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죄의 은혜" 막 2:3-12절 2015년 4월 26일 -이승진 목사-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4-26 |
조회: 1670
이번 주 수요일 29일에는 일본의 아베 총리가 미국 상하원을 방문하여 합동연설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일본 총리로서는 역사적으로 상하원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하기 때문에 일본 정치계는 여기에 무슨 대단한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일본 수반이 먼저 천인공노할 과거사 만행들에 대하여 사과하지 않고서는, 전 세계 앞에서 어떤 발언권을 갖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 자격을 부정하는 이유는, 과거사에 대한 책임 있는 반성이 선행되지 않기 때문이고 과거사에 대한 책임 있는 반성과 사과는 인류 공동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독일 정치계 지도자들은 2차 세계대전 동안에 600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지금도 기회 있을 때마다 책임 있는 반성과 사과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인류 공동의 가치관을 존중하기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독일 정치계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이웃 일본의 정치인들만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과거의 범죄사실을 은폐할 생각만 할 뿐 책임 있는 반성과 사과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죄를 덮고 은폐하고 숨기면서 겉으로는 착한 척 하는 것을 가리켜서 한 마디로 위선(僞善)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위선의 문제는 영적으로 보자면 꼭 일본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 문제는 영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문제입니다. 불신자들은 마음 속에 가득한 죄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그렇게 자기 힘으로 죄를 억누르거나 숨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위선의 문제는 동시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늘 조심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속으로는 죄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그 마음 속에 온갖 지저분한 죄악들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다른 사람들 눈에 보기에 착하고 거룩한 척 위선적인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최고의 축복은 죄의 문제에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하니까 그 마음에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의 문제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참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님을 말씀 속에서 만나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중풍병자 치유에 관한 본문은 워낙 유명한 본문의 말씀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목사님들이 여러 번 설교해왔던 내용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께서도 그 내용을 익숙하게 잘 알고 계십니다. 2장 1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가에 위치한 가버나움에 머무르시는 동안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그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복음도 전하고 귀신도 내어 쫓고 나병환자와 같은 여러 병자들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왔는데 예나 지금이나 사실 예수님의 주된 목적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을 그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켜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를 누리면서 사는 천국 백성들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여러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귀신을 쫒아내시고 또 천국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서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침상채로 메워서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기를 기대하고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는 뇌신경이나 척추신경이 손상되거나 마비가 되어서 사지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반신불수의 몸으로 늘 침상에 누워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최소한의 생리적인 활동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 중풍병자가 어쩌다가 이런 질병에 걸렸는지 그 원인은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중풍병자에게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에 근거하여, 이 사람이 예전에 죄를 너무 많이 범해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렇게 중풍병을 앓게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보다 더 심각한 죄를 범하고 악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중풍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 중에도 얼마든지 악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중풍병자는 아마도 나이가 들어 몸이 노쇠해져서 혈관내
혈전이 쌓이면서 뇌신경이 마비가 올 수도 있고, 다른 부상으로 뇌신경이나 척추신경이 다쳐서 중풍병에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실수는 모든 질병을 범죄와 직접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이유와 원인을 잘 알 수 없는 질병이나 고난과 사건 사고들이 많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에는 그것이 당사자의 죄 때문인지 아닌지를 따질 생각부터 하지 마시고, 먼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무조건 도와주고 힘이 되어주는 것이 먼저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중풍병자를 침상 채로 메고서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이 네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중풍병자보다 먼저 들은 사람들도 이 네 사람이고 예수님께로 가면 고침 받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온 것도 중풍병자의 생각이기 전에 먼저 이 사람들의 생각과 믿음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이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침상채로 메고서 예수님이 머무르고 계신 집으로 다가가 보니까 왠걸 예수님이 머무르시는 집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겹겹이 두루두루 감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비켜달라고 요청하고 부탁을 해도 사람들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들도 여러 문제가 있고 질병이 있어서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데 또 자기 앞에 다른 사람들이 버티고 서서 길을 비켜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코가 석자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 정도면 대체로 포기할텐데 이 네 사람은 참으로 혁신적인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그것은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지붕으로 떠메서 데리고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거기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그대로 줄에 메달아 아래로 내린 것입니다. 주변에 모여 앉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하던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비범한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천정의 지붕이 띁겨져 나가더니 그 위로부터 침상이 밧줄에 묶여 내려오는데 그 침상에 중풍병자가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밧줄을 붙잡고 내리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주님 이 병자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은 이들의 간절한 믿음을 보시고 이 중풍병자의 질병을 고쳐주시기로 결심하십니다.
