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들" 민13:30-33. 2015년 6월14일 창립 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6-14 |
조회: 1637
요즘 ‘결정 장애’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어떠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을 결정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심리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동내 가게에서 물건을 고를 때, 정말 망설여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면 가방 고르기부터 진로선택까지 “결정 장애입니다, 도와주세요!”를 외치는 게시물들이 넘쳐나고, 결정 장애에 대한 보고서까지 발표되는 상황입니다. 중대한 문제도 아닌데 쉽게 선택하지 못하고 남에게 선택을 미루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정말 결단을 할 때가 있습니다. 뭐, 결혼을 한다든지, 또 직장을 구하고 옮기는 문제는 정말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가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 게 되고, 또 그로인해서 우리의 미래는 운명적으로 달라지 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서는 430년 동안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후 2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가야 할 하나님의 약속 장소,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열두지파에서 총명하고 지도력 있는 12사람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이들이 가진 보고서로 인해 엄청난 결과가 일어납니다. 결정을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잘못된 결정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엄청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12명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를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보고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게 됩니다. 10대2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은 다수를 따라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저항을 하게 됩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민14:1절 이하에 보면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제 이스라엘은 출애굽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국 이 큰 소요와 저항 사건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됩니까? 14:33을 보십시오. “너희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 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고 새로운 세대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리라는 징계를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제 우리 동성교회는 올해로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생일은 기쁨의 날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모두가 우울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요즘 심지어 교인들조차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공포와 불안으로 모이는 교회에 오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메르스 때문에 온 국민에게 광야 백성처럼 두려움과 불안을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에 없던 가뭄에 타들어 가는 논과 밭을 보고, 이 민족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아픔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 우리의 생명의 젓줄인 소양강 주변의 강물이 바닥을 드러내는 모습 앞에 우리는 이젠 나라가 어떻게 되나하는 공포까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켠에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하는 동성애자들의 축제 등…. 이런 속에 우리가 46년의 생일을 맞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교회의 책임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광야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우리 교회가 가져야 할 자세가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영향을 받고 흔들려야 합니까? 젊은 사람들이 지난 주 교회를 안 나왔습니다. 이유는 사람 모이는 곳에 가지 않는 게 지혜하고 합니다. 일면 이해는 가지만, 교회는 사람 모이는 곳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생명을 공급받고 영적 백신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성을 길러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생명의 공급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뜻이 있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지역 복음화와 민족 복음화, 그리고 열방에 수많은 영혼을 주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이 혼탁하고 영적으로도 어두워져 가는 이 시대 앞에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새로운 시대를 교회가 감당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1. 우리 한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 13:2절에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보십시오.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백성들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선발대를 보내었습니다. 소위 순찰대로 보낸 것입니다. 40일 동안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땅을 탐지하고 그 땅의 형편과 지세를 알뿐 아니라 농업과 군사력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하도록 특별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3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의 명을 좇아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내었으니 그들은 다 이스라엘 자손의 두령 된 사람이라” 다 예외 없이 이스라엘 백성의 두령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트들입니다. 분석력, 정보력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지도자였습니다. 각 가정을 대표하고, 각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대표가 중요합니까? 구성원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기 지도자들이 누구입니까? 지난 날 그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는 하나님의 역사를 본 사람들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광야 길에 구름기둥과 불 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 훈련을 200만이 넘는 백성과 같이 여기 바란 광야에 오기까지 2년을 지내면서 그 엄청난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들의 삶 속에서 경험한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은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만날 때, 순식간에 절망을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기르는 새 중에 '새크레터리 버드'라는 번역하면 비서 새라고 하는 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는 평소에 잘 날아다니지만 정말 이 새가 날아야 될 때는 기가 죽어서 날지 못하고 땅 바닥에 앉아서 기어다니다가 잡혀 먹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에 굳게 선 사람들은 쉽게 주저 않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아는 사실입니다. 본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여러 문제로 인해 흔들려도 결국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별 도리가 없잖아요. 세상 사람은 급하면 지푸라기를 잡는다하지만, 우리는 지푸라기를 잡지 않아요.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붙잡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모든 것임을 알고 고난의 한 복판에서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어느 책의 제목처럼 “땀은 흘러도 기쁨은 샘물처럼” 그 심령 속에 견딜 수 없는 주님의 생수가 흘러 넘쳤기에 그 고난의 자리에서도 담대히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계란에 대해서 아십니까? 계란 중에는 무정란과 유정란이 있는데 무정란은 아무리 오랫동안 어미 닭이 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지만 유정란은 어미 닭이 21일간 품으면, 반드시 병아리가 생명 되어 나옵니다. 성도들도, 무정란 같은 성도가 있고 유정란 같은 성도가 있게 마련인데 무정란 같은 성도들은 예수로 인하여 고난이 덮치고, 손해가 나고, 풍랑이 일어나면, 그냥 도망가거나, 무너지거나, 썩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유정란 같은 성도들은 고난이 올수록, 풍랑이 셀수록, 더욱 더 주님 품에 파고들어 마침내 생명을 출산하게 됩니다.
