 나를 사랑하오?" 엘레나는 미소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다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당신 전부를 사랑하고 있답니다." 루스벨트가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시 도전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경제공황을 수습했고, 미국 역대 네 번에 걸쳐 대통령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두려울 때 용기를 주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즉 죽도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습니까?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에게는 둘이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살집이 좀 작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찮습니다. 고생을 해도, 욕을 먹어도 견딜 수기 있습니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행복이 마음속에 담겨 있어야합니다. 오늘 이 실로암- 보냄을 받았다는 이곳으로 절망의 발걸음을 내딛던 그는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 평생 자신을 짓누르던 장애로부터 자유합니다. 그는 육안만 열린 것이 아니라 영안까지 열린 새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나고 참 신앙인이라면 영적인 눈이 떠져야 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외양과 형식은 갖추고 있지만 진리에 눈먼 자들이 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참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우리는 진리에 눈 떠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구원에 눈 뜨고, 더 나아가 인생에 눈 뜨고, 사랑과 사명에 눈을 떠서 비로소 행복한 인생, 더 나아가 존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가슴 아파야 할 것은 육신은 멀쩡해도 영적인 장애를 가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인생입니까? 육신의 눈은 멀쩡하지만 눈뜬 소경, 영적 소경으로 살지 맙시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만나 영적인 눈을 떴습니까? 잘 점검해 보십시오. 구원에 눈을 떠 천국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에 눈을 떠 사랑하고 섬기고 주의 복음 위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만 뜬 자가 아니라 영적인 눈을 크게 뜨고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증거하는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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