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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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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가정③ - 부부의 비밀 엡5:22-33절 2015년 5월 31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6-02 | 조회: 1344
우리 교회는 올해 몽골 선교를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98년도부터 단기 선교로 움직여 왔는데 어려움과 힘듬도 있었지만, 참 보람이 컸습니다. 선교를 마치면, 청년들 가운데 헌신자가 꼭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웃음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정말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인도네시아에서 싱가폴로 오는데 우리가 탄 배가 바다 한가운데 엔진이 꺼진 것입니다. 풍랑이 일l고 비가 오는데 배가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잠에 골아떨어졌죠!! 몇몇 청년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초조해 하는 가운데 한 시간이 흘렀을까요. 큰 예인선 한척이 와서 우리 배를 걸고 싱가폴 항구로 이끌어 갔습니다. 참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항해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무리 큰 배라도 파도에 요동을 치는데 그때 가장 위험한 것은 엔진이 꺼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엔진이 꺼지면 배는 파도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엔진이 살아있으면 험한 파도가 내려쳐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 삶에도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하다면 아무리 큰 풍랑이 밀려와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인생에 가장 큰 엔진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가정입니다. 우리 인생에 얼마나 험한 항로가 많지만, 그때마다 큰 파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가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서도 엔진 역할을 하는 핵심은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자녀 교육문제도 풀립니다. 부부관계가 건강하면 사회 전체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기본적인 단위는 부부의 관계이고 성경에서도 부부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다면 부부관계의 성경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부부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됨이며 결혼의 서약은 하나됨의 서약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본문 31절에서 결혼을 정의하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 누구와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부부만의 하나 됨-이것이야말로 부부의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하나 됨을 상징하는 그림 같은 비밀인 것입니다. 31-32절을 읽어보십시오. 바울사도는 이것을 큰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비밀의 다른 그림을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서 찾습니다. 우리 주님과 성도가 하나 됨과 같이 부부도 하나가 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부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부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을 합니다. 혼자 있는 것보다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며 살 때 행복해질 기대를 가지고 결혼을 합니다. 행복하려고 결혼했는데 행복은 고사하고 불행하지만 안해도 좋겠다하는 심정이 있습니다. 결혼생활이 기대하는 것과 같은 행복이 늘 함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부부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갈라서기도 하고, 어떤 부부는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난 후에 갈라서는 ‘황혼이혼’을 불사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하여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 그 삶에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사랑하기에 결혼하여 함께 살던 부부가 왜 같이 사는 것보다 헤어져 홀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까지 갈라서려 하는 것입니까?

서로 결혼 생활을 하면 모든 것이 다 될 줄을 알았는데 가정이 무너지는 이유 중 우리가 놓치기 쉬웠던 것이 바로 서로 다름에 대한 이해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다릅니다. 남자가 화성에서 왔다면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고 할 만큼 서로 다릅니다. 그러한 차이가 있는데 서로가 상대를 자신과 똑같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애쓰면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격려와 이해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가정에서는 매우 필요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릅니다. 그런데 이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잘 모릅니다. 오래산 사람들도 내 아내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역시 내 남편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잘 모르고 결혼하면 수없는 충돌이 일어납니다. 가끔 우리는 안다고 생각할 때가 있죠? 우리 여자들이 가끔 남자들은 ‘다 저래!!’ 사실 남편하고 어른들 밖에 경험을 못했는데 .. 우리는 서로를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속 서로를 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속단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서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이 드는 것입니다. 한달에 한번 정도나 만나거나 일주일에 한번 만날 때, 잠시 한 시간 정도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찮습니다. 그런데 함께 산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까칠한 사람 가끔 만나면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살면 매력이고 뭐고 없습니다. 만정이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격이 아주 다른 사람과 살다보면 이거 보통일이 아닙니다. 한쪽은 아주 성격이 급하고 한쪽은 성격이 아주 느긋한 사람이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혈질과 담즙질 함께 살기 어렵습니다. 한쪽은 펄펄 뛰고 한쪽은 아무일 없었다는 것처럼 있다면 한쪽은 눈이 뒵혀 지거나 거품이 일거나 떨거나 ... 어떻게 살 수가 있습니까?

