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여! 뜻을 정하십시오. 단1:8-16. 2015년 5월24일 청년 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5-24 |
조회: 1459
오늘은 청년 주일입니다. 청년하면 무슨 생각이 납니까? 어떤 목사님은 청년을 ‘현존하는 미래’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맞이할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 그 사람의 오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청년을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갑갑하게 막힌 절망스러운 현실을 밝게 열어갈 가능성 즉 시간과 열정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우리의 가슴이 가장 아프게 만드는 것은 ‘포기세대’라는 것입니다.
요즘 한창 피 끓는 나이에 자신들의 꿈의 날개를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방황하는 청년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봅니다. 현실의 벽이 너무 높기에 3포 세대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연애도 결혼도 아기도 포기하는 3포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3포 세대’라는 말이 회자되다가 그 후에는 ‘5포 세대’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3포의 연애와 결혼과 출산에다가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7포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 그리고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에다가 꿈과 희망까지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꿈과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그래도 오늘을 이겨내며 살아갈 용기가 생겨납니다. 지금 경제가 어렵고 취업이 어렵다 하더라도 꾸준하게 준비하면서 내일을 기대하며 산다면 언젠가 내 삶에 광명이 찾아오리라고 생각하고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꿈과 희망을 포기해버리면 더 이상 미래는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젊음의 때에 내일을 준비하면서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참 먹먹하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일한다 하더라도 겨우겨우 오늘을 버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갈 뿐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의 현실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 꿈을 현실로 이끌어가는 가슴에 피 끓는 열정이 있는 청년들 가운데 20%가 맨붕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우리 시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지금부터 26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다니엘이라는 청년도 우리보다 더 힘든 시절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불과 15세 전후의 나이에 침략군 바벨론에게 불모로 잡혀간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생전에 고국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평생을 이국땅에서 볼모의 신세로 살았습니다. 당시에 그가 끌려간 바벨론은 하나님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그 나라는 온 천지가 죄악으로 캄캄했고 더럽고 추악한 냄새만이 가득한 이방국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90세가 넘도록 그 지역에 살았고 정권이 세 번이나 교체되는 정치적인혼란 속에서도 새로 들어선 정권과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높은 위치를 지켜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동창 목사님이 이란에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정을 따라 이란 내의 기독교 성지를 순례하다가 수스(Shush)라는 시골의 작은 도시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곳에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산 궁터가 있었는데 그곳은 여러분도 아시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그 왕궁 터가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엔 안타깝게도 아무런 유적이 남아있지 않았고 다만 왕궁 터였다는 흔적만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놀란 것은 바로 그 왕궁 터 가까이에 잘 보존된 묘역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다니엘의 묘였습니다. 얼마나 흥분이 일어났겠습니까?
더욱 놀란 것은 작은 시골 마을인데 많은 이란 사람들이 찾아와 참배를 하고 있는 그 광경 앞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자기네 조상의 왕궁 터는 참담하게 훼손되어도 방치하면서 왜 이방인의 무덤은 이렇게 정성껏 관리하는 것일까? 왜 자기네 조상들 페르시아 왕의 묘역은 방치한 채 유대인의 묘역은 이렇게 보존하고 있을까? 왜 유대인을 이토록 2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참배를 하고 있을까? 더더욱 현재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방 땅에서 이방인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니엘은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히 세계 정치를 움직이는 오고 오는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삶을 보여주는 영향력을 끼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바벨론에 노예처럼 끌려온 이들은 한마디로 미래가 없는 청년들 아닙니까? 요즘 말로 노예로 끌려온 그들에게 있어서 성공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사치스러운 단어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노예로 끌려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일생에 한번 주어질까 하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것은 인재등용 구인 광고입니다. 당시 바벨론의 왕은 느부갓네살입니다. 그는 잔인한면도 있었지만, 세상 적으로 볼 때 그는 굉장히 지혜로 왔습니다. 자기나라에 끌려온 포로들 가운데 똑똑한 인재를 발굴을 해서 그들을 가르쳐서 자신의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인재등용 정책을 씁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파격적인 인재 등용을 바벨론의 왕인 느브갓네살이 제안을 합니다. 그 왕이 세운 선택의 기준을 보십시오. 그것은 흠이 없는 자, 아름다운 자, 모든 재주에 통달한 자, 지식이 구비하여 학문에 익숙한 자입니다. 흠잡을 데 없는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뽑혀진 사람이라면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 말하면 대단한 스펙을 가진 자를 뽑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구인 광고는 요즘처럼 취직이 어려운 때, 여기에 뽑힌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여기 6,7절을 읽겠습니다. ‘그들 중에 유다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과 아사랴는 바벨론의 사람이 되기 위해 선발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예를 인재로 삼을 때, 그냥 뽑겠습니까? 3년동안 교육을 시킵니다. 