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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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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의 탄식 롬 8:19-25. 2015년 6월21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6-21 | 조회: 1423
한 때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가져왔던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1912년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서 출항하여 뉴욕으로 향하는 처녀 항해 중 4월 14일밤 11시 40분.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충돌하여 2시간 40분만에 침몰하였습니다. 이 사고로 승선하고 있었던 2,208명 중 695명만 구출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머지 1,513명의 희생자를 낸 사상 최대의 해난 사고였습니다. 이 영화에 보면 빙산이 떠내려 오고 있다는 경고를 몇 번 받았는데도 그것을 무시한 한 스미스 선장이 "이렇게 크고 좋은 배가 가라앉다니 무슨 소리냐?" 하며 경고를 무시하고 배의 속도를 올렸던 것이 이처럼 엄청난 참사를 불러 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을 덮친 메르스 사태가 한 달을 맞았습니다. 한 달 간 메르스 바이러스 국민의 일상을 비롯한 경제 상황까지 뒤바꿔놓았습니다. 자고 깨면 모든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이 메르스 사태를 보면서 타이티닉호의 스미스 선장과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비교해보면 뭔가 생각 할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스미스 선장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경고를 흘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주변의 일어나고 있는 이 상황을 보고도 영적으로 각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요즘 사회의 여러 가지 변화를 보면서 느끼겠지만, 지금 우리가 무엇보다 두렵고 심각하게 생각해야할 일은 환경이 오염되고 파괴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몇해 전에 우리 동네에 심장처럼 여겨지던 건대 호수에 40여 년 동안 자리를 지키던 오리 떼들을 조류 독감 문제로 폐사를 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름다운 호수에 한 폭의 그림 같은 오랜 우리들의 친구처럼 서식하던 오리들을 그냥 잡아다 폐사시키는 이 광경은 단순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주변 역시 심각한 오염이 되고 있다는 경고가 아니겠습니까?

요즘 매스컴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용어 가운데 ‘생태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물들과 이들의 삶의 공간으로서 환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생태계를 인간이 망가뜨리고 엉망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생태계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이 저마다 신음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나무도, 들풀도, 저 한강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도, 저 아차산 위를 나는 새들도 모두가 신음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돌들도 바위들도 흐르는 시냇물도 모두가 신음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지금 생태계 파괴로 인해 생물들이 멸종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20년 내에 이 생태계의 생물종 중의 1/5이 사라져 갈 것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오염은 부메랑처럼 우리 인간의 삶의 공간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먹거리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각종 성인병을 위시한 질병이 인간 생활에 깊숙이 파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혜택을 돈으로 따지면 연간 약 33조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수치입니다. 그러나 사실 단 한순간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산소와 물, 각종 먹거리 등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에 따른 환경 파괴로 이같은 자연의 혜택은 급격히 줄어들고 이제는 생존 자체를 위협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함께 대하는 본문 22절을 보면 22절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니니”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자연만물은 창조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께서 만물까지 인간과 똑같은 저주의 자리에다 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피조물은 허무한테 굴복하게 되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허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21절에는 썩어짐이 종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피조물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19절에 보면 이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대하는 게 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여기서 고대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고개를 쑥 빼서 오나 안오나 하고 앞을 열심히 내다보는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땅에 온갖 생물들이 저 깊은 강이나 바다의 모든 생물들이 고개를 쑥 빼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중에 나타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니 정말 안 믿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마당에 무궁화가 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마치고 조용히 앞에 가서 물어보십시오. “너도 탄식하고 있니? 너 지금 내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 몸을 입고 나타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니?”라고 말입니다. 틀림없이 고개를 까딱까딱하면서 그렇다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하찮은 꽃 한송이지만,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만드신 분이 말씀을 하신 것을 ‘아니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두 말 할 것 없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이 자신을 회복시켜 줄 사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피조물은 어느 정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에 의한 파괴가 심각해지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기능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회복할 능력이 없어서 회복시켜줄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답지 못하여 피조물까지 함께 고통을 받으며 탄식하게 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사람과 함께 고통을 받으며 탄식하는 것은 피조물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니 허무한 것입니다. 