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성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09-08-09 |
조회: 2024
도피성 / 여호수아 20:1-6 / 2009.8.9
이제 우리나라가 돌아오는 15일 광복 64주년을 맞는데 그 동안 일제에 피압박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까? 한 순간에 영토와 주권과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36년의 그 고통은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우리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있습니다. 그들은 독일에게 엄청난 고통을 받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독일에 히틀러는 패색이 짙은 것을 알고 독일의 합동 참모본부 지하 벙커에서 자살을 함으로 자기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전범들은 미리 준비해둔 금궤를 잠수함에 싣고 남미로 도주를 해 갔습니다. 그래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같은 나라에서 변장을 하고 숨어 살았습니다. 물론 잡힌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도 얼굴을 성형수술을 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인생을 마쳐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많은 유대인들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실 앞에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포로수용소에 끌려가서 죽을 때는 자기 동족들이 그렇게 많이 죽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으로부터 자료를 받아서 그것을 분석해 본 결과 약 600만 명이 나치 전범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유대인 중 ‘시몬 비젠탈’이라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유대인 수용소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살아났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사랑하는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정말 내가 살아 만 나간다면 땅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이 원수들을 복수하리라.”다짐을 하고 복수심을 키우면서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사람은 오스트리아 린쯔와 비엔나에 “전범 기록 연구소”라는 연구소를 설립하고 2차 대전 때 유대인들을 학대했던 사람들의 모든 명단을 수집하고 그들의 모든 범죄기록을 관리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의 한 평생을 전범들을 추적해서 잡아 죽이는 그 일에 바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 젊은이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이런 전범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동참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2차 대전이 끝났을 때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전범들을 잡아서 자기 손으로 죽여야 되겠다.”는 그런 복수심에 치를 떠는 사람들로 들끓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5년 이상 추격하고 추격하고 또 추격해서 결국 그들의 원수이던 이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드디어 체포를 하게 되어졌습니다.
이 아이히만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뉴스를 타고 전달되었습니다. 세계에 흩어 져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저 아이히만은 찢어 죽일 놈이다. 히틀러보다도 더 나쁜 놈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아이히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논란들을 거듭하게 되어졌었습니다. 이때 이 시몬 비젠탈이라는 사람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용서하자. 그러나 절대로 잊지는 말자.” 정말 그를 잡아서 갈가리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은 복수심으로 그를 추격하고 그를 잡았는데 그리고 온 세계 유대인들이 그 한사람을 처벌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의 복수심을 불태우려고 했는데 그가 정작 체포되었을 때 거기에 앞장섰던 시몬 비젠탈은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아이히만에게 복수를 할 것이 아니라 정당한 재판 절차를 통해서 이 아이히만 이 처벌을 받도록 하자.”이렇게 호소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의 그 복수심을 가라앉히고 1961년 그를 재판에 회부했고, 1962년 5월 그가 체포된 지 2년 만에 그를 사형장에 세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사람을 다루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죽을 죄를 저질러도, 한 생명을 끊게 하는게 참 어려운 것입니다. 이제 7년의 전쟁이 끝난 다음, 함깨 더불어 사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보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살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가 볼 도피성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고의로 살인 한 자는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지중 오살한 자에 대해서는 피의 보수자로부터 보호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이것이 도피성입니다. 3절을 보시죠.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살인 사건이 났을 경우 고의로 죽인 게 아니라 실수로 죽인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 지나가던 사람을 쳤는데,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겁니다. 물론 사람을 죽인 것은 분명히 범죄입니다. 하지만 실수로 죽였는데 그 사람마저 죽이면 고귀한 생명이 연쇄적으로 살인이 이루어지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그러면서도 공평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반영된 제도입니다. 물론 고의로 죽인 경우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살인자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피의 보수자라는 말이 바로 그겁니다. 피의 보수자는 피살자의 원수를 갚아주는 사람으로, 피살자에게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이 살인자를 죽여도 아무 말을 못합니다. 그게 구약 이스라엘의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죽인 경우는 예외적으로 도피성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겁니다. 9절 말씀을 또 보시죠. “ ...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도피성으로 도망가서 재판을 받을 기회를 주라는 겁니다. ‘회중 앞에 선다’는 말이 바로 그겁니다. 재판의 결과 정말 실수로 죽인 것이면 도피성에 머무르며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고의로 죽이고 도망친 것으로 판명되면 피의 보복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 도피성은 접근하기 쉬운 곳에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3곳, 가나안 땅에 3곳 합해서 6곳의 도피성을 만들어서 어느 곳에서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신명기 19장 3절과 6절에 도피성으로 가는 도로를 잘 닦아놓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중간에 강이 있으면 다리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겨울이 지나면 도로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에 봄이 되면 장로들이 돌아보고 그 망가진 곳은 다 고치도록 했습니다. 만약 삼거리가 나오게 되면 삼거리에 큰 표시를 해두어서 도피성이 어느 방향인지 정확하게 표시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가는 길이 멀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2.그리고 도피성문은 24시간 항상 열어놓아서 언제라도 누구든지 바로 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실수로 살인을 했는데 뒤에서 보수하는 자가 망치를 들고 쫓아온다고 생각해보세요. 간신히 도피성에 도착했는데 문이 닫혀있다면 그만 도피성 문 앞에서 죽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을 언제나 열어 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도피성 제도를 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게 됩니다.