도대체 이렇게 기가 막힌 발상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세상에서는 이러한 기가막힌 발상의 전환은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이라고 합니다. 한 가지 상태나 문제가 오래되면 시간이 차셔 변하게 되고 변하다보면 통해서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에 그 분은 반드시 내 문제를 들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중풍병자의 집에서 침상을 메고 나올 때부터 보통의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한 번 해보다가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무성의하게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꼭 이 환자의 질병을 반드시 고쳐주셔야만 한다는 간절한 애끓음 속에서 출발한 길입니다. 그래서 이 정도의 어려움으로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고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강력하고 끈질긴 믿음은 과연 어떤 종류의 믿음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이 문제만큼은 반드시 해결해 주셔야만 한다는 간절함과 절박함의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번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 주실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흔들릴 수 없는 믿음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믿음과 신뢰가 오갈 때는 그 전에 먼저 서로 간의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관계가 없으면 믿음과 신뢰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른이 두 청년에게 선물을 줄 때 한 사람은 사랑으로 받지만 또 다른 사람은 그저 계산적인 생각 속에서 받습니다. 그 차이는 한 사람은 아들/딸이고 다른 사람은 아들/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붕을 뜯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주님은 이 사람들이 진정 나를 하늘의 하나님으로 기대하고 있구나! 그 믿음을 본 것입니다. 진짜 아들이고 진짜 딸일때만 비로소 가능한 행동들을 본 것입니다. 그 간절한 행동은 진짜 아들이고 진짜 딸일때만 비로소 가능한 행동이고 그 행동 속에는 진짜 아들이고 진짜 딸일 때나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믿음과 신뢰와 기대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번 문제는 하나님이 반드시 꼭 분명히 틀림없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 믿음은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책을 많이 읽거나 연구해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무작정 기도를 많이 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우리가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의 친 아들, 하나님의 친 딸로 태어나버렸기 때문에 그런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내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주장하고 발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 태어났고,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 그냥 선물로 그런 믿음을 새겨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믿음을 하나님께 주장하면서 누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라는 그 필연적인 관계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양자 양녀 삼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풍병자를 지붕에서 아래로 내리는 이들의 행동 속에서, 진짜 하나님의 아들답고 진짜 하나님의 딸다운 그런 간절한 기대와 믿음과 신뢰를 읽어내신 주님은 이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점은 우리 주님이 중풍병자의 요청과는 관계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5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침상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그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11절의 말씀처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런 말씀이 당장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고 “너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느니라”고 사죄를 선포하십니다. 왜 그러실까?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사죄를 선포할 때 그 주변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몇 몇 서기관들은 마음속에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서기관들은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학식과 권위를 자랑하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백성들에게 올바른 교훈과 진리를 가르치는 엘리트들입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하는 일은 오직 성전에서만 가능합니다. 그 성전 안에서도 정성스럽게 준비한 예물로 번제와 화목제의 제사를 드린 다음에 대제사장이 수 많은 무리들을 대신하여 아주 가끔 사죄를 간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제의 제사도 드리지 않고 어느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하여 제사장도 아닌 선지자 주제에 그것도 사죄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네가 너의 모든 죄에 대하여 사함을 받았다고 직접 선포하는 일은당시 서기관의 지식으로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죄의 선언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나중에 죽어봐야 아는 일이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 죄가 완전히 용서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그것은 나의 정성에 달린 문제입니다. 제사를 잘 드려야 하고 구제를 많이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선지자가 나서서 아무런 제사도 없이 그렇게 확정적으로 선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7절 말씀처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렇게 서기관들이 마음 속으로 예수님을 무시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이들의 속생각을 꿰뚫어보시고 9절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저는 이 질문을 맨 처음에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의미로 오해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너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사죄를 선포하는 것은 1차적으로는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일입니다. 신성을 모독한다고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2차적으로 실제로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시려면 자기가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참 어려운 일이다. 반대로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은 내가 너를 고쳐주겠다는 말씀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냥 고쳐주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 질문의 말씀은 사죄선포와 치유 중에서 어느 것이 내 입장에서 어렵겠냐? 당연히 사죄선포가 어렵지 않겠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죄선포를 먼저 하는 이유는 내가 사죄의 권세가 있음을 부각시키려고 그런 것이다.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그렇게 설교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하는 중에 이 질문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무엇이 쉬운지를 묻는 질문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보다는 10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사죄의 권세를 가진 분임을 깨닫도록 이끌기 위한 과정에서 던지는 질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중풍병자에게 사죄를 선언하는 것과 치유를 실행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을 먼저 말해야 너희가 내가 죄를 사해 주는 하나님임을 쉽게 믿고 받아들이겠느냐? 그래서 9절의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말씀은 예수님 입장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가 아니라 너희 입장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실행해야 너희들의 입장에서 내가 예수님이 사죄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쉽게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병을 먼저 고쳐주면 당시 서기관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2절 하반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우리가 세상에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 그렇게 감탄만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병을 고친 다음에 “네 죄가 사해졌노라”고 말하면, 그 죄는 누가 사해 준 것으로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용서해 준 것인가요? 아니면 하늘에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 것인가요? 