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개척하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09-07-12 |
조회: 2128
스스로 개척하라 수 17:14-18. 2009. 7/12
한 때 장면 총리를 저격해서 사형 언도를 받은 분이 목사가 되어 28년간 한 교회를 사역하시다 정년이 되어 은퇴하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은퇴 당시 겪었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 사형수로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연예계의 대부, 이화수, 정치 깡패였던 유지광과 이정재 그리고 빨갱이로 몰린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 같은 사람들이 다 사형 언도를 받고 그들은 사형장에 이슬로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곳에서 무기수로 감형을 받고,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출소를 해서 목사가 된 분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변한 이 분은 당시 빈민촌인 청계천에서 개척을 하시다가 지금 월드컵 운동장이 있던 난지도에서 빈민들과 함께 사역하는 가운데 정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하던 사역을 손을 놓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며칠 동안 잠이 오지 않더랍니다. 그때 그의 외동딸이 아버지 옆에서 조심스럽게 이런 이야기하나를 들려주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펑펑 울었습니다. “아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무대에 있을 때 보다 무대에서 내려올 때야!” 참 인생은 무대에서 내려오기가 힘듭니다. 그 누구보다 인생을 한 길에만 쏟은 사람들일수록 더합니다. 내려와야 할 때 내려오는 일은 어쩌면 올라가야 할 때 올라가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려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내려놓는 것은 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결정입니다.
누구나 이 순간이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지만, 그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에게서 직접 듣는 여호수아의 심정은 상당히 착잡했을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당하는 것은 천지 차입니다. 그런데 13: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 당시 여호수아의 나이는 적어도 100세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실제로 세상을 떠난 나이는 110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입니다. 무대에서 내려 올 시간이 된 것입니다. 도무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가나안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도 바로 그 한계의 시간이 왔습니다.
자신의 때가 다 되어 감을 알게 된 여호수아는 이제 자신에게 남은 가장 중요한 과제, 곧 하나님이 그에게 원하시는 마지막 과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숨을 걸고 7년 동안 싸워 얻은 가나안 땅을 12지파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전쟁과 세월을 통해 영적 권위를 인정받은 여호수아만이 지휘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 분배가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14장부터 19장까지 땅 분배가 나오는데 우리는 지난번에 유다지파가 처음 땅 분배에 나선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말씀을 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여리고성을 점령하고 아이성을 함락 시키고 계속해서 엄청난 전쟁을 쉴 사이 없이 치룹니다. 거의 7년 동안 전쟁에 소용돌이 속에 빠져 살아왔습니다. 이제 어느덧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진격하기 쉬운 지형, 정복하기 쉬운 성읍들은 이제 거의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만한 땅은 확보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손에 쥘 땅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전쟁에 지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만 싸웠으면 좋겠다. 이 정도 차지했으면 우리도 살만한데 전쟁을 그만 했으면 좋겠다."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많이 풀어져 버렸습니다. 이때 나이 85세 된 노인 갈렙이 가나안 땅에서 아직도 정복되지 못하고 있던 헤브론 산지를 바라보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수년 동안 전투를 해왔지만 그곳은 아직 감히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슬슬 피하면서 지금까지 남겨 놓은 땅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이 그 땅을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내가 올라가서 저 산지를 취하겠나이다. 저 땅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땅이니 내가 소유하겠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당시 갈렙의 나이가 85세였습니다.
갈렙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정복하겠다는 도전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산지를 달라’고 한 갈렙은 높고 안전한 성곽에서 진을 치고 있는 강한 아낙 자손과 위험한 도박을 벌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지역을 점령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있을는지 모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갖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땅이다. 내 발로 밟는 땅은 다 내 것이 된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어. 그러므로 내가 가서 밟으면 그것은 내 땅이야.' 확신이 분명했기에 값을 지불하는 것쯤은 두려워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17장에 보면 당시 12지파 가운데 가장 숫자가 많은 요셉 지파가 등장합니다. 자, 본문 14절 말씀 보겠습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누군데 이렇게 대접하느냐? 아니, 우리 조상이 누군데 우리를 괄시하는가?" 는 그들은 이 땅 분배에 대해 굉장히 불쾌감이 일어났습니다.
