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힘써 해야 할 일 행13:1-3. 2015년 6월 7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6-07 |
조회: 1374
어느 한 청년이 목사님에게 찾아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청년이 목사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 목사님이 “핵폭탄?” “아닙니다.“에이즈“ ”아닙니다.“ 목사님이 대답하는 족족 틀렸습니다. 목사님은 안달이 나서 “뭔데? 네가 대답해라. 말해봐.”라고 다그쳤습니다. 그 청년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소신 있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청년의 말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얼떨한 사람이 소신 있게 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괴롭힘을 당합니다. 푼수 같은 사람이 소신 있게 살면 어떻게 됩니까? 민폐를 끼치게 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단순히 열심만을 앞세운 채, 나아가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문가도 아니면서 그일에 전문가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습니다.
바울로 바뀌기 전의 사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정말 소신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사울은 열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일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을 다 잡고도 성이 차지 않아, 다메섹이라는 곳까지 원정을 가서 신자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사울의 이러한 소신 있는 행동은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를 가졌습니다. 그의 행동은 십자가와 원수 된 행동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열심을 낸다 할지라도 방향이 잘못되면 헛수고할 뿐입니다. 성도는 소신껏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소신은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야 합니다. 성도란 소신껏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소신대로 움직이는 교회는 문제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날마다 소신과 소신이 부딪히기 때문에, 바람 잘 날 없습니다. 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입각하여 움직이는 교회는 앞으로 쭉쭉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입각한,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우리 모두가 꿈꾸는 한 교회를 만나고자 합니다. 그 교회는 수리아에 위치한 안디옥 교회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안디옥 교회보다 유명한 교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는 각종 은사를 엄청나게 많이 받았던 교회가 아닙니까? 또 계시록에서 언급되어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나, 서머나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열심히 충성하였고, 핍박과 환난 가운데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킨 교회들이 아닙니까? 또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최초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교인 수를 자랑하고 있었던 교회가 아닙니까? 또 오늘날에도 유명한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교회도 있고, 문화사역으로 유명한 교회도 있고, 경배찬양으로 유명한 교회도 있고, 청년 사역으로 유명한 교회도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 교회가 꿈꾸어야 할 교회는 다름 아닌 안디옥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소개되는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받을 때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까? 행11:19절에 보면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라는 말씀을 보면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이 환란이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형제가 끌려나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사도들이 나가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쓰러지며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옵니다. 자! 이제는 다시 잡히면 죽을 처지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지게 됩니다. 집을 두고 목적지도 없이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피난이 아니라 도망입니다. 도망자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온 민족이 함께 당하는 수난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당하는 수난입니다. 그것도 다른 이유가 아닌, 오직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는 그 한 가지의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당하며 죽어야 했고, 쫓겨다니는 도망자로 방랑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본의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저 예루살렘 초대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를 믿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 부득불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원치 않는 곳, 원치 않는 남의 나라 땅에서 방황하며 쫓기는 흩어진 자가 된 것입니다.
이 흩어진 자들이 피하여 들어온 지역이 바로 안디옥입니다. 당시에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서 세계에서 세 번째 큰 도시입니다. 지중해 해변에 위치해 있는 무척 아름다운 도시였고, 천연요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경제가치가 있는 도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내에는 항상 군인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군사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우상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안디옥은 문명은 발달했지만, 타락하고 방종과 사치가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이처럼 화려하고 엄청난 세속의 도시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 핍박 성도들의 모습은 너무 대조적이 아닙니까? 자의가 아닌 핍박으로 너무도 많은 것을 잃은 그들이 이제 가까스로 모이긴 했지만, 자기 앞가림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어떻게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물꼬를 여는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떻게 세상 앞에 타협하지도 굴복하지도 않고 오히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세워질 수가 있었습니까?