한쪽은 끊임없이 버리고 한쪽은 끊임없이 주워 모은다면 어렵죠? 전쟁을 치루는 것입니다. 한쪽은 숨기고 한쪽은 찾고 한쪽은 구두쇠 한번 들어가면 결코 나오지 않는 그러나 한쪽은 손에 쥐기만 하면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부부가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한쪽은 초저녁에 잠이 많습니다. 그런데 밥만 먹으면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쪽은 밤새 안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온집안을 다 깨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새벽에도 임에도 누가 들고 가도 깨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쟁이죠. 다른다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성격이 다른 것 참 힘들죠? 여러분, 애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게 갈등의 포인트잖습니까? 서로 다른 갈등을 가지고 한평생 가는 가정이 많습니다. 그것이 결국 결별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한 평생 서로를 알아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가정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이 비밀이 더욱 깊어지기 위해 서로 복종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엡5:22 말씀은 아마도 저를 포함해서 많은 그리스도인 남자들이 가장 감격해하고 가장 선호하는 성경의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주 망각하는 것은 엡5:22 이전에는 엡5:21의 말씀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누가 누구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까? ‘피차에’입니다. 무슨 동기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자 그의 말씀과 그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피차에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복종을 받으셔야 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22절에서 한번 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아내에게 부탁한 이유는 그렇게 해서 아내가 남편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엡5:23절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이유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머리라는 말은 남편의 우월성을 가르치는 표현이 아닙니다.

엡5:22-23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으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내의 책임 가운데 하나가 남편을 머리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머리는 리더십의 상징입니다.

전통적 가정에서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남편이 혼자 벌어 월급봉투를 내밀 때 온 가정은 그의 권위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시대의 뚜렷한 현상 중의 하나는 권위의 부정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여성들의 반란이 시작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남성의 존재를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부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사할 때도 남자들은 이전에는 냉장고를 붙들고 있어야 했는데 이제는 강아지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개그도 오래되었습니다. 사회의 단면을 풍자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간에는 아내들끼리 모이면 가장 좋은 남편감으로 원양어선의 선장이 최고라고 합니다. 이유는 한번 나가면 반년 이상 안 돌아오고,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오고, 가끔씩 집에 오니까 반가워서 좋다는 것입니다. 늘 같이 있는 남편은 불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셔터맨 남편들이 있습니다. 아내가 하는 일에 남편은 아침에 가게 셔터를 열어주고 저녁에 가서 문을 닫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움츠러든 남성들입니다. 남자는 왜소해지고 실용적인 필요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여성들은 홀로 자립할 수 있는 문화 속에서 남편에게 억압받으면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여성 편에서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는 가정의 리더십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가정에 리더십의 상징인 아버지를 주신 이유는 땅의 아버지를 통해서 자녀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를 아버지 되게 하는 것이 아내의 책임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면 자녀들이 또한 리더십의 상징을 잃어버립니다. 아동 범죄 연구소에 나온 통계를 보니까 교도소에 수감된 문제아들의 45%는 아버지와 함께 자라나지 못했고, 다른 40%는 아버지를 미워하며 자라났고 다시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준 제1원인은 어머니인 것으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한 때,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유행했습니다. 20대의 간 큰 남자는 아내에게 밥 차리라는 것이고, 30대의 간 큰 남자는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는 것이고, 40대의 간 큰 남자는 외출하는 부인을 쳐다보는 것이고, 50대는 몇 시에 들어오느냐고 묻는 남자이고, 따라가도 되냐고 묻는 60대는 간이 배 밖에 나온 남자라고 합니다. 가정의 위기는 권위의 상실에서 왔습니다. 권위가 없는 곳은 가정의 보호막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권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부부관계를 풀려면 그리스도가 교회를 어떻게 다스리는가를 보면 아내의 머리된 남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내들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어떻게 복종했는가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다고 해서 교회 위에 군림하거나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폭군이나 군주처럼 제압하고 재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당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섬기셨고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하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 복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역을 할 때에도 기꺼이 그 분 앞에 굴복하고 순종하여 그분의 종의 되어야 합니다. 억울해하거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복종은 굴종이 아닙니다. 복종이란 단어의 어근은 ‘듣는다’는 말입니다. 복종은 상대를 존중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2.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25절 이하에서 33절까지)부부가 서로 하나 되어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남편의 아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아내를 향한 교훈과 남편을 향한 교훈이 동시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시면 바울사도는 아내에게 보다 훨씬 더 많은 지면을 남편에게 할애하고 있습니다. 부부관계의 온전한 연합을 깨트리는 쪽이 아내라기보다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남편들의 아내 사랑의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사랑의 방법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28절에 보면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할지니”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몸을 사랑합니까? 몸을 사랑하려면 몸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가 몸에 필요에 민감하지 못하면 무의식 속에 몸을 학대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들은 스스로 자기가 아내를 학대하고 있다고 생각치 않지만 아내들은 남편에 의해 학대당하고 느끼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들이 아내의 정서적인 필요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자기주장으로 아내를 이끌어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시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가치감을 존중함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3:7에서 “남편 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자로 알아 더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남편이나 아내가 다 그릇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다 깨지기 쉬운 그릇 상처받기 쉬운 그릇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아내들은 더 그렇다(더 깨지기 쉬운 그릇)는 말입니다. 정서적인 감수성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수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남편들의 무례함으로 아내들이 상처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 사랑의 시작은 이런 아내의 마음을 보호하려는 배려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귀히 여기라’는 말을 보석처럼 여기라는 말로 번역한 학자가 있습니다.

