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2015년 4월 19일 눅 24:13-27절 -이승진 목사-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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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한 주일을 맞이해서 주님의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님들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사망 권세 깨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도 부활의 능력과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망 권세 깨고 부활하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부활의 능력과 영광의 자리로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만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부활의 주님을 제대로 믿고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살기 때문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첫째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부활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정말로 부활의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면 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면서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가? 왜 내 삶 속에서는 주님의 능력보다는 사망의 권세, 마귀의 권세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믿기가 어렵고 현실적인 삶 속에서 부활의 능력과 영광을 누리며 확인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3년을 같이 먹고 자고 살면서 예수님 가까이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수 많은 기적을 눈 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는데 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4장 13절은 “그 날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날에”는 어떤 날입니까? 24장 1절을 보시면 안식 후 첫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은 무슨 날입니까? 예수님이 방금 사망권세 깨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 날에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해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두려움과 슬픔의 권세에 붙잡혀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생명과 기쁨 가득한 부활의 세상으로 인도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는 그 마음에 놀라움과 기쁨이 충만해서 무덤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한 걸음에 제자들에게로 달려가서 여전히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노라고 증거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1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이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은 18절에 나오듯이 글로바이고 또 다른 한 제자의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25리, 약 10킬로 떨어진 엠마오로 가면서 주님이 십자가 죽음사건에 대해서 갑론을박 토론합니다.
14절의 “이 모든 일”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안식 후 첫날에 주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사건들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서로 질문을 주고 받으면서 갑론을박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만 할 뿐 그 사건을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란스러운 사건에 대해서 갑론을박하고 있을 때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그들과 동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이 혼란스럽고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님은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부활의 능력을 누리지 못하면 고민거리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동행하시다가 적당한 기회가 되면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갑론을박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무슨 목적으로 질문하십니까? 주님은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물으십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 입으로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말씀드릴 기회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제자에게 그렇게 질문하자 이들은 얼굴 표정이 슬픈 표정을 짓고서 멈춰 섭니다. 왜 두 제자의 얼굴 표정이 어둡고 슬픕니까? 그 이유는 이 두 제자는 여전히 사망권세에 붙잡혀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은 무언가 혹시 내가 부활의 주님을 철저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반성해야 합니다.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얼굴에 기쁨이 없는 이유는, 주님의 부활이 하나의 무의미한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슬픈 얼굴 빛을 하고서 18절 이하에서 주님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당신은 행색을 보아하니 근자에 예루살렘에 채류했다가 그 도시를 빠져나오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근자에 예루살렘에 며칠이라도 머무른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당신은 요즘 그 도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단 말이요? 예루살렘이란 도시에서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왜 당신 혼자만 알지 못합니까? 세상 돌아가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왜 당신 혼자만 모르고 있소! 이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지금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앞에 세워두고 왜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당신 혼자만 모르냐고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 혼자만 모르고 있소?”라는 핀잔은 사실 누가 누구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겠습니까? 실은 예수님이 이 두 제자에게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이들이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부활을 모르는 이유는 무의미한 사실과 생명을 살리는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건사고에 관한 무의미한 사실(fact)과 생명을 살리는 진실로 이루어진 실재현실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건사고에 관한 사실은 그저 내 바깥 세상에서 일어난 무의미한 사건들입니다. 지금 놀이공원에 벗꽃이 눈부시게 휘날리는 사실은 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하나님이나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사실일 뿐입니다. 그들은 벗꽃 구경하지 않고 예배당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 마음 속에는 부활의 주님이 우리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일요일에는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그 진리가 있고 그 진리대로 우리는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많은 사실들이 있지만 그 사실들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그 사실이 진실로 바뀌어서 나에게 생명을 주고 능력을 주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 전까지는 모든 사실들은 그저 무의미할 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사실들을 지식적으로는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시험을 친다면 이들은 100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9절에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습니다. 21절 말씀처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아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20절에서처럼 대제사장과 관리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서 빌라도에게서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게다가 23절 말씀처럼 이 두 제자들과 가까운 여인들이 무덤을 방문했다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천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관계된 사실들을 참으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가 예수님에 관하여 이렇게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는데도 이 지식이 이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섭리를 내가 고집하는 요구조건에 맞추어서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내 입장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무리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셨지만 그 분이라도 내 인생 속으로 찾아오시려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찾아오시기를 고집피우기 때문입니다. 24절에 보면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가 주님의 시신이 눕혀 있었던 무덤을 방문했습니다. 무덤에 가보니 과연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 무덤에 시체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활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부활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24절의 말씀처럼 그 자리에서 예수는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무덤 안에서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목격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무덤에 도착하는 그 순간에 죽어 있던 시체가 서서히 일어나면서 부활의 주님으로 바뀌는 모습을 직접 목격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뭐 그런 극적인 장면을 보여주기 어려우시면, 최소한 무덤 안에 주님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뭔가 하면 내가 교회를 출석하고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으면 하나님도 내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집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도 없고 죄도 짓지 않았는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분명하게 생각이 변하지 않고 성품이 변하지 않고 행동이 변하지 않으면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기도하더라도 내가 바뀌지 않고서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하여 무의미한 사실들만을 잡다하게 이것저것 늘어놓기만 할 뿐이고, 진정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사건으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모든 사실들이 혼란스럽고 답답합니다. 그래서 얼굴에는 근심과 슬픔이 가득합니다. 만일 주님이 부활하셨다면 왜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는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하는지 걱정도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요 며칠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나서 천하가 다 알고 있는데 왜 당신은 혼자만 이런 사실을 모르냐? 당신은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 맞냐? 오히려 예수님께 성질을 부리고 역정을 내고 있습니다.
