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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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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해야 할 이유 신33:28-29절 2015년 6월28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6-28 | 조회: 1255
독일의 시인 Karl 부쎄가 쓴 ‘산 넘어 저 산 넘어’라는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저 산 너머 멀리 헤매면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기에 / 아~ 남들과 어울려 찾아갔다만 / 울면서 되돌아 왔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아마 여러분도 다 그러실 겁니다.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행복 추구의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마땅한 기본 권리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소위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본능이고 기본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또 저마다 나름대로 행복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행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지난 수요일에 세계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24일 공개한 세계 웰빙 지수에서 그러니까 행복지수에서 한국은 145나라 가운데 117위에 랭크됐다고 합니다. 뭐, 거의 꼴찌에 가깝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자신의 삶에 대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까? 요즘처럼 개인이 당하는 어려움보다 국가가 당하는 일로 마음들이 무척이나 무거울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누군가를 자꾸 정죄하는 일들입니다. 물론 잘못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더 지혜를 모둘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 말씀은 백전노장 모세가 임종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한 말씀입니다. 120년 동안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불세출의 영도자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남긴 최후의 유언이자 예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의 말씀이야말로 모세의 일생 동안의 신앙을 총정리 하는 참으로 중대하고 엄숙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차례로 축복한 모세는 마침내 본문 29절에 단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여기 "너는 행복자로다"라는 말은 "너는 지극히 행복한 사람이로구나"하는 감탄과 탄복의 외침입니다. 여러분,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자입니까? 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행복자라고 탄복했습니까?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왜 우리가 어떤 환경 앞에서도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살펴 보고자 힙니다.




첫째로,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구원받은 행복한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29절에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행하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출애굽에서부터 모세의 임종에 이르기까지 숱한 난관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구원해주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생활을 할 때, 애굽 왕 바로의 압제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장자를 죽이는 죽음의 천사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합니까? 홍해에 가로막혀 몰살당할 위기에서 홍해가 갈라져 맨 땅처럼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이 인간의 공적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목말라 죽을 위기에 닥쳤을 때, 반석에서 생수가 나와 해갈할 수 있었던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굶어 죽을 위기에서 하늘의 만나를 40년 동안 먹은 것이 인간이 쟁취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까?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여호와의 구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 구원이라는 단어처럼 흥분되는 단어가 없습니다. 구원 안에 숨겨진 의미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원 안에 우리의 진짜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광대하고 풍성해서 우리가 다 받아들일 수 없지만 우리의 갈증, 궁핍, 절망적 상태를 더 걷어내기에 충분한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모습이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자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나의 상태와 형편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조금만 열고 주어진 이 기회에 반응하기만 하면, 폭포수 같은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너무도 강력해서 저항할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구원의 황홀함 속에 빠져있는 성도들을 볼 때 어떻습니까? 저는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 가운데 한 분도 은혜의 사각지대에 있는 분이 없고, 모두가 구원의 경험을 얻기 바랍니다. 이미 드러난 진리, 내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진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 있는 이 시대에 구원과 은혜를 못 받는다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 다시 묻습니다. 그렇게 감격하며 내 한 목숨 죽어도 좋은 목숨이라고 하며 헌신하던 구원의 그 감격, 그 첫사랑 우리 다 있지 않습니까? 그거 어디다 잃어버렸습니까? 이제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그 첫사랑은 무엇보다 주님을 처음 만난 구원의 감격입니다. 그 구원의 감격이 상실되면 영혼도 죽습니다. 삶도 일그러집니다.

