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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을 바꾼 부활의 능력 고전 15:55-58. 2014년 4월 20일 부활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4-20 | 조회: 2335
죄와 죽음과 사탄의 모든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이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부활의 승리와 영광과 소망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옆에 계신 분과 함께 부활의 인사를 나눕시다. “우리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바로 당신을 위해 살아나셨습니다.” 아멘!


여러분, 패배와 패배주의란 단어의 의미를 아십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패배할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도전해서 기어코 이기면 됩니다. 4전 5기, 7전 8기하면 됩니다. 마지막 승리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승리하면 그동안의 패배는 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패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한 번의 패배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패배주의는 문제입니다. 한 번 패배가 영원한 패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맞설 의욕도 용기도 다 빼앗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 패배주의는 정신적인 전염병과도 같습니다. 일단 감염되면 사람의 정신을 무력화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이 패배주의가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5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에 대하여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이번 진도 앞바다에 수학 여행을 간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한지 5일째가 되지만, 아직도 생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170여명이나 됩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하며 귀여워하던 자녀들입니다. 그 가운데 싸늘한 주검으로 부모의 품에 안긴 자녀의 시체를 앞에 놓고 울부짖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자녀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그 부모의 입장이라면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을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도 매달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2013년도 한 해에 우리나라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5만명 가량이 된다고합니다. 한 해에 25만명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동성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광진구의 전체 인구가 38만 명하고 몇 백 명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25만 명은 광진구에 사는 사람들의 60-70%에 해당합니다. 1년에 광진구 인구의 60-70%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실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죽어서 무덤을 남겼습니다. 인류의 성현이라 불리는 석가모니는 독초를 잘못 먹고 죽었습니다. 공자도, 마호메트도 죽어서 무덤을 남겼습니다. 진시황은 죽지 않으려고 불로초를 구했지만 그도 역시 죽어서 커다란 무덤을 남겼습니다. 이집트에 가면 거대한 피라밋이 있습니다. 죽어서라도 영생을 누려보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 죽음의 문턱을 어느 누구도 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요,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어 놓는 놀라운 복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역설적 논법으로 부활의 진실성을 설명합니다. 그는 우선 12절-13절에서 부활은 하나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그 법칙에 따라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예수 믿는 성도들도 부활하게 될 것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14절 -19절에서는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또 성도들의 부활이 없다면 얼마나 많은 모순이 생기는지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습니다. 5가지로 이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1. 만일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가짜일 것입니다. 14

2. 만일 부활이 없다면 복음전도자들은 거짓말장이와 사기꾼이 될 겁니다. 15

3.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인간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할 겁니다. 17

4. 만일 부활이 없다면 육체의 죽음으로 모든 게 끝이 될 겁니다. 18

5. 만일 부활이 없다면 성도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겁니다. 19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느라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핍박받으면서 유랑 생활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 갇혀 고생하다가 마지막 참수형으로 순교한 사람 아닙니까? 그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살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귀족에, 가말리엘 문하생 출신 박사에다, 로마 시민권자에다, 부자에다 ...이것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히려 고난의 자리에서 복음을 위해 한생을 산 사람이 아닙니까? 만일 부활이 없다면 바울은 정말, 불쌍한 사람, 아니 정신이 돈 사람일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죽음이 하나님을 붙잡았으니 그보다 더 큰 승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의 승리는 겨우 사흘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사슬을 끊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사로잡아 결박하셨습니다. 이제 그 죽음은 결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과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3년 동안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 모두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다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고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신의 한 목숨을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한 생을 후회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뜨겁게 외칩니다. 55-57 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도 없었을 것입니다. 선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셨기에 진리가 승리하고, 정의가 승리하고, 사랑이 승리하고, 생명이 승리할 수 있었으며 이제 우리도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아프리카에는 망구스라는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이 동물은 저 무시무시한 코부라를 공격하는 코브라의 천적입니다. 대부 코브라를 두려워하는데 이 망구스는 코브라와 싸워 이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잡아먹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망구스의 몸에는 뱀의 독을 해독하는 효소가 있답니다. 그래서 코브라에게 물려 몸 안에 독이 들어와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은 세상의 어떤 악한 독도 해독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불의와 부패도 깨끗하게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죄악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어 포기했던 일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 포기하고 절망했던 그 자리를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새로운 능력을 덧입게 되시기 바랍니다. 여기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상 속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일에 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할 일은 바로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은 내 기분에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또 자기 영광이나 자기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을 향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할 주의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한 젊은 피아니스트가 오랫동안 연습하여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잘 훈련된 그의 손가락을 통하여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올 때 청중은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고 마지막 음이 끝나자 청중들은 다 일어서서 우뢰와 같은 박수를 터뜨렸습니다. 그런데 맨 앞줄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은 일어서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젊은 피아니스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무대에서 힘없이 걸어 나갔습니다. 무대 감독은 그의 연주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때 젊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잘못 했습니다. 실패한 겁니다." 무대감독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저 청중들을 보세요. 저렇게 모두 일어서서 환호성이잖아요." 그때 젊은이는 "아닙니다. 지금 자리에 앉아있는 저분이 칭찬해 주셔야 합니다. 저분은 내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하더랍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했으면 아무리 여론이 좋고 칭찬을 들어도 성공적인 삶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박수를 받는 삶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공적인 사람이 되려면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어디서나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엡5:10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고 하였습니다.




둘째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고전16:10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면서 부탁하기를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임이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힘썼던 주의 일은 이방민족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그 바울 사도이 디모데를 추천하면서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임이니라"고 하였다면 디모데 역시 바울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다한 것입니다.


다음 주에 우리 교회는 태신자를 세웁니다. 밤바다에 난파선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저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내가 만난 부활의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이 천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에게만 유효한 일이 아닙니다. 이 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에게도 똑같 유효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은 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크고 귀한 주의 일입니다. 이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1873년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던 리빙스턴의 소식이 끊어진 후, 스텐리가 이끄는 탐험대는 중앙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서 리빙스턴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때의 리빙스턴은 이미 병들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스탠리는 30년 동안 토인들과 함께 한 리빙스턴을 보고 영국으로 귀국할 것을 설득하였지만 리빙스턴은 계속 아프리카에 머물렀고, 결국 그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리빙스턴이 남긴 마지막 일기장은 1873년 3월 19일의 일기였고, 그 날은 리빙스턴의 생일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일기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나의 예수여! 나의 왕이여! 나의 생명이여! 나의 모든 것이여! 오늘을 기하여 다시 나를 바칩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나를 받아 주소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나에게 주셨는데 이 못난 것,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두 바치오니 받아 사용해 주옵소서. 아멘 " 그의 시체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 사람에게는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살고, 응답하다 죽었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의 일생은 오직 주의 일을 위하여 힘썼던 생애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여전히 찾아오십니다. 부활의 아침! 그 부활의 주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다시 만나는 시간되기를 축복합니다. 내 인생의 배에 주님이 승선하실 때 우리는 만선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부활의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자마다 예외없이 세상 앞에 당당히 우리가 주님을 만났다고 선언한 것처럼 우리 인생의 배에 다가오셔서 만선의 기쁨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오늘 부활의 이 아침! 부활의 능력을 입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타성으로 젖은 잘못된 신앙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며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 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그,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거룩한 삶이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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