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심은 금물입니다.
작성자: 담임목사 |
등록일: 2009-01-18 |
조회: 2135
낙심은 금물입니다. 갈 6:7-10.
요즘 신년 초에 각종 매체를 장식한 화두가 무엇입니까? 위기, 그리고 희망입니다. 대통령의 신년사와 국정연설에서도, 신문의 사설에서도, 재벌 총수의 신년사에서도, 각 회사 단체의 시무식에서도, 종교인들의 메시지에서도 그랬습니다. 저 역시 오늘 동일한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항상 새해를 맞이하면 사람들은 으레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유난히 희망에 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다는 반증일 겁니다. 모두 어렵다, 어렵다 하니까 어떻게 해서든 극복해 보려고 애쓰는 모습입니다. 어쨌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다지고 희망을 노래해도 막상 우리의 삶의 현장은 우리가 생각한대로 그렇게 쉽지 않다는데 우리의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9절에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사용한 낙심이라는 단어는 지금의 상황, 지금의 고통으로부터만 빠져 나왔으면 좋겠다는 마음, 곧 만사에 의욕을 상실한 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lose heart’(마음이나 생각이 없다)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한문으로도 ‘낙심’(落心)은 “마음이 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제는 교회도 믿음도 예수도 다 번거롭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신앙도 포기하겠다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기도생활 안한 것 아닙니다.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해보았지만, 내 안에 답답함이 자꾸 밀려오고 오히려 믿음 생활을 하면 어려움고 고난도 사라질 줄 알았는데 더 큰 상황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의 자세가 흔들립니다. 그래서 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예수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젠 그렇게 아등바등 목숨 걸고 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악마가 있었는데 죽을 때가 되어서 평소에 사용하던 모든 물건들을 진열해놓고 판매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열대를 바라보다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진열된 물건 중에 제일 낡고 보잘 것 없는 그런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값은 제일 비싼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데 낡았는데도 값이 비싼가 하고 보니 거기에는 "낙심"이라고 하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 중에 가장 크게 해를 끼치는 것이 있다면 환난, 질고가 아니라 바로 낙심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성경학자요, 신학자였던 박윤선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이 낙심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하는 교만이다." 그것이 왜 다른 것을 의지하는 교만이 됩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가 해야 되는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낙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그가 처음 이 갈라디아 지역에 와서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그는 당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자신의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14절에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 바울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강력한 지도자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한번 결심하면 앞만 보고 전진하는 유형의 지도자입니다.
그런 바울에게도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느껴야 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바울에게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질병인지는 잘 모릅니다. 이에 대해 학자들간에는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빛을 보고 실명했을 때, 비록 그 다음에 눈을 뜨기는 했지만, 안질 비슷한 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바울이 밤빌리아 연안의 늪지에서 전도를 할 때 아마 그때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그 후유증으로 고질병을 알지 않았나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바울에게 간질이 있었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도 합니다. 성경에는 어떤 병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그 병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 때문에 바울에게 몹시도 큰 고통을 주었음에는 틀림이 없었고 또 성도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울을 거절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천사같이, 바울의 약함을 감싸주었고 오히려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 줄만큼 바울을 사랑하는, 어떻게 보면 사제지간의 사랑이 담뿍 담긴 아름다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그러나 바울이 떠난 다음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간사한 것입니다. 바울이 떠난 2,3년 후 이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이 아닌 거짓진리를 가지고 들어와 대 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아픔입니까? 이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사제지간의 사랑이 넘쳤던 교회, 가르침의 열정 앞에 단순히 배우는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성장하던 교회가 이젠 변질된 타락의 길로 가게 될 때 가르치는 자의 그 고통을 여러분, 그 심정을 아십니까? 얼마나 통증이 컸으면, 그는 갈 3:3절에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이 가르쳤던, 성도들이 하나 둘 진리에서 떠나고, 변질되어 가는 안타까움 앞에 그 상황을 바라보는 목회자의 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찹찹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는 무너진 공동체를 일으키기 위해, 사람을 세우기 위해 4: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가장 위대한 영향력입니다. 절대 포기 할 수 없는, 심지어 자신이 잘못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다시 세우겠다는 거룩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해산의 수고', 그것은 생명을 내 놓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주저앉는 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지금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무슨 말입니까?