3. 도피성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35:15)고 기록되었습니다. 도피성을 이용하는 데는 민족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도 들어갈 수 있고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4. 도피성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셔서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곳입니다. 도피성이 안전한 이유는 담이 높아서나 땅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도피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손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안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피성으로 도망간 사람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는 그 성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습니다. 만일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가 피의 보복자에게 잡혀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죽으면 완전 사면이 됩니다. 그래서 본래 살던 고향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는 이 도피성이란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비록 심각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오히려 그 두려움과 고통 속에 떨고 있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한 생명을 함부로 잃고 싶지 않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 같으면 당장에 어떤 조치를 내릴 만한데도 하나님은 결코 감정에 휩싸여서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함부로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인내하시며 기다리시는 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이 아침!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사랑은 보통 사랑이 아닙니다.
요10:28-29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은 하나님에게도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포괄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기 것, 자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독특하고도 강합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자기 자녀에게는 애착이 얼마나 강합니까? 뜻하지 않게 아이가 실종이 되면 슬픔과 초조함을 가슴에 앉은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타게 그 아이를 찾아다니는 부모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 잠인들 제대로 자겠습니까? 음식인들 제대로 넘어가겠습니까? 얼마나 속이 타고 안타깝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제 자식이기 때문에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독특합니다. 이는 우리 좁은 상식을 가지고는 다 담아낼 수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부흥을 경험할 때, 그 부흥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그는 잔인하기 이를데없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잔멸하고 예수 믿는 자를 색출해서 공의회에 넘겨주어 그들을 죽게 하는 기독교인 편에서는 그런 원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당신의 도피성에 머물게 하시고, 그를 통해 기독교 역사를 새로 써내려 가도록하십니다. 이 사실 앞에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뭐,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 역시,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 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는지, 어거스틴은 어느 날 이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고백합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일상의 삶을 볼 때 늘 이 하나님의 사랑을 끌어안고 살아야하는데 때로 자기중심에 매여 살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영혼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메말라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여보 당신 왜 울어요.", "내 마음이 병들었어. 내가 주님의 십자가 보혈 얘기를 들어도 마음에 감격이 없어.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어. 내 심령이 병들었어." 이는 스펄전에게만 있는 고민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무덤덤하게 대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사는 인생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요, 더 나아가 성숙한 성도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피의 보복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데 도피성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연약함과 억울함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곽으로 지켜 주심을 날마다 볼때 얼마나 감격과 감동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하루하루를 기적같이 살고 있습니다. 제가 기적같이 산다는 말을 할 때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바닥에서 사고를 당하여 다치거나 죽습니까? 그런데 내가 이렇게 멀쩡한 것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인가요? 내가 운전을 잘해서 그렇습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만 가지 병균의 공격을 받아 쓰러지고 있는데, 그래도 내가 이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살고 있는 것이 내가 건강관리를 잘해서 그런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병이 들었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공포에 떨지 마십시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쓰러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남 보기에는 배운 것도 별로 없을지 모릅니다. 남 보기에는 성공을 못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남 보기에는 그렇게 대단하게 살지 못하는 초라한 집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엄청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른손을 들고 보호하고 지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초라하게 보여도 우리는 절대로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죽는 것 같아도 절대 죽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오른손이 우리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가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병상에서 고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내 폐를 지켜 주시고, 간을 지켜 주시고, 내 혈압을 지켜 주시니, 그래도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면 무슨 불평이 있습니까? 열 평짜리 아파트면 어떻고, 백 평짜리 아파트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 입에서 감사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주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오늘 이 아침!! 영원한 우리의 보호자요, 구원의 도피성이요, 사랑의 안식처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아직도 피난처이신 예수를 알지 못하는 숱한 인생들에게 우리 인생의 도피성을 소개해야하지 않습니까? 사랑의 빚을 진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목적이 바로 복의 근원(=복의 통로)이 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내 인생의 도피성으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 할 수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성령님께 붙잡혀 내 한 목숨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나를 영원한 도피성인 예수의 품안에 들어오게 하신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 모든 자들을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성으로 날마다 초청하며 살아가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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