무의미한 사실을 진리로 바꾸시는 주님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해서 사실을 진실로 바꾸실까요? 이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결정적인 방법은 바로 말씀과 성령입니다. 11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열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줍니다. 이 때 열명의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허탄한 듯이 들려서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12절에 보면 베드로는 그 소식을 듣고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주님이 부활한 것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고 열 두 명의 제자로 그 누구보다 예수님 가까이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으실 때 사망권세가 너무 무서워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실 때 로마병사들이 자기도 붙잡아서 죽일까 싶어서 도저히 예수님을 뒤따라 갈 수 없어서 다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승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쓸쓸하게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겨우 3일 밖에 지나지 않아서 베드로는 지금도 로마병사들이 자기를 찾아서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처형할까 두려워서 다락방에 숨어서 그렇게 오돌오돌 떨고 있습니다. 바깥으로 문을 열기가 두렵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귀에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주님이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소식을 듣고 다락방에 가만히 숨어 있을 수 만은 없어서 한 걸음에 무덤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덤 안을 살펴보니 왠걸!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만 보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 12절을 보면 무덤 안에서 세마포를 목격했던 베드로의 반응을 가리켜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반신반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가 아마도 아침이 조금 지난 오전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에 주님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 이제 32절에서 이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주님의 부활 소식을 나머지 제자들에게 전달합니다. 33절에 보면 엠마오의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서 하는 말이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도 나타나셨다는 간증을 전해 줍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 시몬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보이셨을까요? 주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시점은 베드로가 아침 일찍 무덤에서 세마포를 본 때 이후 그리고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전 또는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나머지 제자들을 만나기 이전 그 사이 어느 때입니다. 그 사이 어느 때 베드로의 심령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베드로는 무덤에 가서 죽임 당하신 주님의 시신이 뉩혀 있던 곳에 세마포가 개켜져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단정하게 개켜져 있는 세마포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사건사고에 관한 사실 fact입니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이 무의미한 사실을 이용하셔서 베드로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무덤 안에서 세마포만을 발견한 베드로는 참으로 이상하고 놀랍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합니다. 무덤 안에 주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세마포만 남아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누군가가 시체로 남아 있는 주님을 무덤에서 몰래 훔쳐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시신에는 채찍질 당하신 핏자국과 로마병사들의 창자국으로 온 몸에 피범벅인데 시신을 훔쳐가려면 굳이 세마포를 벗겨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마포가 차곡이 개켜 있다는 것은 주님이 직접 부활하시지 않고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주님이 진짜로 부활하셨나? 방금 전에 막달라 마리아가 말하기를 주님의 형상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형상이었는데 어떻게 주님의 시신이 그런 모습으로 변모하실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렇게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그의 머릿 속에 번뜩 떠오른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함께 만나서 담화를 나누시던 장면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 세 사람만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은 이들 앞에서 그 형상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로 변모되십니다. 그리고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도 빛과 같이 희어져서 감히 맨 눈으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밝고 거룩한 형상으로 변모되십니다. 말하자면 부활 이후의 모습을 미리 세 제자들에게 은밀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광체 앞에서 그리고 위엄찬 소리로 압도되어 제자들이 심히 두려운 마음이 들어 땅바닥에 납작 엎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엎드리자 예수님께서 다가와 손을 대시며 두려워 말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에 그 영광스러운 변화산에서 내려오는데 제자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빨리 동네로 내려가서 다른 제자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서 오늘 본 것을 다 말해 주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또 꿈에서도 감히 만나볼 수 없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강림하여 예수님과 담화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또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기 때문에 그 날의 충격과 감동을 입 안에 조용히 담아두고 비밀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답답하고 고통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런 답답한 마음에 대고 망치질을 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 17:9)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변화산의 영광을 직접 목격한 충격과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하나의 충격적인 말씀을 더하여 듣게 된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변화산 사건을 전부다 기록하고 있지만 특히 베드로의 설교를 녹취한 것으로 알려진 마가복음 9장 10절에서는 변화산의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한 세 사람 중에서 특히 베드로가 느꼈던 충격과 당혹감을 좀 더 사실적으로 기록해 두면서 이런 말씀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10절에 보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 말씀을 마음에 두면서 제자들끼리 서로 갑론을박 토론을 했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도대체 궁금하고 답답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다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당일에 베드로는 빈 무덤 안에서 세마포를 발견하고 이를 놀랍게 여기며 마음 속에 질문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무덤에 시신이 안치될 때까지 몸에 감싸고 있던 이 세마포를 벗어버리고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형상으로 변모되셨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의아한 생각을 하다가 결국 놀라운 비밀을 하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 모든 일을 다 미리 예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몇 달 전 변화산에서 이미 오늘 일어날 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예고하시고 자신이 나중에 부활하게 되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될 것인지 그 실제 모습까지도 자신에게만 특별하게 미리 보여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마음 속에 주님의 예언이 하나도 빠짐이 없이 모두 성취되어 주님이 결국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베드로가 목격한 주님의 모습과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어서 훗날에 베드로는 베드로후서를 기록하면서 1장 17절과 18절에서 이렇게 이 날의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변화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십자가 고난을 감당하신 주님에게 그에 대한 하늘의 모든 상급과 보상으로 부활을 허락하셔서 주님은 성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최고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이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께 베푸시는 최고의 보상과 상급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친히 일으켜 부활시키셨다고 기록합니다. 