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충성한 자들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09-08-02 |
조회: 2444
끝까지 충성한 자들. 수22:1-6. 2009. 8/2
1947년 미국의 시카고 근교의 위스칸신 주에 있는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과학자, 천체물리학자 닥터 첸드리스카 박사는 시카고 대학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와서 고급물리학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몇 주후에 다시 대학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사님 아무래도 강의를 cancel해야만 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클래스가 너무 작아서요. 두 명밖에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첸드리스카 박사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클래스가 작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죠.”눈보라, 차가운 사나운 바람을 헤치고 시카고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는 일주일에 이틀 동안 한번도 빠짐이 없이 그는 계속적으로 이 겨울 동안 강의를, 두 학생을 상대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십년이 흘러갑니다. 이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라는 분이고 그리고 또 한 분은 충도 리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성실한 강의, 두 사람을 앞에 둔 이 한 분의 강의가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 했던 본문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난 다음 여호수아가 생사를 건 전쟁에서 충성을 다하며 묵묵히 따라 주었던 세 지파에 대한 격려와 축복의 메시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 세 지파는 루우벤과 므낫세와 갓지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호수아를 묵상하고 있지만, 사실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하나 가나안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어떤 조건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에 절대 열세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어떻게 당시 고대 사회에서 가장 호전적인 가나안의 수많은 이방 민족들과 벌였던 7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하고 안식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지 않습니까?
물론 여호수아의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던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여호수아의 리더십 못지않게 그를 뒤에서 묵묵히 따라주며 성실하게 순종해 준 수 많은 부하들의 헌신도 결정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의 공헌이 두드러졌습니다. 이들은 지난 날 광야에서 여러 사나운 부족들과의 싸움에서 최선봉에 서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습니다. 승리한 이스라엘군은 전과에 따라서 적에게서 빼앗은 가축을 분배했고, 전공이 이들 지파에게 가장 많은 가축들이 돌아갔습니다. 가축이 많아진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난감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많아진 가축들을 데리고 이동하는 것과 그 가축들을 충분히 먹일 푸른 초장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단강 동편 땅을 이미 정복해 놓았던 이스라엘에 요단강을 건너기 전, 르우벤과 갓 지파는 광활하여 가축 먹이기에 적당한 그 땅에 그냥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자기들만 편하게 안주하려는 이기적인 것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화합을 깨뜨릴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까? 실제로 다른 지파들도 주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를 이어 새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하기 직전, 이들 세 지파에게 옛날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선봉 부대로 나설 것을 명령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는 사실 지도자의 자리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이스라엘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수 2:14-15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너희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고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해돋는 편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 이 말은 “너희만 잘살려고 하지 말고 모든 백성이 다 잘살 수 있도록 도우라. 우리는 다 한 형제들이다”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형제가 전쟁 중에 있는데, 형제가 굶주리고 위험에 처해 있는데, 어찌 너희들만 편안히 있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안주하지 말고 함께 약속의 땅으로 나가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 여호수아의 명령에 이스라엘 전체에서 가장 막강한 군대를 갖고 있던 이들 세 지파들은 군소리 없이 순종했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 속에 이젠 좀 쉴만도 하고 그리고 그동안 가족들과의 안정적 삶을 왜 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이 겪고 살아 왔습니까? 그러나 이들이 여기에서 자신들의 것을 포기한 것은 한 순간의 감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광야 여정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40여년을 돌아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이 축복을 누릴 수가 있었는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갈 때, 지난 날 함께 내 인생 한 복판에서 함께 동행 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하실 것을 확신했기에 지금까지 베푸신 그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내려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기나긴 전쟁을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들과 함께한 이 세 지파에 대해 결코 그들의 헌신과 그 충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여기 3절을 보십시오.