오늘 고통받는 아내들의 목소리는 하나입니다. ”제발 나(아내)라는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당신의 말로 행동으로 보여만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가정의 붕괴의 위기는 아내의 존재의 가치감을 너무 쉽게 유린하고 박탈해온 남편들에게 90%의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기대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가 영광스럽게 세워지는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본문은 남편의 존재이유가 자기 아내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아내가 건강하면 가정이 건강해 집니다. 가정이 건강해지면 세상이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기를 결심하고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종과 사랑은 어떤 면에서 가정의 축을 이루는 양 기둥과 같습니다. 어느 쪽이든 한쪽이 문제가 생기면 그 가정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어디에 실천하는가 바로 가정입니다. 남편과 아내에게 이 복음이 그대로 실천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은 일평생 상대의 약점과 잘못을 지적하면서 팽팽한 긴장을 가지고 삽니다. 조금만 문제가 보여도 ‘당신 그것 고쳐’ 그러면 반대쪽에서 ‘당신이나 그것 고쳐!’ 일평생 이 고치라는 비난, 이 허물과 약점을 드러내는 전쟁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가면 이것을 받아들이는 용량이 내 안에 생깁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지는 게 이기는 것입니다. 이기는게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이 십자가의 원리가 가정 안에 적용되지 않으면 가정은 위험한 줄 달리기가 계속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의 목소리만 강하게 나면 가정은 깨어지게 됩니다. 합창단에서 하모니가 잘 이울어지려면 자기 목소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악을 전공한 분이 합창단에 들어가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 소리를 너무 드러내려고 하면 하모니가 깨지잖습니까? 자기 소리를 가급적이면 작게 내려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역할이 다르고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서로 책임 전가를 하지 않고 상대방, 그 배우자의 잘못과 실수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그리고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타협점을 찾아가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부부로 산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서 만남 그 경륜을 깨닫고 서로 다르지만, 이 의무와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왜 안맞는 사람과 살게하셨는가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지 말고 지금은 마음에 안들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꼭 필요해서 하나님이 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안 만났다면 내가 좀더 행복했을 텐데,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괜히 드라마 같은 것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람 만났썼썼..으면, 그런 일은 안 일어납니다. 왜 그 사람이 나를 만나?습니까? 나만 착각하는 거잖아요? 다 착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남편 나에게 딱입니다. (웃고만 말지요> 지금 아내 딱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같이 들립니다. )




바울 사도는 이미 엡2:8에서 우리가 그 은혜로 구원의 선물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사랑 바로 그 사랑의 은혜를 입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면, 때로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나를 또다시 실망시키고 또 다시 좌절시켜도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은혜의 도움을 빌며 버티고 참고 기다려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 입은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까?

제가 전도사 시절에 산동네에 교회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아이 하나를 엎고 오뎅 장사를 하던 예수를 믿지 않던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가 결국 예수를 믿고 믿음 생활을 하는데 그가 아픔 이야기 “--보증을 잘못서서 가정 경제에 큰 어려움을 남긴 남편, 그런 자신을 아내가 구박하고 냉대한다고 집밖으로 돌다가 바람난 남편, 그런 남편이 어느 날 지치고 병들어 집으로 돌아올 때 다른 씨 하나를 데리고 왔을 때, 그를 문전 박대 않고 받아주는 것,결국 집에 들어 온지 1년만에 조강지처 품에서 숨을 거두는 그 남편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울던” 그 집사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구원을 받고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왜 아픔이 없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은혜가 어려운 인생을 사는 모든 부부의 궁극적인 희망인 것입니다. 부부 이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 생수가 터지듯 부부가 성경에 붙잡히고, 그래서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또 이 민족이 산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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