세마포와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형상으로 변모하신 주님의 상호 관계를 고민하던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이 미리 예언되었고 또 변화산에서 주님이 이 모든 예언들을 친히 눈으로 보여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 가운데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고난을 받고 영광으로 들어가시는 그리스도를 깨달은 두 제자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방식도 동일합니다. 24절까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무의미한 사실들을 늘어 놓습니다.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오늘 새벽에 우리 중에 어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지만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도 만나보지는 못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25절부터 다시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십니다.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라는 책망은 구약성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가리켜서 한 마디로 너희는 그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책망할 때 늘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네 가 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하려는 동기가 있느냐 없느냐? 둘째는 일을 완수하려는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 셋째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의지와 추진력이 있느냐 없느냐? 동기와 목표, 그리고 의지와 추진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모두 포함해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동기도 없고 반드시 사랑을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목표와 의지도 없고 그것을 실제로 감당하기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낼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심판이 예고됩니다. 하지만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작정 진노하시고 우리를 그냥 저주와 심판 가운데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우리와 맺은 언약관계를 회복하시되 그 죄의 삯인 저주와 심판과 사망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 하나님의 어린 양이 대신 담당할 것을 예언합니다. 구약에 모든 선지서의 말씀들이 그런 말씀입니다만, 예를 들어 이사야서 53장 5-6절 말씀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우리 죄악을 대신 감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미리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선지서에서는 중요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마음이 없는 문제를 하나님이 새언약으로 해결하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을 날이 온다고 말씀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더 이상 파괴하지 않는 새 언약의 시대가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2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새언약은 내가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시내산 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이다. 그 때는 내가 그들과 결혼의 언약식을 거행해서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트려버렸다. 33절에 하지만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시 맺을 새 언약은 이전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내가 나의 법을 돌비에 새겨서 그들 마음 바깥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둘 것이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던 이유는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언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그 말씀을 돌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심비에 새길 것이고 하나님이 언약을 보증하는 도장을 종이 잉크 위에 찍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사람 마음 속에 강림하여 내주하시는 완전히 새로운 언약을 채결하는 새언약의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얼마나 강력한가? 34절에 보시면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이렇게 힘들게 억지로 강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모든 백성들이 그 마음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조차도 못할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가하면 새언약의 시대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새언약의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있은 후로부터 400여년 지난 다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새언약의 예언을 모두 성취하십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서 우리 주님이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실 때에도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서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주님께서 직접 주님 자신의 피로 주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과 다시 새롭게 맺는 새언약의 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성경을 풀어주시면서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 죄의 대속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셨다고 설명해 주니까, 누가복음 24장 32절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점점 뜨거워지고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음을 믿을 때, 우리는 그 믿음 안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내 옛사람도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집에서 직장에서 더 이상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지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 그대로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옛사람의 이끌림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인도하시는대로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삽니다. 하지만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살더라도 육체의 욕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믿음, 주님을 믿는 믿음, 그리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주님의 부활의 능력대로 사는 것입니다. 슬픔과 사망이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도 기쁨과 생명의 능력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과 영광이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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