1. 무엇보다 하나 됨의 힘을 썼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교회의 핵심 구성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 구성원들의 연령을 보십시오. 나이가 많은 바나바에서부터 젊은 사람 사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했습니다. 또 자라온 환경이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입니다. 바나바는 귀족출신으로 땅을 기증할 정도로 부자였던 사람입니다. 마나엔이라는 사람은 당시 예루살렘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헤롯왕의 젖을 같이 먹고 자란 젖 동생입니다. 대단한 귀족 출신입니다.
그리고 니게르라는 시므온이 나오는데 이 니게르라는 말에서 Negro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흑인이라는 것입니다. 또 구레네 사람 루기오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도 흑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레네가 북아프리카지역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라는 곳에서 출생한 유대인입니다. 그는 당시에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 우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수재 중의 수재였습니다. 이처럼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종의 다양성과 신분의 다양성, 그리고 나이차이도 많은 사람들이었고 이들 모두 너무도 큰 상처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지금 이 안디옥 교회 성도들 역시 처음에 자신들에게 당한 이 고난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영문도 모른 채 당하는 아픔을 어떻게 쉽게 이해를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가 될 수 없는 현실을 이렇게 멋지게 하나로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은, 고난의 한 복판에서 그들 속에 역사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보았고 이엇을 체험한 자들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한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행복입니다. 정말 행복해야 되는데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밖에 있을 때도 문제가 있었는데 이제 교회 안에 오면 정말 다른 것 몰라도 마음 고생은 안할 줄 알았는데 어떠세요. 또 문제 속에 있지 않습니까? 또 다른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데 사람과의 갈등의 연속입니다. 우리교회가 46년이 되었습니다. 어른에서 어린아이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것은 사람 수만큼 다양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잘 풀어서 치유되고 회복되면 용기와 지혜를 얻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를 풀지 못하게 되면 낙담하게 되고,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정말 부부 사이, 자녀와 부모 사이, 친구 사이, 교인 사이에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주님처럼 그런 교회가 되고 있습니까? 오히려 교회로 인해 상처 받고, 그 아픔 간직하며 고통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습니까? 적어도 우리 동성교회만은 치유와 회복이 있는 교회,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시고 치유하시는 것처럼 오늘 나와 만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마음에 동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치유가 풍성한 교회는 바로 여러분 자신, 한사람 한사람입니다. 교회 처음 나온 사람 - 인생 살다가 맘대로 되지 않아 옆에 사람이 교회 가자고 해서 교회 문을 들어오긴 했는데, 서먹하고 어색하고, 찬송가 몇 장을 펴야 하는지, 성경본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초신자-의 심정이 되어 예배 드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교회는 그런 사람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표정이 어두우면 무슨 일이 있는지, 기도제목은 무엇인지 등 안부를 물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안부를 묻다가 그들과 대화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요셉이 감옥을 나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을 통해 치유함을 받은 사람은 경험한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읽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가 풀어질 곳이 없으며,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외로울 때는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교회 안에 군중과 같이 있지만 하소연 할 곳 없어 홀로 외롭게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교회를 통해서 이 문제가 풀어져야 합니다. 치유함이 있어야 하고, 교제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서로 상처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끌어안고 힘써 하나 됨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2. 어찌 그뿐입니까? 예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여기 2절에 보면 이들의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상반 절에 ‘주를 섬겨’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 섬긴다는 말은 본래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표준 새 번역은 이 부분을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 할 때에”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예배하면 예배했지 왜 금식까지 했을까요? 오늘 여러분 가운데 정말 갈급한 심정을 가지고 온맘 다해 온 정성을 모두어 이 예배를 섬기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 신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가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하여 내 삶 전체를 몽땅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월트 디즈니가 왜 성공한 줄 아십니까? 백설공주를 그린 만화가 중의 한 사람 월트 킴볼은 일곱 난장이가 백설 공주를 위해 스프를 끓여주려다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약 4분 30초짜리 우스운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월트 디즈니는 장면을 완성시키기 위해 무려 240일을 작업했고, 아무리 재미있어도 본 목적과 흐름에 맞지 않을 때는 과감하게 장면을 삭제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월트 디즈니 만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이유입니다. 자기 작품에 인생을 걸었기에 그런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무엇에 인생을 걸어야합니까?
