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받는 종의 노래 사53:1-6. 2014년 4월 13일 ①강 주일 낮. 내주의 보혈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4-13 |
조회: 1636
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이 한 주간을 고난주간 혹은 수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의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축하하며 환영합니다.
그러나 며칠이 못되어 환호하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하는 폭도로 바뀝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던 군중들의 열기가 사라지기도 전인 금요일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우리는 종려주일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경건과 절제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여행이나 오락을 금하고, 육식도 가급적이면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고난주간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한끼씩 금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려우시면 성금요일 날 만이라도 모든 이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구별된 마음으로 한끼라도 금식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 더 큰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수요 저녁 예배는 가상칠언을 합니다. 금요일 저녁예배 때에는 성례식을 하는데 모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을 몸 가운데 채우며 골고다 언덕을 향해 함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고난주간을 의미있게 보내야 부활주일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에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경험할수록 부활의 기쁨과 영광은 커집니다.
어느 시대나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대단한 기대와 부푼 꿈을 가지고 바라보게 됩니다. 특히 사회가 어렵고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할수록 사람들의 기대는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선거철이 다가오면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관심이 집중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저분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않을까?' 라는 나름대로의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 입성에 백성들의 환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마21:10절에는 ‘온 성이 소동’을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을 때, 온 도시가 들떴습니다. ?소동하다?는 단지 ?웅성거리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말하다? 정도가 아닙니다. 이 단어가 ?세이오'인데, 마태복음 27장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에 하늘이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면서 바위가 터지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땅이 ?진동하다?가 ?소동하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온 지축이 뒤흔들리듯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이 뒤흔들리는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예수를 이처럼 온 성의 사람들이 열열히 환영을 한 것입니까?
눅 19:37절을 보면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여기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떤 표적을 들었기에 이처럼 열광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최근의 예수님의 행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한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평생을 돈의 노예로 살았던 삭개오을 찾아가셔서 그의 인생을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집을 찾아와 준 것이 그토록 감격이 되었던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후에 죽은 지 4일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현장에는 제자들은 물론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본 것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열광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제자들에게서 사람들에게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음에도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환호성을 질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나와서 그것을 길에다가 놓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겉옷을 벗는 행위는 왕에 대한 예절이였습니다. 그를 왕으로 기대했다는 예루살렘 군중들의 기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드디어 찬송소리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말로는 '구하옵나니 기도하옵나니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 이 노래는 절박한 심정이 담긴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열렬하게 환영했던 것은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는 구원의 열망이 아니라 단지 그들 눈앞에 비쳐진 주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고, 포악한 인간의 대명사였던 세리를 바꾸어 놓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이미 장례까지 치른 시체를 살려내는 분이라면 자기들이 생각하는 소원을 들어주시기에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왕이라고 여겼던 예수가 로마에게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감방에 갇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던 많은 군중들은… 빌라도 법정에서 유월절 특사 선택에서 엄청난 죄인 "바라바"를 택하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들은 십자가의 주변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있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정말 같이 있어주고, 아파해 주고, 눈물 흘려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은 홀로 그 고통과 수모를 당하셔야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 오시기 700 전에 이사야는 그 현장을 생생하게 보는 듯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하는 본문 사53장의 내용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한 주간 “고난받는 종의 노래”란 주제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를 위하여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던 주님의 기도에 함께 참여하는 뜻에서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입니다. 평소에는 힘들어서 새벽을 깨우지 못하신 분들도 고난주간 새벽만큼은 꼭 깨우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시려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히9:27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죄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러분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여러분 법원에서 판사가 호출을 해도 가슴이 덜렁덜렁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십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으라고 하십니다. 다른 종교는 이와 같이 인간을 놓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라고 노골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요, 인간은 거룩하고 성결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놓고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모독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거야말로 눈 감고 아웅이 아닙니까? 정말로 인간이 거룩합니까? 회개가 필요 없고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 양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만큼 더러운 악마들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인간이 정말 죄가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그런 눈 감고 아웅식의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엉망입니다. 구원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구원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꼭 십자가에 죽으셔야 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면 십자가에 예수님이 꼭 죽어야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오늘 우리가 한 주간 보는 사53장은 바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주님은
첫째로, 주님은 구주로 오셨지만 초라하고 슬픈 인생을 사셨습니다. (1-3절)“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欽慕)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흠모할 만한 세상이 추구하는 외적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당당한 왕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필적할 수 없는 용력이나 카리스마를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골 베들레헴의 작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 후 귀국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면서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한 때 많은 사람들을 이끌기도 하셨지만, 결국에는 죄수의 몸으로 수난을 당하셨고,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배척과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11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라하고 멸시받고 슬픈 인생을 사셨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주님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에서 ‘담당했다’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떠맡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담당했다’의 의미는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도대체 내가 어떤 존재이길래,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내 모든 죄를 떠안으시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갑니까? 그것도 십자가에 죽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22:14절에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 고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 입니다. 죄인에게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형벌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의 죄 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을 피할 수 없고, 그 형벌에는 무서운 지옥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왜 찔렸습니까?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내가 받아야 될 징계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고통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아픔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십자가에서 주님을 우러러 보는 그 순간을 마음에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히신 주님의 그 부끄러운 모습을 놓고 시편 22편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시22:6절에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왜 이렇게 말 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죄는 수치를 수반합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이 모든 고통과 수치를 내가 받아야 할 것인데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내 죄를 떠 안으시고 담당하신 것입니다.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수치와 모욕을 다 담당하시므로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다시 세워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기주의(利己主義, egoism)이 팽배한 시대입니다. 이기주의가 당연한 것을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믿음생활 하기가 어려운 시대 풍조 속에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찾아 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 남의 문제를 가지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을 찾아 보기 어려운 이기적인 풍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기주의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선포할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삶 속에 이미 깊숙히 들어와 있는 이 이기주의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감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道)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 세상을 변화 시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한두 가지 알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습니까? 그 깊은 차원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은혜를 계속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가 매일매일 새롭게 다가오게 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마음이 둔감해져서 요즘에는 은혜가 안 된다는 식의 소리는 변명이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몇 마디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그 은혜를 다 알려면 죽을 때까지 십자가 앞에서 성령의 은혜를 받아도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허리띠를 동여매고 등불을 들고 이 놀라운 은혜를 알아보려고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둔감해 진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하십시오.
어디에다 마음을 다 빼앗기고 십자가의 은혜 앞에 둔감해집니까? 무엇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여러분의 마음은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로만 가득 차서 십자가가 멀리 보이게 되었습니까? 원인이 어디 있는지 찾으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고난주간 한 주간 새벽마다 십자가 앞으로 모두가 나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간 고난 받는 종의 노래인 주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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