왜 이런 불평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가 공로의식에 젖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셉은 다른 모든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지 않습니까? 이국 만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거기서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그를 붙드시고 그를 인도하셔서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런데 요셉을 ?아낸 야곱의 아들들과 그들의 모든 식솔들은 가나안땅에 기근이 오는 바람에 모두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애굽으로 양식을 사로 온 자리에서 애굽의 총리가 바로 자기들이 노예로 팔아버린 아우라는 사실 앞에 그들이 받은 충격, 그리고 그 두려움이란 상상을 초월한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두려워했겠습니까? 그런 형들을 요셉이 용서 해 주었고, 또 그들에게 고센 땅에 거주하게 하는 엄청난 배려를 해 주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요셉의 후예들의 가슴속에는 우리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공로의식이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들은 우리 조상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우리조상들 때문에 너희들은 산 줄로 알아라. 그리고 우리가 지금 장자는 아니지만 장자나 마찬가지의 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공로의식이었습니다. 조상 때부터 행했던 나름대로의 공로의식들, 우리가 당연히 다른 모든 지파들 보다 더 유별난 대우를 받아야 되고 더 기득권을 행사해야 된다는 의식들이 그들의 가슴속에 그득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우리를, 그것도 ‘큰 민족’으로 생각하는 우리를 괄시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여호수아에게 불평을 쏟아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갈등 원인 중 하나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이 잘못된 공로의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헌신하고, 내가 이 만큼 교회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으로 교회의 기득권을 행사하려는 일 때문에 분열과 고통이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헌신했던 것, 우리가 순종했던 것 그것은 은혜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셔서 내게 성령의 감동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응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는 내 속에 공로의식이 남아있습니다. 내 속에 행했던 일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섭섭한 것입니다. 연조가 많을수록 '섭섭이'가 많아집니다.
또 하나는 여호수아가 바로 요셉의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큰 지파이고 현재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가 자기 지파에 속한 사람이니, 자기들은 뭔가 남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어떤 면에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친족이니 좀 잘 봐 주어야겠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가까운 사람들을 잘 해 주어야 되지 않겠나? 나와 고생도 많이 했으니 이제 보상을 좀 해 주어야지...”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서 혹은 좀 더 나은 대우를 해 줄 것이라고 기대를 가졌는데 아무런 혜택이 없으니 그냥 불평이 쏟아 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들은 큰 민족인데 주어진 땅이 너무 좁다고 불평하는 이들에게 여호수아는 간단히 대답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여기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개척하다’의 히브리어는 ‘창조하다, 나무를 자르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즉, 나무를 베고 숲을 개간함으로써 창조적인 영역을 적극적으로 만들라는 뜻입니다. “좁다면 네가 스스로 가나안 족속들의 산으로 올라가서 개척하여 땅을 넓혀라!” 그런데 보십시오. 스스로 개척하라는 이 말에 대한 요셉지파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16절입니다. “요셉 자손이 가로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방금 전까지 자기들이 ‘큰 민족’이라고 뽐냈던 그들이 이제는 철 병거를 가진 적이 무섭다고 덜덜 떨고 있는 이 광경을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분배된 기업 안에는 철 병거를 가진 강력한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어서 그들을 무찌르고 땅을 차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철 병거는 철갑으로 둘러진 전차를 가리킵니다. 특히 마차의 바퀴 좌우에 철로 된 톱니가 달려 있어, 당시 청동기 무기를 사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위협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수많은 위기를 넘기며, 강한 적들을 무수히 굴복시켜왔다. 범람하는 요단강을 건넜고, 무적의 여리고와 아이 성을 무너뜨렸으며, 가나안 남부와 북부의 연합군을 모조리 궤멸시켜 오지 않았습니까?
이 사실을 조금만 깨달았다면, 하나님이 과거에 어떻게 함께 하셨던가를 조금이라도 기억했다면, 그들이 이렇게 나약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의 자손들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았고, 현실에 안주하기를 바랐으며, 믿음으로 용감하게 장애를 극복하려는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눈에는 그 모습이 참으로 한심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네가 큰 민족이라면 큰 능력이 있을 것이다. 큰 능력이 있으면 큰 상대와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면 그까짓 철병거가 문제겠느냐? 방금 전까지 스스로 자신이 크다고 하면서 으스대더니, 왜 갑자기 겁이 났느냐? 왜 너희 자신을 그렇게 낮게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가? 저들의 영토 끝까지라도 밀고 들어가 땅을 개척하라!”