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매사에 의욕을 상실하고 좌절할 때 우리는 종종 아무도 내 편은 없다고 불평합니다. 나는 그저 속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나를 속이고 인간들이 나를 속였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하나님도 나와의 약속을 배신하셨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나님도 나를 속인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노력했지만 결과가 뭐냐?”고 불평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당신은 살아계시기나 하십니까? 아니 살아 계시다면 당신은 전능하신 분은 아니십니다. 당신이 전능하시다면 내가 이렇게 되기까지 어떻게 그렇게 구경만 하고 계십니까?”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런 생각 자체가 실상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를 스스로 돌이켜보면 우리는 너무 연약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고,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려움을 당하면 또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합니다. 그래서 시편 103:14-15 보면 "우리는 진토와 같다" 진흙과 같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흙으로 빚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의 날들은 풀과 같다" "우리의 영혼은 들의 꽃과 같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오래 사는 것 같아도 잠깐 이라는 말입니다.또 의학자들은 말하기를 앞으로 120세가 평균수명이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120세가 평균수명이 되어도, 그래서 보통 130세 140세 사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게 긴 것 같지만 지나고 나면 잠깐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꾸 낙심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인간은 무능하고 나약할 뿐 아니라 인간은 불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보잘 것 없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불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곳에서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 모든 전체가 신앙으로 이루어지게 될 때에 그곳에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가는 걸음은 기쁘고 즐겁습니다. 신앙으로 가는 길은 형통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져내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신 그 분이 보고 알고 계시다면 된 것 아닙니까? 실상 때가 찬 결정적인 시각에 그 분은 행동을 시작하셨고 제자들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아직 나의 상황이 어두운 밤이라 해서, 아직 구원의 손길이 임하지 않았다 해서, 결론을 성급하게 내리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이 안 계시다든가, 내게는 관심이 없으신 분이라든가, 혹은 나를 버리신 것으로 말입니다. 아직은 살을 베이는 아픔이 있어도, 아직은 밝아올 새벽의 징조가 없어도, 아직은 상황반전의 기적이 없어도 제발 낙심만은 마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향하여 소리치십시오. “하나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2. 성령으로 선한 것을 심었기 때문입니다.우리 모두는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뿌리고 심고 있습니다. 어제 하루를 살았다는 말은 우리가 지나간 시간과 공간에 무엇인가를 뿌리고 심은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심지어 성도 중에도 두 가지 종류의 심는 자들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자와 성령을 위해 심는 자가 있다고 말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가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낙심의 정당성을 말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지난 한해 아니 예수님을 만난 이후 우리는 무엇을 심기 위해 살아왔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만난 순간부터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인생에서 모든 것이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하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명령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가장 위대한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런 명령들에 대한 순종의 동기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온 것이라면 우리는 성령을 위하여 심고자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예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지닌 모든 약점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내 인생을 사는 동기가 복음이었고 사랑이었다면 적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선한 동기를 인정하셨다는 것을 인하여 위로를 받으십시오. 아직 결과가 없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직 내가 내 인생이 이런 삶을 추구함에 대한 보상이 없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우리의 인생의 밭에 선한 씨앗을 뿌린 것이라고 주께서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예수를 만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동기가 성령의 소원이 아닌 육신의 소원 만이었다면 그리고 그런 육신적 욕망이 이루어지지 못한 좌절로 지금 고통하고 있다면 당신이 할일은 낙심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입니다. 비록 그런 욕망은 이루어진다 해도 주님 앞에 인정되지 못할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것들을 썩어질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많은 경우 외형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이 주의 일이라 해도 명분만으로 그 일을 성령의 일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명목상으로는 전도나 선교라 해도 그 일도 육체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의 본질적 차이가 무엇입니까? 빌3:3의 말씀이 그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이 말씀이 경고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랑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을 나타내고 자랑하기 위해서냐는 것입니다. 대게 조금 봉사하면서 요란스런 선전에나 열중하고 자기 손은 까닥 안하고, 다른 이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고 큰 소리치고, 봉사의 장에서 다른 사람 시험이나 들게 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런 육신적 성도들의 모습입니다.그렇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의 낙심이 자기를 좀 자랑해 보려고, 자기 욕심 좀 채워보려고 하다가 뜻대로 안된 좌절 때문이었다면 우리가 할 일은 회개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주를 위한 인생을 살고자 한 동기로 성령의 인도 따라 노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고통으로 아파하고 계시다면 제발 낙심만은 마십시오. 