예수님은 그저 사죄의 전달자일 뿐이고, 실제 사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용서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병도 고치시고 사죄도 선언하시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에게 죄의 용서를 기대하지도 않고 간구하지도 않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더라도 아무도 자신들과 관계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냐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예수님은 그저 수 많은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고 아무도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으로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겠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9절 말씀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말씀은 예수님 입장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가 아니라,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죄권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마음의 입장에서 어느 쪽이 쉽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중풍병자와 주변 사람들을 상대할 때 예수님의 최고 관심사는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고 곧바로 중풍병자의 질병을 고쳐주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모든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그동안 자기가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치유사건이 발생합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 중풍병자와 가족들을 괴롭혔던 병마가 떠나가는 기적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셨으면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요? 우리 같으면 예수님 앞으로 달려 나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우리의 악한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간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이 거듭 거듭 의도하신 사죄의 은총을 예수님께 간청하지 않고 그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토록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이런 신기한 일은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서로 수군거리면서 흩어지고 맙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신기한 기적을 기대합니다. 뭔가 신나는 구경거리 같은 일들을 기대합니다. 그러다가 그런 일들이 벌어지면 구경꾼으로 박수를 치고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그저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 같으신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는 말씀을 내 삶에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첫째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 여러 잘못을 범했고 실수를 했고 마음 속으로 온갖 탐욕과 음란과 교만과 시기 질투를 범했으며, 또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온갖 모욕과 학대를 겪으면서 자랐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인정해야 합니다. 내 스스로도 죄인이었고 또 내 주변의 다른 죄인들로부터 내가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는 내가 구세주로 믿는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모든 죄악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그 죄값을 지불해 주시기 위해서 친히 나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의미는 내 문제를 청산하기 위하여 내가 그 죄값에 해당하는 다른 어떤 응분의 보상을 위한 일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부다 그 마음 속에 죄갚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삽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였기 때문에 모두가 다 그 마음에 죄책감을 가지고 삽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한결같이 이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 죄값에 합당한 보상을 당사자에게 요구합니다. 비싼 돈으로 부적을 사거나 자기 몸을 스스로 학대하거나 금식을 하거나 어렵고 힘든 고행을 시킵니다.
미션이라는 영화를 보면, 18세기 남미에서 원주민들을 붙잡아서 노예상에게 팔아 넘기면서 돈을 버는 노예사냥꾼 멘도자가 나옵니다. 이 노예사냥꾼에게는 아내와 동생이 있는데 우 사람이 간통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에 화가 나서 힘이 없는 동생에게 결투를 신청해서 동생을 살인합니다. 당장은 화가 나서 동생을 죽이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친 동생을 죽인 죄책감에 자포자기한 생활을 합니다. 그 때 가브리엘 신부가 멘도자를 설득시켜서 동생을 위하여 새로운 인생을 다시 살아보라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멘도자의 입장에서는 과거에 동생을 죽인 자신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가브리엘 신부는 이 멘도자에게 한 가지 고행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예전에 자기가 노예사냥꾼으로 돌아다닐 때 사용했던 칼과 무거운 갑옷을 짐으로 만들어서 어깨에 걸머지고 폭포와 같은 절벽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예전의 죄를 속죄하는 고행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죄인의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그나마 다행스런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죄를 지은 자신을 용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멀리 하고 산 속으로 숨어서 혼자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살할 수도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교통사고를 당해서 콱 죽어버리지는 말고 팔이나 다리가 하나 잘라져버리면 내가 이렇게 벌을 받았다고 이제 나는 내 죄에 합당한 죄값을 받았노라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겠다는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값을 감당할 고행을 가르쳐 주니까 마음 한 편으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범죄한 다음에는 예수님이 없이 그 죄값을 해결하기 위하여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하나는 앞서 말씀드렸던 일본 정치인의 경우처럼 과거의 죄의 실상을 부정하고 착한 척 흉내내는 위선을 선택하거나 또는 마음 속에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두 다리를 쭉 펴고 자지 못합니다.
반대로 저와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믿기 때문에 속으로는 온갖 죄가 가득함에도 겉으로는 전혀 그러지 않은 척 위선을 선택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마음 속의 해결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서 늘 마음이 짓눌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우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조건을 누구에게 맡겨놓으셨는가 하면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맡겨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그대로 하나님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가 우리에게 범죄한 사람들에 대하여 용서를 먼저 해 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범죄한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내 바깥에 다른 사람들 중에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바로 내 자신을 가리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나 혼자서 스스로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음을 믿기 때문에 과거의 나를 내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용서해 주고 덮으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죄를 지었던 내 모습을 용서해 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은혜의 선물을 맛보아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3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만일에 우리가 과거에 범한 죄를 인정하고 용서하고 하나님이 다 덮어주고 용서해 주셨음을 믿고서 그 죄를 용서하면 그 죄가 사해질 것입니다(요 20:23).
하지만 우리가 그 죄를 그대로 두고서 용서해 주지 않고 기억하면서 과거에 나는 이런 죄 때문에 오늘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 죄는 그대로 남아서 우리 발목을 붙잡고 우리를 넘어뜨릴 것입니다(요 20:23).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주님은 우리의 과거를 용서해 주시고 기억조차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보혈로 죄 용서받고 정결한 신부처럼 순결한 모습만을 바라보십니다. 신자는 죄에서 완전히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신자는 더 이상 죄의 유혹이나 권세에 이끌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 이상 거리낄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주님 앞에 늘 담대하게 나아가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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