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여기 ‘오래도록’ 여기 ‘오래도록’ 이란 의미는 7년의 가나안 전쟁을 말합니다. 지금 세 지파는 끝까지 전투에 임했고 또 형제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깨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책임감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특권층은 많이 누리는 만큼 그에 따르는 의무를 감당해야 된다는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2007년으로 기억합니다만, 영국의 황태자가 이라크 전쟁에 최전방에서 전투 요원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뭐,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할수만 있으면, 능력만 되면 모두 자녀들을 군대에서 뺄려고 하는 우리의 가치관과는 너무나 다른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나 옥스퍼드 대학교에 가 보면, 나라에 전쟁이 났을 때 제일 먼저 전쟁터로 나가서 목숨을 바친 동문들의 사진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학교의 자랑이요, 가문의 자랑입니다. 평소에는 남보다 많은 것을 누리는 것 같아도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가장 먼저 달려가 목숨을 던지는 불꽃같은 책임감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귀족 문화가 오랜 세월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여러분! 여기 루우벤이나 므나셋, 그리고 갓 지파의 이 변함없는 충성된 삶은 한마디로 배려하는 삶입니다. 여기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는 자신들이 중간에 떠난다면 이 약한 자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삶의 기본이 되고 원칙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정신 중에 하나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중에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개미와 코끼리가 함께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눈치 없이 자꾸 TV 앞으로, 다가앉는 바람에 개미가 TV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개미가 코끼리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너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 내가 니 앞에 앉아서 니 시선을 막아 놓으면 기분 좋겠어?”
주위에 보면 이 유머에 나오는 코끼리처럼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오직 자기 자신의 기준에 맞춰놓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의 처지와 환경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자기중심으로 행동으로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진정한 사귐과 교제를 하지 못합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그 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조차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내 떠나가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 친구가 별로 없고, 항상 외딴섬처럼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 주위에는 항상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주위에는 항상 친구가 많습니다. 항상 이해하는 이 사람의 넉넉함에 반해 서로 친구가 되려고 합니다. 설령 오해로 말미암아 갈등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내 그 오해가 풀립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저는 이번 연합 수련회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참 성숙해졌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익숙치 못한 환경 속에서 그것도 서로 겪어보지 못한 분들이 함께 지내는 일들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여름에 난방을 때야 할 정도로 추웠기에 밤을 설친 분도 많았고, 식당 위원들은 그 엄청난 일들을 감당할 때 하나님이 내게 맡긴 일임을 알고 묵묵하게 섬겨나갔습니다. 그리고 특히 유.초등부 교사 여러분들의 헌신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바닷가라든지, 무릉계곡을 다녀오고 특히 봉평에 있는 허브나라에 갔을 때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들이 가지는 그 책임감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느 교사는 칭얼대는 아이 하나를 붙잡고 그 아이의 투정을 다 받아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인들 속에 있는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합니다. 하수구에서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아와 싹을 트는 것을 보았습니까? 집채만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한서리가 내리는 겨울 산꼭대기에서도, 소나무가 사철나무 되어 올곧게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 숨쉬는 것을 보았습니까? 지난 번 몽골에 다녀와서 목장 심방 때 말씀 카드에 에델바이스를 넣어서 드렸습니다. 이 에델바이스는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습니다. 추운 고산지대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고 봄기운이 일어 날 때 피는 생명력을 지닌 아름다운 꽃입니다. 꽃말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하며 허리가 꺾이고, 형벌 같은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 그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여유가 있습니다. 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일을 감당합니다.