젊은이들에게 3년이라는 기간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3년이라는 기간을 통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구별해 냅니다. 3년 동안 그 나라의 학문과 언어와 음식을 먹는다면 젊으면 젊을수록 그 나라 사람으로 동화되기가 쉽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치밀하고도 지혜롭게 자기의 왕국을 견고히 세우기 위해 사람을 준비시킨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해 사람을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방법입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을 뽑고 최고의 대우를 해주면서 자기의 사람으로 세뇌를 시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없게 만듭니다. 그들의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 맨 처음 한일이 창씨개명입니다. 이름을 바꾸면 자기 사고가 일본사고가 되어 대한민국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에 잡혀가 처음 당한 것이 이름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사람 이름 끝에 히브리어로 ‘엘’ 혹은 ‘야’라고 끝나는 것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바꿔 버렸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벨드사살’로 바꿨습니다. 벨은 바벨론 신의 이름으로 ‘벨의 금고를 지키는 자라’고 바꿔버렸습니다. ‘하나냐’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의 이름인데 ‘사드락’ 즉, ‘태양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자라’ 이렇게 바꿉니다. ‘미사엘’은 ‘하나님 같이 강한자가 누구냐?’는 뜻의 이름인데 ‘메삭’ 즉, ‘미의 여신을 예배하는 자라’ 이렇게 바꿉니다. ‘아사랴’는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의 이름인데 ‘아벳느고’ 즉, ‘느고라고 하는 바벨론 신의 종(Servant of Neco)이라’ 이렇게 이름을 바꿨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이 젊은이들의 이름을 바꾼 이유는 “너희가 그동안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은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차피 나라는 망했습니다. 이젠 고국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절망의 상황에서 어쩌면 크나큰 행운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세상 적으로 보면 출세의 길에 들어선 철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8절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여기에 보면 “뜻을 정하여”라고 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동화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켜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다니엘에게 왕이 하사한 음식을 거절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왕명을 거역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할런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어떤 사람은 말했을 것입니다. 오늘 신약시대는 사실 돼지고기를 먹든, 산낙지를 먹든, 뱀장어 구이를 먹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는 달랐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에 따라서 당신이 누구이며 어떤 신을 섬기는 지가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가 왕이 내린 진미나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겠다는 것은 신앙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흘동안 채식을 먹고 대신 물을 마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자기 스스로 불편한 쪽을 택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호화로운 삶을 살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누구 못지않게 즐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만 바벨론의 우상에게 드린 바 된 것이기에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기를 소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내놓고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다면 손해 볼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을 부인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때로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불릴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을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영원한 지옥을 피하기 위해 잠간 세상 살면서 싸울 각오를 해야 합니다. 지금 겪는 고난을 통해서 영원한 즐거움을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분명한 대안제시를 했습니다.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과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환관장은 이 제의를 기쁘게 수납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시험해 볼 기회를 갖게 되어서 오히려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용기를 가져야만 합니다. 삶과 죽음 앞에서도 우리의 신앙을 확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도대체 다니엘이 어떤 청년이었기에 이런 기백과 용기를 가지고 당대 가장 막강한 바벨론 정권 앞에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그들의 유혹과 세상의 타협을 거절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치열한 음모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 정치판에서 독야청청 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뜻을 정하고, 유혹을 이기고, 바르게 살려고 했던 그 배짱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1. 그의 시선은 항상 현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을 향했다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 앞에서 쥐뿔도 없는 다니엘입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회를 얻으려고 했겠습니까? 다니엘 하나쯤 바꾸어도 아무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음식을 먹음으로 오는 신앙의 실패가 어떤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지금의 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세상과 타협을 하는 일을 그는 거절을 했던 것입니다. 8절에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 장에게 구하니” 여기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구별된 삶을 포기하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정체성을 흩뜨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에 부흥 강사님이 오셔서 한바탕 우리의 삶에 웃음보따리를 풀고 가셨는데 우리 딸이 ‘아빠!! 아빠도 좀 웃겨봐!! 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도 속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놈이 아빠 심정은 손톱만큼도 헤아려 주지 않고 이야기하는데 정말 서운하더라구요.’