이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 가운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큰소리치던 사람이 실제 상황에 부딪치면 비겁해지는 삶이 있지 않습니까?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오면 마치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내가 다 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까? 그러나 희생이 주어지고 손해가 일어나는 일에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특권은 바라면서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는 회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들의 불평에 단호하게 대처합니다. 투덜거리며 땅을 더 달라고 불평하는 자기 지파에게 “아직까지 개척되지 않은 땅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불평만 하지 말고 스스로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남이 주는 것을 앉아서 받아만 먹으려고 하지 말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미 주어진 광대한 땅도 자신들이 직접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 민족이 목숨 걸고 싸워서 얻은 땅을 그냥 공짜로 분배받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감사할 줄 모르고 땅이 좁다고 불평하는 그들에게 여호수아는 “가만히 앉아서 주는 떡을 받아먹고 있으니 너희들이 고마운 줄 모르는 구나. 가서 네 스스로 땀 흘려 싸워서 땅을 쟁취해 보라.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낮은 곳에 머물면서 좁다고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높은 산림 지대를 보고 그곳으로 올라가라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올라가지도 않고 개척해 보지도 않은 채 낮은 곳, 즉 밋밋한 현실에 안주해서 이렇쿵 저렇쿵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제 우리 교회에서 사역하시던 송종호 목사님이 개척 13개월 만에 설립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요즘에 개척이 안 된다는 시대에 20여명의 성도가 모여 예배들릴 때 얼마나 감격이 컸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이 땅 한국은 전도가 후퇴하는 계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해에 3000여개의 개척교회가 문을 닫는다는 안타까운 소식은 우리가 인정할 수 없지만 현실입니다. 얼마 전에 제주도 답사를 갔을 때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영적인 탈진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 갈 1970∼80년대 만해도 "한국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하루에 개척교회가 6개씩 생겨났고, 가슴에 불을 담고 어디든 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당시 여대생들 사이에서 1등 신랑감은 단연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지난 날 요셉 지파 처럼 과거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주전자 속에 개구리처럼 서서히 자신이 죽어가는 것도 모른 채 세상에 빠져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 개척하라”는 이 사명 앞에 힘을 쓸 때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성경을 보면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개척자를 기뻐하신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 역시 창조주시요 개척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아무것도 없는 이 세상에 온 우주 만물을 개척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으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고 새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할렐루야!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개척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축복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개척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복의 근원으로 부르실 때에도 개척자로 부르셨습니다. '너는 네가 믿고 의지하는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비집을 떠나거라! 그리고 내가 네게 지시할 새로운 땅으로 가거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낯선 땅 미지의 땅에 개척자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성경적인 정신, 기독교 정신이 개척정신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개척정신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서양에서는 아이들을 키울 때도 개척정신 독립심을 키워줍니다. 18세 이상 되면 스스로 자립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이들을 과잉보호하고 서른 살까지도 데리고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생각하니까 자립심, 독립심, 개척정신이 약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나는 오늘 자신의 기득권마져 버리고 공동체를 위해 마지막까지 백성을 위해 피를 토하듯 외치며 살아가는 여호수아를 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사명으로 알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합니다. 여러분, ‘축복은 곧 사명’이라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꼭 기억하십시요. 축복은 사명이지 특권이 아닙니다. 지식이 있습니까? 재물이 많습니까? 권력이 있습니까? 자신에게 큰 능력이 있습니까? 그것은 축복이고 또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위세를 부리고 그 힘을 이용해서 더 큰 것을 얻으려고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라는 사명인 것입니다. 요셉 자손은 큰 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 가문이 번성하였고, 모세를 이은 제2기의 지도자가 그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오늘 본문의 요셉지파는 하나님의 복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전혀 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길만한 준비도 안되어 있고 다른 모든 지파에게 영향력을 드러낼 준비도 안되어 있습니다. 주저앉아만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지파이고 가장 탁월한 지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할을 잊은 채 원망과 불평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을 통해서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그것이면 전부 아니겠습니까?
전부 받은 것입니다. 비록 내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는 이미 다 받고 출발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덤입니다. 왜 우리가 절망하고 좌절만 합니까? 왜 적다고 불평만 합니까? 우리는 지금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자그마한 것이지만 이미 내게는 넘친다는 것을 고백하고 신앙의 면에서 삶의 모든 면에서 다시금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도행전의 부흥은 또 한 번 이 땅에서 멀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비전을 실현하는 주인공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하겠습니까?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하겠습니까? 여기서부터 안한다면 어디에서 하시겠습니까? 이제 우리 동성인들이 한 영혼이라도 더 주 앞으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행복을 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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