허무한 데 굴복한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한다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그 본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람 때문에 다른 모든 피조물이 힘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자유롭게 영원히 복된 삶을 살아야 할 사람이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피조물도 덩달아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었기에 피조물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며, 그래서 함께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렇게 메르스라는 괴질이 만연되고 생태계가 무너지는 이때에 그 어떤 때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십니까? 어느 교회의 한 성도가 부흥회를 하는 중에 식사 대접을 하는데 부흥회 강사에게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이 성도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합격증을 받아 놓고 기분 좋은 휴식을 즐기고 있던 2월 무렵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예수님을 몰랐던 친정어머니와 이 집사님이 미래를 잘 예언한다는 유명한 점집을 찾았습니다. 첫딸이 커서 대학 입학까지 하게 된 시점에서 어머니가 딸의 장래에 대해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날 점쟁이로부터 모녀는 놀라운 말을 들었습니다. 관상을 보더니 딸을 향해 장차 영부인이 될 상을 타고 난 처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흥분을 하며 복채를 듬뿍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그 말을 꼭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집안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한 잔 마시고 조금 늦게라도 들어오면 어머니가 전에 없던 잔소리를 했습니다. “대통령 사위를 볼 사람이 이러고 다녀도 되요?”라는 것입니다. 점쟁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딸의 태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친구들과 미팅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팅에 나가기 전날 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팅을 주선한 친구에게 밤늦게 전화를 해서 “내일 못 나간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와서 못 온다고 하면 어떡하느냐”고 친구가 난리를 쳤지만, 절대 못 간다고 거절을 했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30년쯤 후에 혹시 자신이 9시 뉴스에 나가게 될지 모르는데, 그 때 서울 어느 구석에 사는 시시한 남자 하나가 “저 여자가 옛날에 내 파트너였어”라고 말할 광경을 상상하니까 도저히 미팅에 나갈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날뿐 아니라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에 이 딸은 한 번도 미팅을 하지 않고 아주 조신하게 생활했다는 것입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자기 성적표가 온 국민 앞에 공개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열심히 안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라고 인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신에 대한 인식이 그 사람의 삶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합니다. 자신을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을 쓰레기로 살 것입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소중하게 살 것입니다.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뭔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지만 동시에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둘 사이에 끼어 사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왜 고통과 아픔이 옵니까?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하니까 세상이 우리를 놔두지를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있어요. 직장에서 술자리에 함께 앉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나중에는 근무평가에 직원들간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그럴싸한 이유 때문에 진급마저 잘 안돼서 만년 계장 노릇 하는 가장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하는 투기성 재회에 덤벼들기만 했더라면 그런 대로 한 재산 모았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하다 이제는 자녀들이 크면서 더 빠듯해진 살림을 꾸려야 하는 부분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나이는 차서 시집은 가야되겠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고집, 그것 꺽지 못해서 혼기를 놓친 채 아직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자매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믿는 것 따지고 않고 조건보고, 결혼하자니 신앙양심이 허락지 않아 남들로부터 이 눈치 저 눈치 받아가면서 지금까지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의 청년들 모습 속에서 저들의 아픔을 봅니다. 이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탄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나 체념의 탄식이 아니요, 진리를 가슴 안에 끌어안고, 장차 내가 누릴 소망을 기다리며 결코 세상방법으로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메리스 사태 앞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정말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오늘의 이 고통을 끌어 안고 기도해야 합니다. 대하 7:13-14절의 말씀을 보면 솔로몬 임금이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을 건축하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여기 열거된 재앙들은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재앙입니다. 가뭄, 누가 막습니까? 메뚜기 재앙 이 병충해를 누가 막습니까? 괴질, 지금 우리가 톡톡히 값을 치루잖습니까? 인간의 힘-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국가적인 재난과 위기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시기 위하여 기근과 병충해, 전염병, 세 가지를 대표적으로 드셨습니다.

