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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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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지 아니하면 눅13:1-5. 2014년 4월28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4-28 | 조회: 1565
사고가 난지 12일 째 되는 지금도 차디찬 바다 밑에서 어른들의 말을 믿고, 어른들이 구해주길 기다렸을 자녀들이 ‘높은 파고, 빠른 조류, 탁한 시계’를 넘지 못하고 기적만 바라는 과정을 보면서 참담함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잠수사가 선실 안에 들어가서 시신을 거두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시신마다 성한 손톱들이 없이 다 부서진 채 죽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저들이 물속에서 살려고 이곳저곳 벽을 쥐어뜯고 있을 때,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할 때 이런 절박한 순간에 우리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승객 구조를 ‘사명’으로 부여받은 선장과 몇몇 승무원들은 구조노력을 뒷전으로 한 채 제 살 궁리만 하고 가장 먼저 ‘세월호’를 탈출했다는 소식에는 분노를 넘어 허탈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그 순식간에 배가 복원력을 상실한 채 무너져가는 모습 앞에 어느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배를 움직이는 선장이나 승무원도 죽음의 공포가 두렵고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 소중할 것입니다. 허지만 그들의 존재 이유는 승객의 안전과 위기 시 이들을 구조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이 일을 위해 마지막 결단을 해야 할 자는 키를 던져 버리고 탈출을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배에 함께 탔던 구조된 사람들의 마음도 정상이 아닙니다. 가까스로 죽음의 현장에서 살아나왔지만, 오히려 배안에 갇힌 친구들 때문에 미안함이 얼마나 큰지 이중적인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지난 1월에는 대학생들 M.T때 경주의 한 리조트에서 사고가 나서 가슴을 쓸어 내렸는데 이번에 일어난 사고를 보면서 여러분도 그렇지만, 부족한 저 역시 정말 정말 통증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정말 이 과정을 보면서 우리의 다음세대가 무너져 가는듯한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이런 엄청난 사건과 사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한 본문 누가복음 13:1-5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두 가지 사건이 언급됩니다. 하나는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당국에 의해 학살당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예수님 당시 총독들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유대인들의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가차 없이 처단하곤 했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 더 적극적이었고 과격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의 독립을 쟁취하려다가 실패한 후 반역죄로 몰려 빌라도 총독에 의해 대량 학살을 당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3,000명이나 제단에 받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학살을 당한 시체는 성전 뜰에 가득 찼으며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제사지내기 위해 준비한 제물에 섞여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끔찍한 만행을 보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분노를 금치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그렇게 학살당한 것은 죄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참담한 비극을 맞이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절에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학살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3절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 했겠습니까?




이 뿐이 아닙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 여덟 명이 치어죽은 대형 참사가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4-5절에 보시면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여기 평시 사고로 18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당시로 보면 ‘세월호’ 사건에 버금가는 대형 사고입니다. 망대가 무너져 돌에 깔려 죽은 사람이 무려 18명이나 되었는데, 이 숫자는 당시 팔레스타인 전역에 살던 전체 유대인 인구가 약 50만 명 내외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현재 남한 전체 인구수(약 5000만 명)와 비례하여 계산하면 대략 1800명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한마디로 당대의 대형 재난 사고였지요. 그러니 당시 유대 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이 사건에 깊은 충격을 받았고 또 당시 랍비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재해석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5절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여기 3절과 5절에 전혀 다른 사건과 사고입니다만, 주님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동일하게 말씀을 합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여기 '회개하지 않으면’이란 이 말은 너희가 지금 이런 문제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런 자리보다, 이 문제를 너의 문제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 이 세상을 변화시킬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가 없이 말로만 떠들고 있을 뿐이라면, '그 다음은 너의 차례가 될 수도 있다', '반드시 그렇게 망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렇다고 이 문제를 유야무야하자는 개 아닙니다. 이번 세월호 재난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한국 사회가 얼마나 인명을 경시하는 폭력적 사회로 깊이 타락하였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최근 한국 사회는 정치적·구조적 폭력뿐만 아니라 일상화된 폭력이 너무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무서운 사회로 변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을 천대하고 성폭력도 서슴지 않는 '도가니 사회', 철저하게 가난한 자를 소외시켜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세 모녀가 자살하게 만드는 소위 '폭력의 일상화'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비정한 사회입니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학교 당국과 선박 회사의 안전 불감증, 그리고 선장의 무책임한 모습은 우리 기성세대의 몰염치함과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긴급 재난 대처의 비효율성과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최우선적 행정 배려가 너무도 부족하여 급기야는 희생자 가족들의 대국민 호소문까지 발표되는 지경에 이른 재난대책본부의 미숙함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권과 생명 존중에 있어서 후진적인 사회인지를 이제 온 세계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만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 앞에 자신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기억이 나시나요? 느혜미야 사대에 자신의 조국인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성곽이 불이 탔습니다. 그리고 성안에 자기 동족은 이방 침략자들에게 말로 담을 수 없는 환란과 능욕을 당하는 아픔을 겼습니다. 이 소식 앞에 느혜미야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느헤미야는 기도할 때에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느1:6-7절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는 자기 민족의 죄를 자백하면서 그 죄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와 내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범죄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포로 2세입니다. 