여러분, 시편 51편에 보면 위대한 성군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나중에 권력 기반이 잘 닦이고, 힘을 쓰기 시작하자 못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소유하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왕이기에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못된 죄악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얼마나 회개하느라고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시52:12절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그가 범죄하기 전에는 삼하5:12절에는 '나 같이 이름없는 목동을 하나님께서 크게 보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고 찬송하며 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흥분을 느끼며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자 구원의 기쁨이 마음 속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음이 지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나중에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구원의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주세요. 그러면 내가 모든 죄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죄인들이 내가 전한 복음을 듣고 돌아올 것입니다.' 여러분, 왜 전도 안하죠? 왜 헌신하는 삶을 두려워 하죠? 왜 마른눈을 가지고 남의 문제점만 들추워내기 급급하고 비난하고 정죄합니까? 구원의 기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그 전하는 말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야, 좋긴 굉장히 좋은가 보다. 믿기만 하면 대단한가 보다.' 하는 어떤 감동까지도 전달되게 됩니다. 결국 안 믿던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고 우리가 감사해야 할 진정한 이유는 주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2 6-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 하나님의 팔 안에는 돕는 방패와 칼이 있어서 세상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여기 여수룬이란 말은 ‘나의 의로운 백성’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를 때 애칭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공식적이고 법적인 관계를 말씀하실 때는 ‘이스라엘’, 혹은 ‘야곱’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지만, 부모가 자녀를 “아이고, 귀여운 내 새끼”라고 부르듯이 이스라엘을 애칭으로 부르실 때는 ‘여수룬’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를 어떻게 광야 길을 인도하셨습니까?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 신명기 1장에 보면 모세는 광야를 ?그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나온 광야에 많은 위험과 어마어마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자연히 그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물을 구하지 못해 모세에게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봅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며칠을 굶었는지 모르지만 배가 고파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마실 물이 전혀 없어 어린아이들도 물을 달라고 엉엉 웁니다. 짐승들은 픽픽 쓰러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성을 잃고 맙니다. 나중에는 모세를 향해 돌을 던질 것 같은 정말 기막힌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며칠에 한 번씩 천막을 쳤다 걷었다 하는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들 안에서도 분쟁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늘 불안하고 지루하고 힘들고 짜증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광야생활이 하나님 품에 안겨서 걸어가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죽지 못해 끌려가는 삶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되었습니다. 이러니 모세가 ?너희는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서 이 광야를 지나왔다?고 해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과장된 소리를 하는 것으로, 거짓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세는 이처럼 험난한 광야생활을 놓고 백성들과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모세가 혼자만 구름을 타고 다닌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백성들과 똑같이 고생하면서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어쩌면 백성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80세가 넘은 고령에, 광야에서 수백만 명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의 자리는 피를 말리는 위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광야 여정을 고난의 통로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걷는 은혜의 통로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숨막히는 환경만 쳐다보며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눈을 고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래의 것, 곧 눈앞의 현실을 쳐다보고 있는 반면, 모세는 위의 것, 곧 하나님의 약속을 쳐다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제 가나안을 바라보는 이 길목에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에 안겨서 온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팔은 이스라엘의 안전한 처소입니다. 하나님의 팔은 힘이 있는 팔입니다. 사랑의 팔입니다. 품으시는 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길에서 하나님은 하나 님의 백성들을 안아서 옮겨놓으신 팔입니다. 물에 빠진 자를 건지시는 팔입니다. 쓰러진 자를 일으키시는 팔입니다. 위험에 처한 자를 날개 아래 품으시는 팔입니다. 지금 그 팔에 내 인생을 돌보기 위해 방패를 가지시고, 칼로 적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아십니까?




셋째로 우리가 감사해야 할 분명한 이유는 인생의 승리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9절에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29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최종적인 승리의 확신입니다. 원수는 일시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원수든,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원수는 결국 우리 앞에 굴복하고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질병이 우리를 쓰러뜨렸다고 축배를 들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치료하셔서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성숙시키십니다.

실패가 우리를 넘어뜨렸다고 좋아할지라도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심지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우리 노회의 어느 목사님의 사모님이 58세의 나이로 췌장암을 극복하지 못 한 채 7개월 만에 남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4일 동안 교역자 회장으로 그 장례를 주관하면서 정말 인간으로서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샘물 호스피스에서 임종 예배를 드릴 때, ‘안목사님 나 어떻게 살지요?’ 목사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의 절망의 눈물이 아니며 그 탄식은 불신의 탄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계곡에 서 본 일이 있습니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에 서 본 일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한밤중에 여러분의 허파 속으로 공기를 불어넣으며 펌프질을 하는 기계 소리를 누워서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나중에는 그 눈빛에 있던 생기의 빛마저 서서히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경험이 있다면 이 죽음의 계곡은 당신에게 낯선 곳이 아닐 것입니다.

그곳은 황량한 계곡입니다. 그 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계곡 밑을 내려다보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 계곡 끝에 서게 되면 모든 삶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못한 것이 금방 구별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내가 무슨 차를 타고 왔느냐, 내가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 관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했고, 내가 사회적으로 얼마만큼 지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안중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인생의 성패, 승자와 패자, 성공자와 실패자라고 하는 어떤 구별도 그 자리에서는 하등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만큼 죽음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처럼 죽음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음 앞에 무기력해 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받아야할 형벌을 친히 십자가에서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마귀는 예수님 마져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 승리를 외치는 듯 했지만,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이 무서운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게 바로 모세 자신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마음이 찹찹하겠습니까?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가나안을 바로 눈 앞에 두고 다른 사람들은 다 들어가는데 자신만 제외입니다. 아마 왜만하면 좀 하나님께 따지고 싶을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얼마나 들어가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신명기 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자기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가나안 땅을 보고 있던 모세는 그 땅에 너무나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요구합니다. 신 3:25절에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그러나 모세의 그런 간절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3:26절을 보면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었는데, 눈으로 보니까 더 들어가고 싶었는데,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탁월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비록 가나안을 입성하지는 못했지만, 이것 때문에 애닮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오히려 미완성의 삶을 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알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드립니다. 이 땅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한다하더라도 이미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은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너는 행복자라고 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의 영원한 나라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신 그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지금은 내가 나의 이 현실과 처한 환경 앞에 왜 이 어려움이 있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께서 나의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세신바 된 그 뿐께서 왜 우리를 더 나은 인생으로 이끌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행복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해야 하지 않나요?

이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반드시 승리케 하는 그 하나님을 붙잡고 남은 후반기를 달려가야 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 감사의 신앙이 상실되었다면 다시 한번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는 신앙으로 늘 행복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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