게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추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분명 선한 씨앗을 심었다고 인정하십니다. 우리가 비록 아직 선한 결과를 보지 못했어도 주께서는 우리를 향해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선한 동기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할 본문이 가르치는 마지막 이유가 있습니다.3. 심은 것을 거두는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전도서의 기자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 때가 있다”(전3:1)고 말합니다. 심은 때가 있으면 반드시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심음과 거둠의 법칙입니다. 추수의 법칙입니다. 이 심음과 거둠 사이에서 낙심하지 않으려면 시간을 견디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가치 있는 거둠일수록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시간을 인내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선한 노력이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좌절감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기억할 말씀이 바로 본문 9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때가 이르면 무엇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거두리라”는 약속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해가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움이 있다 할찌라도 이제 우리 씨를 뿌리는데 주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저는 씨앗을 뿌리는 목회자입니다. 새벽마다 주일마다 성도님들의 가슴에 말씀의 씨앗을 뿌립니다. 올해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말씀의 씨앗을 뿌립니다. 씨앗은 작고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 이 씨앗은 서서히 자랍니다. 당장 결과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 까닭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잘못하면 좌절하게 됩니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농심을 가지고 인내해야 합니다. 저만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씨앗을 날마다 뿌리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뿌린 씨앗들은 언젠가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작은 씨앗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겨자씨에서 천국을 보셨습니다. 천국의 원리를 보셨고, 우주의 이치를 보셨습니다. 씨는 작지만 작은 씨앗 속에 엄청난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힘과 놀라운 잠재력이 담겨 있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작은 씨앗 속에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도토리 한 알 속에 참나무 숲이 담겨 있고, 수박 씨앗 속에 수천의 수박이 담겨 있습니다. 씨앗은 힘이 셉니다. 윌리엄 J. 브라언은 “수박씨는 자신보다 2십만 배나 되는 무게를 뚫고 땅 밖으로 올라온다.”고 말했습니다. 씨앗의 생명력은 대단합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야생초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서서히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야생초를 볼 때면 생명이 얼마나 모진 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씨앗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 환경을 극복해 내려는 거대한 힘을 그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제 바른 것을 심었다면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나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은 다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좋을 때는 좋지만 언제든 우리를 떠날 수 있고 실망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대우하셨나 생각해 보니까,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저 자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스스로 힘들어 했던 적은 있지만,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떠나신 적도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송 중에 이런 곡이 있죠.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신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그렇습니다! 세상은 때때로 우리를 실망시키고 속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이 되십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와도, 그럴 때 사람들은 다 나를 외면하고 떠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런던에 한 모퉁이에서 구두를 닦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빚 때문에 감옥에 갇혀있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 구두를 닦아야만 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으면서도 소년은 얼굴에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늘 노래를 부르는데 밝은 노래만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구두 닦는 일이 뭐가 그리 좋니” 그때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즐겁지요. 저는 지금 구두를 닦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닦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이 바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세계적인 작가 찰스 디킨슨입니다. 아무리 먹구름이 짙어도 그 먹구름 뒤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환경과 여건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모른 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어린 찰스 디킨슨이 손님의 반짝 거리는 구두 코 위에서 희망의 별빛을 보았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여러분의 희망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새가 비를 피하는 법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독수리처럼 구름을 뚫고 더 높은 창공으로 올라가거나 참새처럼 처마 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당장은 처마 밑에 피하는 참새가 약은 것 같지만, 참새는 구름 위 눈부시게 푸른 하늘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면승부를 거시기 바랍니다. 시련이 닥쳐와도 주저 않지 마시고 당당하게 맞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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