그러므로 13절 말씀은 쉽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과 위기가 찾아올 때에는." 이와 같을 때에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14절을 보세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국가적인 재난과 위기를 만날 때 세 가지를 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만일 기근이나 병충해나 전염병과 같은 국가적인 재난과 위기가 이스라엘을 휩쓸게 될 때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낮아지고 죽어져서 겸손해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저들의 땅을 고쳐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위기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메르스의 문제가 심각해도 우리가 이 땅을 고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의 이 고통과 탄식이 기쁨으로 분명히 바뀔 것입니다 -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의 탄식을 회복시키는 반전의 기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 아-멘 이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오늘의 문제를 안일하게 대처하지 말고 그동안 우리에게 은혜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쉽게 망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너짐이 오늘 우리 주변에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이제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다.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가 주의 은혜 앞에 설 때 이 땅을 주께서 고쳐 주실 것입니다.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타락하는 것을 막아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 가지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 성적 타락입니다. 성적인 타락이 넘치면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됩니다. 인간의 욕망이 잘못 분출될 때 가정 밖에서 모든 지저분한 죄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너지면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는 것입니다. 롬 1:24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성 중독 환자들이 늘어나고, 근친상간의 일들, 무분별한 동거문화가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적 방종과 타락이 극한 사회에서 항상 대두되는 것 중의 하나가 동성애 문제입니다. 28일에 퀴어 축제라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동성애 축제를 열도록 서울시가 허가를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박수치며 동의하는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만약에 내 자녀가 온 몸을 발가벗고 그 축제에 참가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느냐구요. 만약에 내 자녀가 서울시청 앞에서 홀라당 벗고 여자끼리 키스하고 남자끼리 애정행각을 벌인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말입니다. 또 어느 날 아들이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서 신부감을 데려왔는데 남자애를 데려왔다고 합시다. 또 하나 밖 에 없는 딸아이가 신랑감을 데려왔는데 치마를 입은 계집애를 데려왔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마음이 정말 기분이 좋을까요? “야, 신랑감, 신붓감 잘 데려왔다고 내 자식도 환영해 주며 박수를 쳐 주겠습니까?” 아마, 남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막상 자녀가 그렇게 된다면 가슴이 미어지고 아프리라고 봅니다.

지금 국회가 추진하는 소수차별금지법은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어요. 여러분! 소수인권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약자들의 인권이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성애법의 독소조항만큼은 반드시 빼야합니다. 동성애자들은 고아와 과부 등의 사회적 약자들과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동성애 차별 금지법이 합법화되면 미래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해요. 동성애자들은 통계에 의하면 대부분 2-3년 동안 서로 사랑을 하다가 헤어진다는 거예요. 그리고 대부분 일찍 병들어서 단명을 한다든지 단명을 하지 않아도 노년에는 다 홀로 살아요. 뿐만 아니라 자녀를 생산할 수가 없으니까 입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입양을 해서 아이를 키우더라도 그 아이들 대부분이 후천적으로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동성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거야 말로 미래의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는 공공의 적이요 사회적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정신 차리고 이런 법안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교회가 하나가 되고, 한 목소리를 내야 해요. 교회만으로 부족하면 건강한 가정과 건전한 사회를 이루기 원하는 시민들도 일깨워서 모두 함께 연합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도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과 더 많이 닮는 모습으로 살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똑같이 욕망하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똑같이 추구하면서 거기에서 얻어지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며 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닮아가고 세상을 따라 가는 것은 결코 믿음의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19절의 말씀처럼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는 이 말씀 앞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물론 나 하나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변화 시킬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비 효과’라는 말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 주에 발생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 입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멀리 떨어진 곳에 영향을 끼쳐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하며 허리가 꺾이고, 형벌 같은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반드시 우리 조국 교회는 제사장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신 민족입니다. 지금 이 위기를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저는 지금 조국 한국 교회의 전망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하나님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여기 동성교회에 앉혀 놓으시고 이 예배당이 비록 나비의 작은 날개 짓처럼 보일찌라도 지금 주님은 우리를 여기서 연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예배의 자리가 이 민족을 살리고 세상을 다시 복음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현장임을 알고 묵묵하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오직 말씀만이, 오직 주의 은혜만이, 오직 믿음만이, 무너져가는 조국의 교회를 다시 세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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