왜 이 열정탐군이 이런 부정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그 땅은 쉽게 점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 두령들을 가장 두렵게 한 것은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이었습니다. ‘네피림’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이 창세기 6장입니다. 노아 시대 홍수가 나기 전 세상에 죄악이 만연되었을 때 세상을 지배하던 사람들이 네피림들이었습니다. ‘네피림’이라는 말은 ‘거인, 대장부’라는 뜻입니다. 완력으로 세상을 통치하던 사람들입니다. 법보다는 주먹이 앞서고, 이성보다는 감정에 의한 폭력을 앞세운 사람들입니다. 주먹 하나로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이 살던 사람들이 바로 네피림입니다. 그런 네피림들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은 그들을 보는 순간 기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 들어가 그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하더라도 그런 네피림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리더들 12명 가운데 10명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절망과 낙담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리더는 희망을 파는 상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주님께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이 땅에 두셨을까요? 빛으로, 소금으로 두신 것입니다. 캠블랜 차드는 말합니다. “성공적인 리더십의 열쇠는 권위가 아니라 영향력”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영향력,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리더의 역할입니다. 잘못된 지도자는 백성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짜내게 합니다. 이들은 똑똑한 사람이었고, 학력과 경력에서도 남다르게 탁월했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커다란 아픔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믿음의 사람들을 키워야 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명장 롬멜 장군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령관이나 군대가 병사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복지는 ‘훈련‘이다’ 무슨 말입니까? 전쟁터에 나가 죽지 않도록 , 다치지 않도록, 패하지 않도록, 평소에 그들을 단련시키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애니콜, 파브, 지펠, 하우젠, 등의 신화를 일군 삼성전자의 사장으로 있었던 전옥표씨는 ‘이기는 습관’ 이라는 책을 써서 베스터 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잘 대해주고, 그냥 편하게 해 준 후배들 보다 혹독하게 훈련하고 냉정하게 키운 후배들이 지금 더 많이 나를 따르고 찾는다. 싹수가 보이지 않는데다 애정도 가지 않는다면 잔소리하지 마라. 그러나 당신이 정말 아끼는 후배라면 지독하게 훈련시켜라. 그것이 선배로서 해 줄 도리다. 당신의 선배들에게 받은 것을 후배들에게 물려주라.” 주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강하게 훈련시켜 놀라운 인생을 선물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강력한 훈련의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10명의 정탐꾼의 보고 앞에 바란 광야는 밤새도록 원망과 통곡의 아비규환의 현장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보고로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에게 달려들어 죽이려 합니다. 광란의 현장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십시오.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메르스 질병으로 얼마나 국민들이 혼란스러워 합니까?
2.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은 비전의 유무입니다.