그는 조국이 멸망당할 때에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조국의 멸망이 결코 자기 죄일 수 없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형벌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잘못이라고 고백합니다. 예루살렘에 귀환한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것도 다 자기 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게 지도자요 이게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의 우리 민족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느끼고 있습니까? 오늘날 이렇게 나라가 어렵고 혼란스러운 것이 모두 정치인들이나 지도자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그들만을 탓하고 있진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민족이 이렇게 어렵게 된 게 다 내 책임이라고 탄식하며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죄까지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고서 그 책임을 하와에게 떠넘기고 하와는 그 책임을 뱀에게 전가한 것처럼, 아담의 후예들은 모두 자신이 져야 할 책임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부부사이에 문제가 일어나도 “당신 때문”이라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바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본문을 통해 우리 신앙인의 시선이 좀 세상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살피고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자기 자신의 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부분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와 같은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실과 우리 인격의 근원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철저하게 개혁하는 모습이 없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는 주님의 경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이 말은 회개를 통한 이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축복의 통로요, 사명을 사명으로 감당하는 능력의 열매가 바로 회개의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 여기에 ‘너희’라는 말은 굉장한 강조형입니다. 이 말은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아무리 세상이 썩고 어두워도 나는 너희만을 믿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만 믿어.” 하는 의미가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을 부여받은 우리지만, 이 캄캄하고 썩어 냄새나는 세상이라고 하는 괴물 앞에 우리 자신을 놓고 보면 얼마나 초라해 보입니까? 얼마나 작아 보입니까? 무슨 빛을 발할 수 있으며, 무슨 소금 노릇을 할 것 같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조용히 내려다보시면서 “나는 너희만 믿어. 왜냐하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너희마저 없다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어. 절망이야” 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니 한편으로는 부담도 되고, 한편으로는 주님의 우리를 너무 잘 봐 주심에 대해서 감격도 하고 긍지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름 받아 일할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여러분, 이 세상은 예수님이 늘 안타깝게 여기시며 대단히 고통스러운 눈으로 보시던 세상입니다. 요9:39절을 보시면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또 12장 31절에도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말씀에서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이란 말을 심판에 대해 말씀하는 중에 쓰신 적이 많습니다. 이 세상은 죄로 부패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제 맘대로 사는,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현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조차 받지 않는 포악한 세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고와 슬픔만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한평생 살다가 한숨짓고 눈물 흘리면서 떠나야 하는 그런 세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핑크라는 학자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지만 죄는 ‘이 세상’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셨지만 죄가 들어와서 바로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이 세상을 사는 하루하루가 우리에게는 모험입니다. 큰 위험 부담이 따르는 나그네 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마음놓고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사는 것이 훨씬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희망도 기쁨도 생명도 없는 곳, 영원한 멸망만이 가득한 세상임을 말씀해 주시고 동시에 바로 그러한 세상이 우리가 소금처럼 빛처럼 살아야 할 현장, 사명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주 앞에 나 자신의 죄성을 고백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세월호를 보면서 여기에 얼마나 많은 부패와 썩은 냄새가 나는 권력과의 유착, 자신의 부를 위해 거짓을 가지고 진리인냥 수많은 사람들을 종교 아편장이로 만든 이단의 무서움, 그리고 자기 목숨만을 위해 배를 팽캐치고 나온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이웃을 짓밟고서라도 자신의 야욕을 성취하는 현실입니다. 이 땅을 바라볼 때 희망을 둘만한 곳이 없습니다. 어디 한군데 빛을 따라 가면 살 수 있겠다 하는 곳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분간할 수조차 없는 어둠 가운데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계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친히 육신을 입고 구원하려 오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빛 된 삶, 소금과 같은 삶의 역할들을 해주기 원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될 삶의 현장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주저앉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육신의 약함 때문에, 태산 같은 문제 때문에, 영적인 슬럼프 때문에 고민하고 낙심하며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익숙함 때문에 매너리즘과 타성에 젖어 점점 나태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봄볕에 졸고 있는 병든 닭처럼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회개하라!! 이 음성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경고입니다. 오늘 우리는 태신자를 세우는 날입니다. 정말 다시 고민을 해야 합니다. 한 생명을 인도하려는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세우는 이 태신자 한사람이 구원의 자녀가 된다면 그 한사람이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자리가 너무너무 귀한 자리입니다.

이제 우리 동성 교회는 마치 골리앗처럼 버티고 서 있는 세상 앞에서 다윗과 같이 날렵한 차림으로 믿음의 물맷돌을 들고 급소를 공격해 쓰러뜨림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갖어야 합니다. 지금 이단들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파가 아니야. 저들은 이단이야. 하는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이단이나 사이비가 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하도록 성령의 능력을 통해 저들을 박멸하고 하나님만이 진정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온 땅에 드러내는 역사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춤추고 노래할 때가 아니고 황무하게 된 이 시대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바라보며 흐느껴 울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먹고 마실 때가 아니라 금식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시대의 교회 속에 다시 나타나도록 간구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를 매고 가시는 주께서 ‘세월호’의 아픔도 짊어지시고 부활의 밝은 햇살을 실종자들의 가족과 슬픔에 젖은 온 국민의 마음에 비춰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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