여러분은 명풍과 짝퉁의 차이를 아십니까? 요즘 하도 기술이 좋아 명품과 짝퉁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명풍과 짝퉁을 구별하는 법을 말했습니다. 우선 비가 올 때 핸드백을 머리 위에 올려 비를 가리고 있으면 그것은 100% 짝퉁이랍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슴에 안으면 그것은 틀림없는 명품이랍니다. 커피숍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무릎 위에 핸드백을 올려 놓으면 그것은 명품이랍니다. 그러나 핸드백을 의자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면 그것은 짝퉁이랍니다. 남편이 사준 것은 대개 짝퉁이랍니다. 그러나 애인이 사준 것은 대개 명품이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낮 예배시간에 들고 온 것은 대개 명품이랍니다. 그러나 새벽기도 때 들고 온 것은 대개 짝퉁이랍니다. 거룩한 주일, 최고의 명품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 우리 옆 사람에게 이렇게 축복합시다. “당신은 명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명품이 되십시오”. 또 다니엘이 뜻을 정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이 도와 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단1:12-13)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사실 다니엘의 이런 요청은 자신들의 목숨을 건 모험입니다. 만약 10일 동안 채식 만하였는데 한 10kg씩 살이 빠지고, 눈은 쾡 하게 들어가고, 얼굴은 창백하고, 빈혈이 생겨 걸을 때 비틀거렸다면, 그들은 벌을 받거나 혼이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들의 신앙에 대하여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네 청년은 자신들이 채식만 해도 육식을 하는 청년들과 비교할 때 건강에 이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바벨론 청년들 보다 더 건강하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본문 14-15절을 보세요.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열흘 후에 얼굴이 더 윤택했습니다. 얼굴이 더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건강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다니엘을 비롯한 네 청년의 믿음대로 된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주일을 지켜서 일을 못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채워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헌금을 드리는 것만큼 하나님이 채워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일 만큼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시간만큼 나를 도와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 가정이 헌신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돌아보신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섬기는 일들이 아까 와서 벌벌 떨거나, 하나님께 드리는 것들을 빼앗기는 것 같은 마음으로 한다면 어떻게 축복을 받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것들을 공짜로 빼앗아가는 분이 아닙니다. 눅6:38절에 “후히 주시되 흔들이 넘치게 하여 안겨 주시는 분” 우리가 하나님께 헤아리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헤아리십니다.
이런 믿음으로 산 네 청년이 받은 축복을 보십시오. 17-20절입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왕이 말한 대로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가니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단1:17-20)
학문과 서적을 깨듣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신령한 은혜를 받아 꿈과 환상을 깨닫게 하였고, 선지자와 예언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느브갓네살 앞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청와대 직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빌론의 모든 학자들 보다 10배 너 나은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위에 있고, 머리되고, 앞선 리더들이 된 것입니다. 뜻을 정한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상급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다니엘은 그야말로 난세(亂世) 속에서도 풍운(風雲)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부탁을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역시 힘들고 어렵습니다. 직장에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부정적인 보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이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가능성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신호를 볼 수 있게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할 수 있다는 긍정의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광야의 메마른 땅에서도 큰 강물이 흐르는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궁휼을 입은 사람은 캄캄한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장차 회복시켜 주실 축복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고통과 혼돈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생명줄인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다니엘처럼 기도로써 무장하고 생활 현장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것이 주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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