교회에는 예배 구경꾼들이 있습니다. 저는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예배 구경합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고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십 년이 되고 이십 년이 되도 구경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수의 공연을 보듯이 보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가 얼마나 설교를 잘하는지 봅니다. 그리고 비평합니다. 성가대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봅니다. 그리고 오늘은 잘했다 못했다 판단합니다. 좋은 일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그냥 와서 구경만 하십니까? 오늘 목사 설교가 어떤가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 뜻이 있습니다. 그 뜻에 맞추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산 제물이 되어 내 생각은 죽고, 살아계신 하나님 뜻만 드러나기를 간구하는 간절한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간절한 몸부림 없으면 자아가 자꾸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제물은 죽어야 제물입니다.
제물이 살아서 예배 시간에도 그 생각이 돌아다니면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인간 본성과 환경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순종할 때, 성령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저의 설교가 아닌 하나님 음성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 음성을, 헌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래서 이 곳에 회개가 있고 주님 닮기 원하는 몸부림, 갈급함을 채워주시는 성령의 임재 하심과 그로 인한 감격과 기쁨의 찬양이 넘칠 때 살아있는 예배가 됩니다.
여러분, 예배는 피조물인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의무인 동시에, 생명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예배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한없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무기력하게 쓰러져 가던 사람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아무 소망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예배를 통해서 목숨걸고 흔들 수 있는 깃발을 발견합니다. 예배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할 줄로 믿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이 종국에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줄로 믿습니다. 여기 그들이 금식까지 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것은 그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었음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 가운데 정말 갈급한 심정을 가지고 온맘 다해 온 정성을 모두어 이 예배를 섬기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 신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예배의 본이 되야 합니다. 주일 예배는 물론 새벽기도. 심야에배 수요 예배에 나아와 은혜 받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히 장로, 권사 안수집사의 일거수 일투족은 연약한 성도들의 믿음의 근간을 흔들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는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가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하여 내 삶 전체를 몽땅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3. 그들은 예배자로 설 뿐만 아니라 힘써 말씀 앞에 순종을 합니다.
그들은 주의 말씀 앞에 절대 순종과 헌신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2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여기에서 ‘따로 세우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안디옥 교회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의 주축이 되고 있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리더를 선교사로 파송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회를 잘하고 있는 담임 목사와 그리고 함께 동역하여 안디옥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간 두 지도자를 선교사로 보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제 좀 교회가 부흥되고 안정되어 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갑자기 교회의 핵심인물인 바나바와 바울을 달라는 이 음성 앞에 하나님께서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겨우 교회가 안정되어 가는 순간인데, 선교를 하라니 너무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습니다. 자, 주께서 안디옥 교인들에게 ‘시키실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미숀, 소명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이제 그들의 순종입니다. 순종에는 언제나 값 지불이 필요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인들도 세계 선교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 그들이 사랑하는 지도자 바나바와 바울을 내어 드림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은 그들의 응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이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헌신을 요청한 성령님의 요구에 순종했습니다. 비록 자기들의 교회도 할 일이 많아 일꾼이 많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복음을 위한 순종은 때로는 우리에게 감당하기 힘든 희생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역사에 희생의 대가 없이 이루어진 일이란 없습니다.
여러분, 46년의 역사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46년의 시간들 속에서 우리 교회를 이만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눈을 좀더 크게 뜨고 넓게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새롭게 시작한 46년의 첫발을 내딛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지나간 46년보다 앞으로의 46년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더 많은 사역들을 해 가실 수 있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 가십시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꼭 필요한 교회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더욱 부흥시켜 주실 것이고, 우리와 우리 가정에도 필요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건강과 물질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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