Ⅱ.이제 이들과 헤어짐이 아쉽지만, 여호수아는 다시 한번 지도자로서 이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5절에 ‘사랑하다’의 히브리어 ‘아하브’는 ‘좋아하다, 기뻐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부담되고 짜증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든 일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기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절벽 위에 핀 꽃을 따다 주기 위해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위도 서슴지 않고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끔찍하게 싫은 사람이 만약 물 한 컵 떠다 달라고 한다면 바로 옆에 물컵이 있어도 질색을 하며 도망가고 싶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딱딱한 종교 의식과 지루한 의무감으로 전락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그 사랑을 잘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 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한 순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연애는 불꽃이지만 결혼은 난로와 같다고 했습니다. 계속 땔감을 넣어 주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깨어 계속 불을 지피지 않으면 난로도 언제 차갑게 식어 버릴지 모릅니다. 가장 귀한 시간을 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일이 곧 난로에 땔감을 넣고 불을 계속 지피는 일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사랑의 유지는 뭐, 다른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친근히 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착 달라붙어라, 꼭 붙잡아라, 있는 힘을 다해 좇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표현해야 할 행동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세 지파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한테 착 달라붙어 있어야 된다, 항상 하나님 손을 꼭 붙잡아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좇아가 매달려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어진 복을 탄탄하게 지켜 나가는 길이기 ?문입니다.
우리의 본능은 자꾸만 하나님을 뒤로하고 뛰쳐나가서 자신의 힘을 믿으며 살라고 합니다. 자기 멋대로 인생을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위험한 유혹의 시초입니다. 하이에나는 새끼 사자를 공격할 때 가장 먼저 어미 사자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한다고 합니다. 어미 사자의 간섭이 귀찮다고 자유를 찾아 홀로 떨어진 새끼 사자는 곧바로 난폭한 하이에나 떼들의 사냥감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언제 악한 세력의 밥이 될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스스로를 강하다고 여기며, 자신을 과신하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생존의 열쇠는 하나님께 ‘착 달라붙는 것’입니다.
동행의 삶!!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시73:28절에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들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누군가 소위 힘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사회에서는 윗선에 줄을 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인생들이 가장 힘있는 분,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왜 줄을 대려고 안하는지가 ‘이것이 궁금하다’입니다. 그분이 보이지 않아서 일까요? 아니면 그분을 가까이 하는 방법을 모르는 때문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우리에게 먼저 그분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약4:8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착 달라붙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경건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안톤 루빈스타인이 말했던 유명한 말입니다. "연습을 하루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을 안 하면 비평가가 알고, 사흘을 안 하면 청중이 안다." 그에게 무슨 연습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연습이 부족하구나!' 하는 것을 본인이 아는 것입니다. 또 게을러서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벌써 비평가들이 냄새를 맡는 것입니다. 사흘을 연하지 않으면 아무리 기교를 다해 연주를 해도 청중들이 벌써 '연습이 부족하구나!' 하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연습이란 것이 이렇듯 중요합니다. 영적인 경건의 연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내 곁에서 함께 걸어가신다고 해도 우리가 동행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제 세 지파는 그들의 가족이 머무는 곳에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 걸음이 얼마나 가볍겠습니까? 그 동안의 희생과, 헌신의 열매를 보며 가족의 품으로 길을 떠나는 그 당당함, 얼마나 위대합니까? 우리도 이제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하는 그날 주님의 영원한 안식의 품으로 안겨야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 내게 맡긴 그 일에 충성을 다 합시다.
헨리 C.모리슨이라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금세기 초 아프리카에서 40년 동안 개척적 선교 사역을 하는 동안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기도 하고 이젠 늙은 선교사가 되어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타고 돌아오던 배에는 아프리카의 한 국가를 방문 후 코끼리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데오도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뉴욕 항구로 입항하고 대통령이 내리자, 붉은 레드 카펫이 깔리고 군악대의 팡파레 소리로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일행이 항구를 빠져 나간 후 모리슨 선교사가 항구의 출구로 나서자 레드 카펫도 없었고 군악대의 팡파레 소리도 멎은 후였고 그를 마중 나온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는 저녁 노을 진 하늘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답니다. “주님, 이것이 40년간 아프리카에서 저의 청춘을, 저의 건강을, 그리고 저의 일생을 바친 결과란 말입니까?” 그때 그는 저녁 노을 사이로 말씀하시는 조용한 한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헨리야,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단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레드 카펫이 아닌 황금의 유리길로 군악대가 아닌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내가 너를 마중 나오마”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충성의 순례를, 섬김의 순례, 그 영원한 사랑의 순례를 계속해야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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