리더십의 대가 존 멧스웰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이렇게 간단하게 말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고 비전"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꿈에 자극을 받아 그 꿈을 달성하기 위해 계속 앞으로 나가는 사람입니다. 반면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10사람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을 때 자신의 처자들이 잡혀가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생각하며 절망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능력과 가나안 원주민들과 비교하면서 두려워 떨었던 겁니다.
반면에 믿음의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땠습니까? 가나안 원주민의 모습을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들이 거인인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14:7-9절 보시죠.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 ” 그들이 보기에 가나안 땅은 분명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아무리 거인족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먹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밥’ ‘먹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NASB)을 보니까, prey 즉 사냥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먹이라”는 말은 다른 영어성경(NIV)을 보니까, swallow up 즉 ‘꿀꺽 삼켜버리다’ ‘먹어치우다’ 등의 의미입니다.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상의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주 작아 보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안목이 없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이 세상의 문제가 한없이 커 보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 있으실 겁니다. 어른이 된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 보면 얼마나 작은지 “애걔~”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운동장이 줄어들었나요? 아니죠. 내가 커진 겁니다. 마찬가지 영적인 안목이 생기고 신앙이 커지면 세상이 작아 보입니다. 세상의 문제들이 별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큰 게 아니라 내 신앙이 작은 겁니다. 부디 영적인 안목을 키움으로 세상을 소인 나라로 보고 넉넉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를 배워야합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준비된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아무리 그가 많은 탤런트를 가지고 있어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통해 주님 일하시지 못합니다. 결국 10명의 정탐 그리고 그들을 따라 소요에 동참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또 하나의 근본 문제는 불순종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하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순종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이 어려워질 때 제일 먼저 걱정할 것은 환경 그 자체보다도 지속적인 순종의 여부입니다. 우리 중에는 환경이 어려워 졌다고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인도 따라 해오던 사역을 중단하고,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기쁨으로 섬기던 봉사도 중단하고, 환경이 어려워 졌다고 한때 하나님의 인도라고 믿었던 십일조와 헌금도 중단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과 저를 향한 그분의 기뻐하심이 愎摸 어떻게 재기가 가능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20%가 넘는 숫자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의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잠재된 빛의 기능이 있고, 소금과 같은 맛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왜 세상 앞에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까? 저는 그 원인이 순종과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부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헬라의 알렉산더가 4만의 군대로 이수스에서 당시 40만의 다리우스 군대를 쳐부순 것도, 중국 공산당 의 초기멤버인 정강산의 23인의 동지가 장개석의 국민당을 제압하고 10억 중국을 접수할 수 있었던 비결도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그들이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감사한 것은 비가 옵니다.
이 비는 은혜의 비요, 회복의 비요, 축복의 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아침 비를 내려 부시고 있습니다. 이 비로 가뭄이 해소되고 메르스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이 백성들이 아는 계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답입니다. 감뭄의 답인 비를 하나님이 이 땅에 쏟아 주십니다. 메르스의 답,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 그 하나님 붑잡고 믿음으로 일어나서 복음만이 세상을 살릴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주신 이 말씀이 이렇게 들려집니다. 10명의 두려움에 젖은 정탐꾼이 보는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습니다.’ 광야에 10정탐군의 보고 앞에 아비규환이 돼버린 그 절망의 환경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의 외침,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이 믿음의 외침이 오늘 생일을 맞는 우리 교회의 외침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 교회를 세우신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하며 허리가 꺾이고, 형벌 같은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제 46년의 나이를 먹었습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합니까? 무엇보다 은혜 석에서 강해야 합니다. 인생의 거친 파도가 밀려와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다라면 으레 크고 작은 파도가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크고 작은 파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똑같은 파도가 밀어닥쳐도 어떤 사람은 그 파도를 헤치고 힘차게 항해하고, 어떤 사람은 그 파도에 밀려 난파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미 파도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파도를 헤쳐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제 우리가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내 한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수고와 결단이 미래를 축복의 현장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아름다운 일들을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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